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사경회 자료(5) 2022. 11. 13
발락과 발람 이야기
민21~25장
<구세대와 신세대의 교차>
우리는 지난 시간, 민21장을 살펴보면서, 출애굽 1세대인 구세대와 신세대가 교차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징벌로 주신 38년의 광야 유랑이 끝이 났습니다. 구세대의 마지막 남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정리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놋뱀 사건’입니다. 애굽에서는 노예 생활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불평과 원망을 일삼던 구세대가 이 사건으로 완전히 정리되었습니다. 이제 역사의 주인공은 출애굽 2세대로 넘어갑니다.
구세대와 신세대의 분기점이 한 골짜기를(세렛 시내)를 건너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민21:12, 신2:13-15). 세렛 골짜기를 건너면서 구세대는 완전히 정리되었고, 이후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출애굽 2세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신세대의 계속되는 승리> (민21:21-35)
이스라엘이 약속으로 받은 땅은 요단강 건너 서쪽에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동쪽에 있는 작은 도시국가들과는 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단지 통과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의 왕들은 겁을 먹고 그들이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왕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었습니다.
지도 보기 -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치다> 대한성서공회
1. 아모리 왕 시혼과의 전쟁
이스라엘은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신을 보내어 “우리에게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에든지 포도원에든지 들어가지 아니하며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당신의 지경에서 다 나가기까지 왕의 큰길로만 지나가리이다”(민21:22)하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시혼 왕은 이스라엘이 자기 영토로 지나감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군대를 모아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이 싸움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까지 점령합니다. 이스라엘이 시혼에게서 빼앗아 거주하게 된 헤스본이란 곳은 원래 모압에 속한 땅이었는데, 시혼이 전쟁을 통해서 빼앗은 것입니다(26).
이는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언했던 사대 뒤에 아모리 족속의 땅에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2. 바산 왕 옥과의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얍복 강 북쪽에 있는 바산 왕 옥과 싸워 이깁니다(35).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동쪽 지역 중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자손들인 모압과 암몬에게 허락하신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다 차지합니다.
이곳들은 나중에 이스라엘의 지파 중 두 지파 반, 즉 르우벤 지파,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의 땅으로 할당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동편의 막강한 아모리 두 족속을 물리친 이스라엘 신세대들은 사기충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통과해야 할 족속이 있었으니 그들은 요단강 동편, 평야 지대에 살고 있었던 모압 족속이었습니다.
<겁을 먹은 모압 왕 발락>
당시 모압의 왕은 발락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60만 대군과 200만 명이나 되는 거대한 민족집단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치고) 자신의 땅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겁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고자 하는 땅은 요단강 서쪽 가나안이었기에 겁을 먹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알지도, 믿지도 못하는 모압 왕 발락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고민하다가 미디안 장로들과 상의 끝에 아주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미디안 사람들은 주로 상업이나 유통업에 종사하였기에 정보에 빠름). 그것은 당시 유명한 점술가였던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민22:5-6 “그가 사신을 브올의 아들 발람의 고향인 강 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이르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 6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이 발람이라는 사람은 이방 잡신의 점술가였습니다. ‘복채를 받고 점을 쳐주는 점술가’였습니다(민22:7, 참고:민22:5, 수13:22).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점술가 중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모압 왕 발락이 그 먼 약 650km나 떨어진 브돌까지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입니다.
<발람의 반응>
첫 번째 요청 거절(민22:7-14) - 발락이 보낸 사람이 손에 복채를 가지고 왔습니다.
발람에게는 큰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모압의 왕은 그 지역에서 패권을 가진 자입니다. 권력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이고, 좋은 경력이 되고, 더 좋은 것은 많은 복채를 취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속으로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노련하게 바로 대답하지 않고,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테니 하루를 유숙하라고 했습니다. 오해하지 말 것은 그가 ‘여호와의 뜻’을 물었다고 해서 여호와의 선지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이스라엘을 이끄시는 신이 ‘여호와’란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부족 신 개념). 그리고 저주를 청원하는 모압(롯의 후손)도, 미디안(아브라함의 아들, 후처였던 그두라와 사이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무슨 소문이 돌았겠습니까?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신 ‘여호와’가 무려 40년 동안이나 그들에게 벌을 내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을 것입니다. ‘여호와’가 자기 민족에게 화가 나 있다라는 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소문은 얼마나 빠릅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을 이끌고 계시는 ‘여호와의 뜻’을 한 번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말씀하십니다.
22:12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본래 하나님은 복술자를 싫어하십니다(신18:12-14). 그런데 왜 그에게 임하여 말씀하셨을까요? 역설적이게도 악인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악인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릴 때 경험한 일입니다. 동네에서 굿을 하는 것을 구경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굿을 해도 그 날따라 신내림이 없다고 하면서 무당이 하는 말이 “오호, 물러가라 물러가라. 여기에 사람들 중에 예수 믿은 사람이 있다. 얼른 물러가라. 그자 때문에 신내림이 없구나~!” 놀랍게도 저는 그날 제 안에 예수님의 영이 거하시는 것을 무당을 통해 증거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와 귀신을 쫓아내실 때, 정작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정작 귀신 들린 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았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맞은편에 있는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니 무덤 사이에서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막5:7)하고 부르짓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꾸짖어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군대 귀신이 즉시로 쫓겨나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에게 들어가니, 돼지들이 호수로 뛰어 들어가 몰사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때로는 귀신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놀랍게도 이방인 백부장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점술가인 발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셨습니다.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12) 라는 것입니다. 이에 발람은 가지 않겠다고 거절합니다.
두 번째 요청과 승낙 – 그러나 모압 왕 발락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내’ 그의 마음을 돌이키려 합니다(민22:15-20). 더 많은 복채도 제시했을 것입니다. 자, 발람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이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기에 그들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발람은 한 번 더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보겠다고 여기서 하룻밤을 유숙하라고 합니다(19). 이것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졌음을 뜻합니다. 더 많은 복채에 그의 마음이 흔들렸고,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이 넘어간 것을 아시고 조건을 붙여 허락하십니다. “내가 네가 이르는 말만 준행하라”는 조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허락이 곧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번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낼 때에도, 그들의 요청으로 허락하셨지만,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정탐꾼을 보낸 결과로 그들은 38년을 광야에서 유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경고를 받음>
하나님은 발람이 발락에게 가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3차에 걸친 나귀와 씨름에서 드러납니다.
1차(21~23절) - 발람은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출발합니다. 그런데 그 길을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을 막고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귀가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발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나귀를 채찍으로 내리쳤습니다.
아니 짐승인 나귀의 눈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보이는데, 소위 영험하다는 발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사자의 모습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것은 그가 탐욕에 눈이 멀어, 영의 눈이 어두워져 있음을 드러냅니다. 성경은 ‘탐욕은 우상숭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탐욕에 눈이 멀어, 우상을 섬기는 마음으로 변질되는 순간’, 우리의 영의 눈은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채찍으로 얻어맞던 나귀가 보니, 길을 막아섰던 여호와의 사자가 보이질 않습니다.
2차(24~25절) - 밭을 나와 다시 가는데, 포도원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본 나귀가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짓눌렀습니다. 화가 난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였습니다. 나귀가 보니 포도원의 좁은 길을 막아섰던 여호와의 사자가 보이질 않습니다.
3차(26~30절) - 그래서 다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 보니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여호와의 사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귀는 이번에는 아예 바닥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막 때렸습니다. 그 순간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셨습니다. 나귀가 발람에게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하고 항의를 하였습니다. 발람이 어이가 없어서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귀가 발람에게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하며 항변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가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말씀했습니다. “나귀가 나를 보고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하고 말하자,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하고 분명한 경고를 주십니다(31~35절). 이 말씀은 하나님이 발람을 통해 모압 왕 발락 앞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열방에 증거하게 하시겠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드러냅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가 동화 같고, 현실성이 없다고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우화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 신앙적 교훈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같이 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발락의 환대를 받는 발람>
발람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발락은 모압 변경의 끝 아르논 가에 있는 성읍까지 가서 그를 영접하고, 소와 양을 잡아 극진하게 대접합니다(36~40절).
악한 자로부터 받는 극진한 대접은 올무에 걸릴 뿐입니다.
받은 대접(뇌물 포함)이 마음의 빚이 되어 결국 악한 일에 동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람의 예언>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으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 말하겠다"고 말합니다. 발락의 요구에 따라 세 번씩이나 장소를 옮겨 가면서 저주하도록 요구받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1) 발람의 첫 번째 예언(민22:41- 23:12)
발락은 발람을 바알의 산당으로 데리고 갑니다. 거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만 보입니다. 전체 진을 다 보면 그 많은 숫자에 부담을 가질 수 있으니 그 끝만 보여준 것입니다.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요구하자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민23:8)고 말합니다.
2) 발람의 두 번째 예언(민23:13-26)
화가 난 발락은 발람을 끌고 자리를 옮깁니다. 비스가 산꼭대기로 데려갑니다. 거기도 이스라엘 진의 끝부분만 보입니다. 발락은 그들을 보면서 저주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발람은 저주를 하지 못합니다.
23:19~20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20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발람은 이번에도 이스라엘을 축복합니다.
3) 발람의 세 번째 예언(민23:27-24:9)
포기하지 못하는 발락 왕은 발람을 데리고 어느 곳으로 가는데 브올산 꼭대기로 올라갑니다. 그곳에 간 이유가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영 전체를 볼 수 있는 높은 곳입니다. 그들을 보면서 저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발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24:5-7 “야곱이여 네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6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7 그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씨는 많은 물 가에 있으리로다 그의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
저주가 아니라 최고의 축복을 선언합니다. 강가의 동산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강가의 동산에는 가뭄이 없습니다. 번성을 보여줍니다. 그 동산에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과 백향목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침향목과 백향목은 당시 가장 크고 우람한 나무를 보여주고 있으니 민족의 번성과 성장을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물통에 물이 넘칠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아각(아말렉 족속의 왕의 칭호)보다 높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결국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하며 이스라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4) 발람의 마지막 예언(민24:10-25)
분노한 발락은 손뼉을 치며(새번역 -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며) 화를 내고는 발람에게 당장 돌아가라고 소리를 칩니다. 그런데 발람은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다면서, 마지막으로 놀라운 예언을 합니다.
민24: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참, 놀라운 예언입니다. 여기에서 ‘한 별’, ‘한 규’는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미리 예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계22:16은 예수를 가리켜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53:1은 예수를 가리켜 ‘연한 순’과 같다고 했습니다. 연한 순으로 시작되는 나뭇가지가 ‘한 규’입니다. 별과 규는 장차 야곱의 가문에서 태어나게 될 만왕의 왕, 메시아, 즉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메시아의 예언을 이방 점술가 발람의 입술을 통해 예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아의 오심이 세계적인, 전 인류를 구원하는 사건이 될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민24:25 “발람이 일어나 자기 곳으로 돌아가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갔더라.”
결국, 두 사람은 자기 곳으로 갔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발람은 잘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서로 싸우고 헤어진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전했지만, 발람은 복채의 유혹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대로 헤어진다면, 발락이 복채를 다 주겠습니까? 발람은 복채를 받을 꾀를 생각해 냅니다. 은밀하게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방법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을 범죄케 한 발람>
발람이 발락에게 알려준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바알브올’의 사건입니다(민25장).
민25:1-3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예, 바로 미인계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모압 족속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이스라엘 공동체에 침투시켜 유혹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 38년을 유랑하던 여인들의 얼굴만 보다가, 한곳에 정착하여 화장하고 꾸민 외모가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많은 이스라엘 남성들이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을 자신들의 신인 바알 신전으로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바알 신 우상숭배의 자리에 이스라엘 백성을 초청한 것입니다. 바알브올이란 곧 모압 족속이 섬기는 바알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초대를 받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그 이방 여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급기야 바알의 신상 앞에 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14절에 보니 대표적인 인물이 시므리입니다. 살루의 아들인데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였습니다. 지도자가 이 정도였으니 그렇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15절에는 죽임을 당한 미디안 여자를 기록하고 있으니 그 이름이 고스비요, 수르의 딸인데 수르는 미디안 백성의 한 조상의 가문의 수령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염병이 돌아 무려 24,000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의 배후에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다가 실패한 점술가 발람이 있습니다.
민31:16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계2:14(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말씀)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은 발락에게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발람은 외부로부터 저주할 수는 없었으나 내부로부터 부패시킬 수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역대로 교회가 외부로부터 고난이 올 때는 믿음으로 승리하였으나 내부로부터 부패하게 될 때는 항상 넘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고난을 위하여 많은 기도가 필요하지만, 내부로부터 영이 썩는 것은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그러면 이 일의 모사꾼인 점술가 발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실까요? 그럴 리 없지요. 31장에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 족속과 전쟁에서 대승을 거둘 때 발람은 이스라엘 군대의 칼에 맞아 죽습니다.
민31:8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칠 때 발람도 그 칼날에 죽고 말았습니다(민31:8).
<맺는 말씀 - 탐욕스러운 종교인 발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발락과 발람 이야기를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발람은 우리 시대의 사역자들과 성도들이 자칫 잘못하면 닮게 될 ‘타락한 신앙인’의 모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발람의 어그러진 길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미6:5, 유1:11).
혹시 ‘나에게도 발람의 모습이 있지 않은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하나님을 속이는 거짓 신앙인이 되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롬13:11-14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벧전1:14-15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발람의 길을 걷지 않고, 늘 깨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