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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완성)

사무엘하 강해(25) -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작성자박춘경|작성시간23.05.24|조회수358 목록 댓글 0

사무엘하 강해(25) 2023. 5. 24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삼하 11:14-27

 

<실패한 은폐 시도>

 

우리는 지난 시간, 다윗의 범죄를 통하여, 딱 한 번의 범죄가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를 배웠습니다. 죄는 그냥 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라납니다.

마귀도 그것을 알기에 딱 한 번만 하라고 유혹합니다. 절대로 들통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딱 한 번만 죄를 짓고 손을 씻으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실 마귀는 단 한 번의 범죄가 우리를 끝장나게 할 것을 알기에 그렇게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딱 한 번의 범죄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 딱 한 번이 우리를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 딱 한 번을 믿음으로 방어해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과 동침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임신한 사실을 안 다윗은 정신이 나갔습니다. 자신의 범죄가 들통나게 될 것이 두려웠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 전쟁터에 나가 피 흘리며 싸우고 있는 자신의 부하의 아내와 동침하여 임신을 시켰으니, 이것은 단순히 다윗 개인적인 수치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군신 간의 신뢰가 깨져버리는 사건이고, 그동안 다윗을 중심으로 하나로 모였던 이스라엘의 마음이 흩어져버릴 수밖에 없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제 다윗은 침상에 있어도 쉴 수 없었습니다. 옥상을 거닐며 바람을 맞아도 시원함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어도 식욕이 돋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여, 훌륭한 왕이라는 인정과 칭찬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을지에 꽂혀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들여 자신의 아내와 동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태어날 아기가 자신의 아기라고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완벽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려온 우리아는 다윗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요, 의리의 사람이요, 다윗에게 대한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삼하11:11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

 

그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왕궁 입구의 수비병들과 함께 잤습니다.

다윗이 ‘술의 힘’을 빌려, 그로 취하게 하여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하려 하였으나, 우리아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다윗의 살인 교사>

 

우리아로 자기 아내와 동침케 하려는 작전이 실패하자, 다윗은 더욱 간교하고도 악한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14~15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15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다윗은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보냅니다. 아마도 봉인을 했을 것입니다. 봉인된 왕의 편지는 편지를 받는 당사자가 아니면 아무도 열어볼 수 없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우리아를 최전선에서 싸우게 하고, 다른 병사들은 후퇴해서 그가 적군의 손에 죽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작전은 다윗이 우리아를 잘 알고 있기에 내릴 수 있는 작전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아는 다윗의 37인 용사 중 한 사람입니다(23:39). 따라서 그가 일단 싸움에 임하면 명령 없이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바로 이런 점을 이용하여 우리아를 전투의 선봉장(先鋒將)에 세워 죽게 하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간음죄를 넘어서는 살인 교사 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경건의 대명사로 알아 왔던 다윗이 어떻게 이런 추악한 계략까지 세울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노예가 된 인간 실존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작가 스티븐슨이 1886년에 쓴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학식과 자비심 많은 지킬 박사는 인간 안에 있는 선과 악의 모순된 이중성을 약품으로 분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침내 약품을 만들어 복용한 결과 지킬은 악성을 지닌 추악한 하이드로 변신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면 다시 선한 지킬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악이 선을 이겨, 약을 먹지 않아도 하이드로 변신하면서, 나중에는 지킬로 되돌아가지 못합니다. 마침내 하이드는 살인을 하고, 경찰에게 쫓겨 체포되려는 순간 자살하여 모든 것을 유서로 고백한다는 내용입니다.

곧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지만, 선이 악을 이길 때보다는 악이 선을 이길 때가 많고, 끝내 악이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인간의 이중성을 문학 작품을 통해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3:10-18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네 인생의 본모습, 평생 시를 써가며 하나님만 의지하여 살았다고 하는 다윗의 본래 모습입니다. 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니 본래의 자기 모습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다(59:2a)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죄는 세 가지를 파괴합니다.

첫째,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렇고, 이후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원죄와 자범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둘째, 사람과의 관계도 파괴합니다. 죄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원망과 거짓과 불신이 생겼습니다.

 

셋째,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파괴합니다. 스스로를 속이게 하고, 양심을 마비시킵니다. 죄가 ‘사망’을 불러들였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이 원수된 관계를 회복시키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죗값을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대속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가 끝이 났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신분을 얻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었습니다.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 자신과의 관계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를 성전 삼아 주셔서, 성령님께서 거주하시는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순간, 내적 갈등이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후로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기를, 즉 성령님께서 내 마음을 지배하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만일 계속해서 죄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꼴이 됩니다.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죄를 지은 것이 생각나거든, 속히 회개하고 그 죄가 더 이상 여러분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끊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악의 동조자>

 

편지를 받은 요압은 어떻게 하였을까요?

16~17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이 있는 것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17 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다윗의 편지를 받아 읽은 요압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두말하지 않고 왕의 명령대로 시행하는 것입니다(어느 보험회사 광고 문구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것은 왕에게 자기의 충성심을 증명하는 길입니다.

또 역으로, 왕의 약점을 잡음으로 훗날 자신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는 보험이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대 왕정 시대라 할지라도, 잘못된 왕의 명령을 무조건 따를 수는 없습니다. 정당히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음모에 가담할 수는 없습니다. 왕보다 더 높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그런 음모에 가담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는 군사령관에서 쫓겨날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아가 누구입니까? 우리아는 다윗의 서른 일곱 용사 중 한 명이며 요압의 직속 부하였습니다.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최소한 일의 자초지종을 알아본 후, 죄 없는 우리아를 위해 다윗에게 탄원서를 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어떤 길을 택했습니까?

16(새번역) 요압은 적의 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적의 저항 세력이 가장 강한 곳에 우리야를 배치하였다.”

 

예, 오직 권력에 아부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불의에 가담하였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그의 행동은 다윗이 범죄를 더욱더 심화시켰고, 나아가 그 자신도 죄를 짓게 되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하수인들이 되어서 옳고 그름의 판단 없이 그저 권력의 눈치를 보며 불의한 일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행동이 인간의 눈에 성공적인 처세술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영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일입니다(16:25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즉 불의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짓밟으면서 얻은 성취와 승리는 일시적으로 형통하고 성공한 듯이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 총독 빌라도를 보십시오. 로마 총독이라는 최고의 권세자였지만 진리를 따르기보다는 당시 주류 세력이었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불의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준 빌라도는 역사의 죄인으로 남아있습니다(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또 다윗의 사악한 계략은 이스라엘군의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즉 우리아 한 사람을 죽이려던 다윗은 자신의 불의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결국 유능한 장수들(병사들) 여러 명을 잃고만 것입니다.

 

<보고하는 요압>

 

이것은 예상치 못한 큰 손실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전령을 보내 보고를 합니다.

18~21요압이 사람을 보내 그 전쟁의 모든 일을 다윗에게 보고할새/ 19 그 전령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전쟁의 모든 일을 네가 왕께 보고하기를 마친 후에/ 20 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그들이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21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위짝을 그 위에 던지매 그가 데벳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

 

예상외로 큰 손실을 보자, 요압은 왕의 문책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사실 성에 가까이 가는 것은 무리한 공격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다윗이 책망할 내용까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21).

 

'여룹베셋'은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기드온(Gideon)의 별명입니다. 본래 기드온의 별명은 여룹바알(Jerubbaal)이었으나(8:35), 후대에 '바알'이란 명칭이 이방신의 이름이었기에 베셋으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이 세겜의 첩을 통해 낳은 아들입니다(8:31). 그는 부친인 기드온이 죽자, 자기 형제 70인을 모두 죽이고 므낫세 족속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에 반발한 세겜 사람들은 '가알'을 지도자로 하여 아비멜렉을 대항하였으나, 아비멜렉은 오히려 그들을 물리치고 성을 헐며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 천 명을 불살라 죽였습니다(9:46-49). 그리고 이러한 여파를 몰아 아비멜렉은 데메스마저 치려 하였는데, 그때 도리어 한 여인이 망대 위에서 던진 맷돌에 맞아 죽었습니다(9:50-57). 그러므로 아비멜렉의 이와 같은 역사는 전쟁에 능한 다윗 왕과 요압 이외에도 많은 군지휘관들에게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 전술을 깨우쳐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수세(守勢)에 몰린 적의 성에 가까이 가는 것은 우발적인 죽음을 초래하기 쉬운 위험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군대 내에서도 이러한 역사는 다윗뿐만 아니라 많은 지휘관에게도 널리 읽히고 알려졌을 것입니다(Lange).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 익숙해 있던 요압이 암몬의 랍바성 근처에서 이스라엘의 귀중한 인재들을 많이 잃었다고 하는 사실은 다윗 왕의 분노를 일으킬 만하였을 것입니다.

 

요압은 전령에게 다윗이 책망하거든 왕의 종 헷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고 보고하라고 합니다.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성 밑 가까이에 진입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한 것입니다. 즉 다윗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필연적인 불상사(不祥事)였다는 요압의 그럴듯한 해명이었습니다.

 

전령은 요압이 시킨 대로 보고합니다.

22~24전령이 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요압이 그를 보낸 모든 일을 다윗에게 아뢰어/ 23 이르되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우세하여 우리를 향하여 들로 나오므로 우리가 그들을 쳐서 성문 어귀까지 미쳤더니/ 24 활 쏘는 자들이 성 위에서 왕의 부하들을 향하여 쏘매 왕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죽고 왕의 종 헷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니.”

 

<다윗의 반응>

 

전령의 보고를 받은 다윗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25다윗이 전령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하니라.”

 

다윗은 다른 부하들이 죽은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전쟁의 승패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아가 죽었으니 된 것이지요? 화살이 미치는 거리까지 정신없이 쳐들어간 것에 대한 문책 대신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매우 관대한 왕인 것처럼 위장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라는 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얼마 후 그 칼은 자기 아들들에게 임했습니다(압살롬이 암논을 죽임). 그리고 그 압살롬의 칼은 다윗의 목을 노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부메랑과 같습니다. 반드시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다윗의 성공적인 은폐 작전?>

 

우리아의 전사 소식은 그의 아내 밧세바에게 전달되었습니다.

26~27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내어 우니라/ 27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밧세바가 다윗의 음모를 알았을까요? 아마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단순히 전투 중에 남편이 죽은 것으로 알고 슬피 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애도하는 기간이 지나니,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서, 그 여인을 왕궁으로 데려왔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그 당시에는 신하가 죽으면 그 아내를 데려와 아내로 삼는 것은 큰 은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많은 사람은 오히려 다윗 왕을 높이고 칭송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다윗의 은폐 작전은 완전히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우리아를 제거함으로써 후환을 제거하였고, 밧세바의 임신 사실이 외부에 노출되기 전에 왕궁으로 데려옴으로써 자신의 범죄 사실을 완벽하게 감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완전 범죄였습니다(요압과 왕의 침실을 지키는 몇몇 내신들만 입 다물고 있으면).

 

<맺는 말씀 -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그러나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27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죄의 노예가 되어버린 다윗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속인 것으로 마음에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이 끝나면 반드시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의 신앙은 코람데오’(Coram Deo, ‘신전의식’(神前意識))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라틴어 코람‘~의 앞에라는 뜻이고, 데오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코람데오’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내 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세로 살라는 의미입니다.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늘 말해 왔고, 날마다 마음에 새겼던 용어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내가 지금 하나님의 임재 앞에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늘 말씀과 기도로 깨어있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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