사무엘상 강해(4) 2018. 8. 15
엘리의 패역한 아들들
삼상 2:12-26
믿음의 어머니 한나는 기도로 얻은 아들 사무엘을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후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와 함께 실로 성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에게는 제사장직을 물려받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엘리의 두 아들>
그런데 이 두 아들에게 대한 성경의 기록이 놀랍습니다.
12절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는 표현은 얼른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일하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 표현이 주는 의미를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지식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삶에 적용되지 않았기에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열매로 나무를 알리라”(마12:33)고 말씀하셨습니다.
‘행실이 나쁘다’는 말은 삶의 열매가 없다는 말입니다.
신분은 비록 제사장이지만, 삶에서 드러나는 열매가 없기에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책임지는 제사장직을 맡았음에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치 아니하고,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대적하는 행위를 일삼은 것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의 구체적인 죄악상>
엘리의 두 아들의 구체적인 죄악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첫째,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자기 것으로 가졌습니다.
13-14절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물 중 기름 부분만을 번제단에 태우고(레 3:3-5), 살코기 부분은 제사장과 제주(祭主)가 나누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졌던 제물 중 율법에 규정된 몫은 ‘흔든 가슴과 흔든 뒷다리’였습니다(레 7:34). 그러나 이들은 제사장의 권한을 이용하여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부분을 무조건 자신들의 몫으로 취하였던 것입니다. 두 아들의 이러한 행동은 제주(祭主)에게 당연히 돌아갈 몫까지 침범하는 분명한 죄악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행위가 ‘관습’, 곧 ‘습관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어쩌다가 한번 일어난 일이 아니라 늘 반복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둘째, 기름을 태우기 전에 날 것을 갈취하였습니다.
15절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일반 다른 제물로도 물론이거니와, 화목제의 희생 제물도 반드시 여호와의 몫인 기름(fat) 부분이 먼저 번제단 위에서 태워져 여호와께 바쳐져야만 했습니다(레3:3-5, 7:23-25, 17:6).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제사장 자신들의 몫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의 두 아들의 이러한 행동은 율법의 절차와 규정을 무시하는 행위였습니다.
셋째, 사람들의 바른 요청을 무시하였습니다.
16절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그 사람’은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소에 온 사람을 가리킵니다. 제사장들의 악행을 보다 못해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즉 자신의 몫에 대해서는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드린 제물이 하나님께 먼저 바쳐지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홉니와 비느하스는 “지금 내게 내라”고 다그치며 그들의 요청을 무시하였습니다. 제사장의 권한을 가지고 횡포를 부리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데 급급하였습니다.
이것이 당시 엘리의 두 아들에 의해 주관되던 실로 성소 제사의 타락상이었습니다.
문제는 엘리의 두 아들의 죄악이 제사를 드릴 때만 나타나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넷째, 도덕적으로도 타락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22-25절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4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엘리의 아들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습니다. 바알 신을 섬기는 자들처럼 성전에서 음란한 행위를 하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이러한 죄악은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엘리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엘리가 아들들에게 권면합니다.
23-25절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4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당시 엘리의 나이는 98세의 고령이었습니다(삼상 4:15).
그러나 엘리의 아들들은 늙은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엘리의 훈계가 소용없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하나님조차도 안중에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순종할 리는 없는 법입니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한편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다”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와 가나안 족속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표현처럼(출 4:21, 수 11:20), 그들의 범죄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으셨음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범죄로 인해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을 허용하신 것이지 그들로 범죄 하도록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실 내버려 두는 것이 이미 심판의 시작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타락의 길을 걷는 인간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오히려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직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12:5-8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 아들이 아니니라.”
이러한 엘리의 두 아들, 곧 홉니와 비느하스의 타락한 행위를 오늘 본문 17절을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17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엘리의 두 아들의 죄악은 단순히 제사 제물을 탐내어 그것을 탈취한 강도 행위일 뿐 아니라,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멸시(니아추: נאצו)’는 하나님을 향한 악인들의 적극적인 도전과 방해 공작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도덕적, 윤리적인 죄일 뿐 아니라 신성 모독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오늘 여러분이 크게 깨닫는 부분이 있었어야 합니다.
신앙이 형식과 습관으로 전락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처음 받은 은혜를 유지하는 것이 건강한 신앙생활의 비결입니다.
교회에 잘 출석하고, 헌금하고, 봉사한다고 다 성도가 아닙니다.
먼저 예배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자신을 만족하게 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는 예배여야 합니다.
요4:23-24(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적극적으로 닮아가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르침 – 마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도 바울은 몸이 곧 성전임을 가르치고,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위(행실)가 복음 전도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더욱 겸손하고, 더욱 덕을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나아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수준에 이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섬기는 사무엘>
오늘 본문은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악상을 그린 후에 대조적으로 어린 사무엘의 이야기를 대비시킵니다.
18-21절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19 그의 어머니가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그의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20 엘리가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매/ 21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에봇은 본래 제사장들이 입던 일종의 겉옷입니다. 대제사장의 에봇이 색실로 만든 화려한 것이었다면(출 28:6) 일반 제사장들의 것은 그냥 세마포로 만든 희색 에봇입니다. 사무엘이 에봇을 입고 여호와를 섬겼다는 것은 그가 본격적으로 성소 봉사를 수행하였음을 보여줍니다.
한편 사무엘의 부모, 엘가나와 한나는 매년 실로에 올라갔습니다. 한나는 실로에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 사무엘에게 입혔습니다. 이것은 비록 사무엘이 하나님께 영원히 바쳐졌지만(1:11), 그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애틋함을 보여줍니다. 사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고 한나는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하루하루 실로에 올라갈 날을 기다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 한나의 마음을 잘 아는 엘리는 한나에게 축복의 기도를 드립니다.
20-21절 “엘리가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매/ 21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엘리의 축복 기도는 그대로 이루어져 이후 한나는 3남 2녀를 더 낳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크신 위로요, 풍성한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하고, 아낌없는 헌신은 하나님이 반드시 기억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기도와 삶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도 넉넉한 은혜로 화답하실 것입니다.
더욱 후하게 화답하여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부요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후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21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6절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하나님께서 새로운 영적 지도자의 세워가고 계심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맺는 말씀>
오늘 엘리의 패역한 두 아들의 죄악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개인적인 권력으로 오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특권을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용했습니다. 이런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십니다.
현대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지 개인의 소유물이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목회자나 평신도의 직분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수단이지 신분 상승이나 권력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직분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교회 안에서 진정한 권력은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과 같이 섬김에서 나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직분은 결코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장이었지만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직분과 믿음이 정비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직분을 받았던지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요, 소명임을 깨닫고 그 직분에 합당한 믿음과 행실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엘리의 패역한 두 아들을 경계로 삼아, 우리 사도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더욱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모습으로, 말이나 행동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