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66) 2026. 6. 7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
사도행전15:36-41
<안디옥에 전해진 은혜의 복음>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게 하느냐’의 문제로 열렸던 예루살렘 공의회는 야고보가 제안했던 4가지 금지 조항(‘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멀리하라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이방 교회에 요구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단순히 사람들끼리 모여 내린 결정이 아니라 성령님과 더불어 내린 결정(“성령과 우리는…”) 임을 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편지에 기록하여, 유다와 실라를 통해, 안디옥교회를 비롯한 이방 교회에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과 바나바는 유다와 실라와 함께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편지를 읽은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은 큰 위로를 받고 기뻐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유다는 자기를 보냈던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실라는 안디옥교회에 계속 남기로 하였습니다.
<재방문 계획>
바울과 바나바는 한동안 안디옥교회에서 함께 목회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바울은 첫 번째 선교여행을 통해서 세워진 갈라디아 교회들이 잘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그래서 바나바에게 그곳을 다시 방문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36절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6절에서 주목할 말은 ‘형제들이 어떠한가?’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혹시 시험에 들지는 않았을까?”, “눈앞에 닥친 고난을 두려워하여 신앙생활을 포기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들에게 대한 바울의 애정이 잘 표현된 곳이 갈4:19입니다(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그들을 얻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했던 것입니다. 어린 자식을 두고 떠난 어머니의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걱정하기보다 직접 가서 확인하고 그들을 더욱 굳게 세워주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나바에게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바나바 역시 같은 마음이어서 동의를 합니다. 이렇게 두 번째 선교여행 계획을 세웠습니다.
<두 사도의 다툼>
그런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37~39절a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그것은 바나바가 첫 번째 선교여행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갔던 조카 마가(마가라 하는 요한)를 다시 데려가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 첫 번째 선교여행 당시 ‘마가’는 아직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바나바의 권유로 선교여행에 따라나설 때만 해도 기대가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따라가 보니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도 부실하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 환영받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일어나 대적하고 핍박합니다. 아마도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더 험난한 여정에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결정적인 사건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구브로의 바보에서 밤빌리아의 버가로 건너가는 뱃길에서 그만 배가 좌초한 것입니다. 간신히 살아났지만, 그 순간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입니다. “이 여행을 따라다니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공포를 느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밤빌리아의 버가에 도착했는데, 바울과 바나바는 1,200m가 넘는 산맥을 넘어,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가는 선교 계획을 세운 것을 들었을 때, 그는 그 여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마가 요한의 신실성은 크게 의심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시간이 지나, 마가는 자신이 중도에 포기한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에게 자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 역시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
그러나 마가를 다시 데려가자는 바나바의 제안을 바울은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성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목표지향적인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일 중심의 사람).
이런 사람은 목표를 정해놓고 강한 추진력을 발휘합니다. 그 과정에서 상처 입는 사람도 생깁니다.
대부분의 성공한 기업가들이 이런 유형의 사람입니다.
그의 성격은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는 열심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결심한 바에 대해 열심을 다하고, 후퇴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보기에 ‘마가’는 신뢰할 수 없는 유약한 젊은이였습니다. 이번에 데려가면, 또 다시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그를 배제하려 하였습니다.
전도 여행은 치열한 영적 전쟁입니다. 한 사람이 주저앉으면 다른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줍니다. 남은 사람은 맥이 빠집니다(바울이 그 감정을 경험).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배제하려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주장에 공감이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바울의 제2차 전도 여정은 고난 그 자체였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채찍에 무수히 맞고 지하 감옥에 착고가 채워서 갇히는 핍박을 당합니다. ‘과연 마가 요한이 같이 갔다면 끝까지 견디며 한밤중에 찬송까지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주장에 공감이 되기도 갑니다.
반면에 바나바는 ‘관계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사람 중심의 사람).
누가는 바나바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바나바는 별명입니다. 본래의 이름은 요셉입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하고 품어주었기에 사도들이 그를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위로는 사람을 살리려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사실 바울도 바나바의 이런 성품에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 (3년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사도들과 성도들은 그를 두려워하며 아무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를 사도들 앞에 데려가 보증을 선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또, 사울이 고향 다소에 내려가 있을 동안, 사울을 데려다가 안디옥교회에서 사역의 장을 열어준 사람도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의 이런 배려와 사랑이 없었다면 바울은 초대교회에서 인정받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더구나 지도자로). 나아가, ‘갈라디아 1차 선교여행’도 바나바의 적극적인 지지와 동행이 없었더라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의 주장에도 공감이 됩니다. 바나바는 어떻게 해서든 마가를 훈련시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시키려 하였습니다[더군다나 골 4장을 보면 ‘바나바의 생질’(조카)].
실제로 바나바의 바람대로, 훗날 마가는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마가는 최초의 복음서 ‘마가복음’을 기록한 저자가 되었습니다.
또, 바울이 로마 선교를 할 때 동역자가 되었습니다(골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또 바울이 마지막 때에 꼭 필요해서 부른 사람이 되었습니다(딤후4:11a “...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그렇습니다. 훗날 마가는 바울이 콕 집어 찾을 만큼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변화는 어떻게 일어난 것입니까? 예, 바나바가 그를 사랑으로 품어주었기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나바의 주장에도 공감이 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람의 주장이 전부 틀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성향의 문제인 것입니다. 바울은 선교 사역에 걸맞은 성품의 사람이고, 바나바는 목양에 걸맞은 성품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잘못했다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두 사람 모두 지나치게 자기 생각만 옳다고 고집했다는 것입니다.
<피차 갈라섰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39절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안타깝게도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다’라고 합니다.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고 다툼으로 갈라섰습니다. 그리고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고향인 구브로로 갑니다. 후에 알렉산드리아로 갔다가 구브로로 돌아와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성경의 기록은 없지만, 구브로 섬 항구도시 ‘살라미’에 바나바 기념 교회와 무덤이 있습니다.
바나바의 선교 흔적 - https://www.youtube.com/watch?v=DUN3h9Pq9VM
바울은 실라를 택해 갈라디아 교회를 방문합니다.
40~41절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그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육로를 통해 수리아를 거쳐서 갈라디아 지방으로 향합니다.
<배우는 교훈>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우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저는 이 다툼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게 하느냐’의 문제로 열렸던 예루살렘 공의회가 은혜중에 마친 후에 일어났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다와 실라를 택해 편지를 안디옥교회에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편지를 낭독하자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은 큰 위로를 받고 기뻐하였습니다. 이후, 안디옥교회는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실라가 안디옥교회에 남은 것만 보다도 안디옥교회가 얼마나 은혜로운 성장을 지속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안정과 지속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면,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지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게 되고, 자신의 주장인 인정받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안 되면 다툼도 서슴지 않음). 바울과 바나바도??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둘째,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위대한 지도자는 맞지만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진리의 문제도 아닌, 사람을 데려가냐 마냐의 문제로(방법의 차이) 두 사도가 다투고, 결국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모세도 실수했습니다(민20:2~13, 시106:32-33).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불평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10) 하면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쳤습니다. 모세의 실수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라고 한 말에 있습니다. 언제 모세가 물을 낸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내셨고 모세는 심부름만 했을 뿐입니다.
두 번째 실수는 하나님의 명령과 다르게 ‘반석을 두 번 친 것’입니다(홍해 때의 경험대로).
이적을 행하고 표적을 행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여정이 자신의 업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 살면서 자기가 능력의 사람인 줄로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책망을 받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의 실수는 곧 우리 모두의 인간적 연약함의 거울입니다.
모세의 형 아론은 어떻습니까?(출32:1~6) -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 위로 올라간 지 40일이 지났을 때, 산 아래의 백성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아론에게 몰려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이자 장차 대제사장의 직분을 행할 아론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출32: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아론은 백성들을 영적으로 바르게 이끌어야 할 제사장의 사명을 잊은 채,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는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절기라고 선포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론의 실수 역시 우리 모두의 인간적 연약함의 거울입니다.
미리암 – 민12:1~2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모세의 지도력에 도전 – 문둥병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다윗도 (말로 설명하기조차 부끄러운)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고 할지라도 인간적인 실수와 약점이 있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런 인간적인 약점과 실수를 감추려고 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다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포함하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롬3:9~12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7:22~25(바울의 자기 고백)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의 대상’입니다.
현재,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조금씩 자라가는 중입니다.
셋째, 주님의 일을 할 때, 언제나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본질적인 문제(진리의 문제)를 가지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데리고 가느냐 하는 방법의 문제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싸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함께 사는 부부도 생각이 얼마나 다릅니까? 관점과 해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갈등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화평을 도모한다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방법)만 고집하면 다툼과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교회사는 교단 분열사라고 할 만큼 한국 교회는 많이 분열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교회가 분열되었습니까? 겉으로는 진리 수호의 차원으로 포장하지만, 실제는 교회 지도자들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기 생각만 옳다고 고집한 데 가장 큰 원인이 있습니다. 교단이 많아져 부흥했다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부끄러운 모습일 뿐입니다.
내 생각이 옳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역지사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즉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리의 문제가 아닌 한,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고려해 주어야 합니다.
성가대가 찬양을 부르면서 다양한 음성으로 찬양을 부르지만, 조화를 이룰 때 듣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서로 다르므로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화와 협력 가운데 우리 교회를 더욱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로 세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을 교회의 다툼과 분열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은 안 맞으면 헤어지는 것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교회도 많고, 교파도 많고, 여러 가지 선교단체도 있으니 맞는 곳으로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시원한 답변같이 들립니다. 어느 정도 현실적인 조언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장담하나 할까요? 그런 교회나 단체는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나 다 부딪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교회가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가는 순간 그 완벽함은 무너질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의 다툼과 분열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 본문을 인용합니다. 교회가 싸우고 헤어진 후에, 오늘 본문을 예로 들면서 위대한 ‘사도들’도 싸워 헤어졌는데, 우리 정도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코 바람직한 적용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의 분열을 합리화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닙니다. 선교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을 담담하게 소개할 뿐 그것이 옳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교회들이 갈등 끝에 헤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합리화하기보다는 ‘용서하지 못하고,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을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맺는 말씀 – 다르지만 조화를 이루어가는 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빌2: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상대방의 입장(약자의 입장)을 먼저 고려해 주어야 합니다.
바울이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고전8: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3절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이처럼 우리 가운데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