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강해(37) 2023. 8. 23
언약궤를 돌려보내는 다윗
삼하 15:24-29
<지난 시간 요약 - 기드론 시내를 건너다>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급히 도망을 갑니다. 단지 두려웠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이 전화(戰火)에 휩쓸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벧메르학’(먼 궁)이라는 곳에 도착한 다윗은, 누가 자신을 따라 나왔는지 점검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가까운 신하들 외에, 다윗과 함께한 군대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 같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들은 다윗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던 용병들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 가운데서 특별한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바로 ‘잇대’란 사람입니다. 그는 ‘쫓겨난 나그네’(정치적인 망명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망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를 배려하여, 자신을 따라가면 또다시 고생길이 될 테니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즉, 새로 권력을 얻어 강성해지고 있는 ‘압살롬’에게 가담해 안전을 도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잇대는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왕의 살아계심을 두고 왕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사나 죽으나 함께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자신을 받아 준 다윗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충성심에 감동한 다윗은 그와 함께 온 수행자들과 가족들을 가장 먼저 ‘기드론 시내’(23)를 건너가게 합니다. 잇대와 그의 가족을 가장 먼저 보호하려는 다윗의 배려가 돋보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자신을 따라 온 백성들을 건너게 합니다. 다윗은 마지막으로 건넜습니다. 급박한 순간이지만, 다윗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자질을 여전히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드론 시내’를 건너면 ‘광야 길’입니다. ‘광야 길’은 여리고에 이르는 험한 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윗을 따르는 백성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건넜습니다. 그들은 다윗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임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생길임을 알면서도 ‘기드론 시내’를 건넌 것입니다. 곧, 다윗의 편(하나님의 편)에 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택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큰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비록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 고난의 길’(좁은 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믿기에 담대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사독과 아비아달>
다윗의 일행이 ‘기드론 시내’를 건넜을 때, 다윗에게 반가운 일이 생겼습니다.
24절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대제사장이었던 ‘사독’과 ‘아비아달’입니다. 먼저 ‘언약궤’를 메고 나와 감람산 어귀에서 다윗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독과 아비아달은 공동 대제사장입니다. 본래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으로 있었는데, 다윗이 예루살렘 성읍을 점령하는데 특별한 공을 세운 사독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합니다(여부스 제사장으로 있었음 – 비밀 통로를 알려줌).
| 아론에게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 네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아론보다 먼저 죽게 되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기” 때문입니다(레 10:1-2). 그래서 남은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제사장 직분을 행합니다. 다윗이 대제사장으로 임명한 사독은 셋째 ‘엘르아살’의 자손입니다(대상6:4~8). 사독은 훗날 사두개인의 선조가 됩니다. 반면 아비아달은 넷째 ‘이다말’의 후손입니다. 사독은 주로 기브온에서 제사 지내는 일에 집중하였고, 아비아달은 언약궤를 관리하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생을 함께했던 이 두 제사장은 다윗의 통치 말년에 다윗의 후계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였습니다. 아비아달은 요압과 손을 잡고 다윗과 학깃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합니다(넷째). 그렇지만 사독은 다윗의 명령에 따라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나단과 밧세바와 손을 잡고).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아비아달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합니다(왕상2:27). ‘이다말’ 제사장 가계는 ‘아비아달’을 끝으로 문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사독의 후손들은 예수님 당시까지 계속해서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비아달이 제사장 직분을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습니다. 왕상2:27 “솔로몬이 아비아달을 쫒아내어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 이 예언은 엘리 제사장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엘리 제사장이 바로 아론의 넷째 아들 ‘이다말’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 가문이 끊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삼상 2:27-36). 그럼에도 당장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엘리 제사장 가문에서 대제사장이 나왔는데, 그가 바로 ‘아비아달’입니다. ‘아론’ - ‘이다말’ - ‘엘리’ - ‘아비아달’로 이어진 것입니다. 아비아달이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됨으로 하나님의 예언이 완전히 성취된 것입니다. |
대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그리고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메고 나와 다윗을 기다렸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하신다는 중요한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종교적 상징입니다. 그것을 소유하는 자가 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윗에게 있어, 하나님의 언약궤는 특별한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후,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20년간 방치되었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고자 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앙적인 이유였습니다. 자신은 왕궁을 잘 짓고 거주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방치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이유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 상징이었던 법궤를 가져옴으로써 자신의 왕권의 정당성을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운반해 오는 과정에서 큰 실수가 있었습니다.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가 하나님의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옮기려 한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법궤는 레위 지파 고핫 자손이 언약궤 채를 사용하여 어깨에 메고 가야 했습니다(출37:5, 민7:9).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수레를 끄는 소들이 뛰는 바람에 법궤가 떨어지려 하자 웃사가 손을 내밀어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그러자 그만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결국, 법궤는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3개월 동안 머무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온 집에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가 풀린 사인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게 합니다.
이번에는 철저히 말씀을 따라 언약궤를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고 오게 합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언약궤를 보고 기쁨에 겨워 춤을 추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몸의 일부가 드러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다윗의 아내 미갈(사울의 딸)은 다윗을 비난합니다. 백성들 앞에서 왕으로서 체통을 잃고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다윗은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 일로 인해 다윗과 미갈의 관계가 틀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언약궤에 대한 다윗의 애정은 남달랐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언약궤’가 다윗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을 것입니다. ‘언약궤’가 다윗을 따라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한다는 뜻이고, 백성들의 마음을 다시 다윗에게로 돌리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돌려보내는 다윗>
그런데 다윗은 전혀 예상 밖의 말을 합니다.
25~26절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의 원래 있던 곳으로 가져다 놓으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다윗의 위대한(여전한)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만을 겸손하게 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25b “...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언약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다윗은 자신이 겪는 고난이 나단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하나님의 심판임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났는데,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은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다윗에 중요한 것은 언약궤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하심, 즉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나 물건에 제한되어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전에 다윗이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왕궁에 살면서, 여호와의 궤는 휘장 안에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법궤를 안치해 둘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습니다. 나단도 처음에는 동의하였으나,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단을 통하여 다윗은 손에 피가 많이 묻었기 때문에 성전을 짖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삼하7:7b)면서 하나님은 성전 안에 제한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머무르는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궤를 모실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다시 하나님의 궤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모세가 홍해 앞에 섰을 때, 지팡이로 홍해를 쳤습니다. 그러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러면 지팡이가 능력이 있는 것입니까?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에 어떻게 건넜습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가자 강물이 갈라졌습니다. 그렇다면 법궤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사울 왕 시절,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블레셋과 전쟁에 나갔는데, 왜 법궤를 빼앗긴 것입니까?
지팡이나 법궤는 상징(도구)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굳은 믿음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매 주일 예배당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물론 소중한 결단입니다.
‘영과 진리’, 곧 성령 안에서 말씀 가운데 온 마음을 드려 예배하지 않으면 그 예배는 형식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 안에 있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는 마음에 있습니다. 가슴 속에 있는 믿음이 진짜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으면 법궤를 열 개씩 끌어안고 있어도 그것은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껍데기 신앙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이 다 선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26절b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이 고백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이가,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내려진 징계조차 ‘선하신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벌’로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끝내 자신을 용서하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징계를 겸손히 받아들이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욥의 믿음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고도, 그는 하나님께 나아와 엎드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하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실 때는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믿음은 하나님이 가져가실 때 드러납니다.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믿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걱정하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빌1: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간수 가족 구원)
빌1:20b~21 “...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래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행사를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행사는 다 선하시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인내하셔서, 끝내 하나님께서 맺게 하시는 ‘선한 열매’를 확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하지만 다윗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특별한 부탁을 합니다.
27~29절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읍으로 돌아가라/ 28 너희에게서 내게 알리는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리라 하니라/ 29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머물러 있으니라.”
다윗은 사독에게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고 말합니다. 제사장에게는 두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첫째는 제사장적 사명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둘째는 예언자적 사명입니다.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고 말한 것은 이 예언자적 사명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 ‘선견자’는 앞일을 미리 내다보는 식견이나 능력을 지닌 사람이란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로에’와 ‘호제’ 두 단어가 사용되는데, 둘 다 ‘보다’, ‘응시하다’는 뜻으로서 ‘꿈이나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반면 ‘선지자’란 히브리어로 ‘나비’인데, ‘선포하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주의 뜻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자’를 말합니다. 따라서 선견자는 계시를 받는 측면이, 선지자는 선포하는 측면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직무상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삼상 9:9). 선지자 사무엘은 자기 자신을 ‘선견자’라 했습니다(삼상9:19, 대상9:22).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역사적 사명은 ‘선견자’와 ‘선지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미래를 점치는 자가 아니라 오늘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요구하시는 뜻을 먼저 깨닫고 전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
다윗이 지금 사독에게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고 말한 것은 지금부터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라는 요구입니다.
그 방법을 제시합니다. 사독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선견자’의 역할을 수행해 달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압살롬의 동태를 살펴 자신에게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가서, 그들이 다윗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연락책’(전령)으로 활용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들이 전해준 정보를 듣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가는 나루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사독과 아비아달은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사람과 상황을 이용하는 다윗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인간이 노력하더라도 그 일을 성취하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온전히 여호와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 하나님께 올인(all-in)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다윗은 위대한 신앙인답게 위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불행한 일에 불평하기보다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다시 회복하게 하실 줄을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언약궤’까지 과감하게 돌려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결과를 주시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올인(all-in)이란 말을 아시지요? 특정한 대상이나 일 따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이나 시간 그리고 가진 전부를 쏟아붓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을 저울질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 어떤 믿음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올인(all-in)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가지고, ‘다윗과 같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늘 담대히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