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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진행)

사도행전 강해(67) - 믿음의 동역자를 세우라

작성자박춘경|작성시간26.06.15|조회수45 목록 댓글 0

사도행전 강해(67) 2026. 6. 14

믿음의 동역자를 세우라

사도행전16:1-5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

 

첫 번째 선교여행을 통해서 세워진 갈라디아 교회들이(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잘 있는지 궁금하던 바울은 급기야 다시 방문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에게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바나바 역시 같은 마음이어서 동의를 합니다. 이렇게 두 번째 선교여행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나바가 첫 번째 선교여행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갔던 조카 마가(마가라 하는 요한)를 다시 데려가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나바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성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목표지향적인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목표를 정해놓고 강한 추진력을 발휘합니다. 그런 그가 보기에 ‘마가’는 신뢰할 수 없는 유약한 젊은이였습니다. 이번에 데려가면, 또다시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그를 배제하려 하였습니다.

 

반면에 바나바는 관계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어떻게 해서든 마가를 훈련시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시키려 하였습니다[더군다나 골 4장을 보면 바나바의 생질’(조카)].

바울은 선교 사역에 걸맞은 성품의 사람이고, 바나바는 목양에 걸맞은 성품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이 두 사람이 조화를 이루면서, 안디옥교회를 잘 이끌어 왔는데, 마가를 데려가는 문제로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두 사람 모두 지나치게 자기 생각만 옳다고 고집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고 다툼으로 갈라섰습니다. 그리고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고향인 구브로(키프로스)로 갑니다.

이후 바나바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없지만, 후에 알렉산드리아로 갔다가 구브로로 돌아와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날 구브로 섬 항구도시 살라미에 바나바 기념 교회와 무덤이 있습니다.

바나바의 선교 흔적 - https://www.youtube.com/watch?v=DUN3h9Pq9VM

 

바울은 실라를 택해 (육로를 통해)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거쳐서 갈라디아로 갔습니다.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마침내 바울은 실라와 함께 더베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1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더베’는 첫 번째 선교여행 중 제일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곳입니다. 그곳을 거쳐 ‘루스드라’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루스드라(14) -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태장을 맞고 강제 추방을 당한 후, 이고니온에 도착한 바울은 또다시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믿고 따랐지만, 이번에도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의 박해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태장이 아니라 아예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을 떠나 남서쪽으로 40km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 루스드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약 4~5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믿음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합세하여 이곳 루스드라까지 바울을 죽이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참 집요하지요?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받았던 위기의식이 얼마나 컸는지를 반증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자신들이 섬기는 유대교에 치명적인 해를 입힌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동안 (유대교 안에서) 자신들이 누렸던 기득권이 다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다른 동네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까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추격대를 꾸려 이곳 루스드라까지 쫓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성밖에 끌어내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절했을 뿐, 죽지 않았습니다. 기적처럼 살아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울은 자신이 돌에 맞아 죽을뻔한 곳으로 다시 간 것입니다. 그때 바울에게 돌을 던졌던 루스드라 사람들이 모두 다른 데로 이사를 갔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루스드라에 살고 있습니다. 그 말은, 그가 이들의 눈에 띄면 다시 죽음의 돌팔매질을 당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다시 거기에 가면 안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또 그곳으로 갔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또 돌에 맞아서 죽어도 좋다라는 뜻입니다.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1) 거기에 해산의 수고를 통해 낳은 믿음의 형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바울에게는 분명한 소명(calling)이 있습니다.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 ‘소명’이 ‘삶의 목적’이 되고, ‘가치관’이 됩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소명이 있었습니다.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고전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바울에게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소명’이 있었습니다. 이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한마디로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을 부르신 주님께서는 바울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우리도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공통의 소명이 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가운데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소명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은 소명입니다. 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지고,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드러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를 만남>

 

그렇다면, 루스드라에 도착한 바울은 거기서 귀한 만남을 가집니다.

1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바로 ‘디모데’를 만난 것입니다. 디모데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습니다.

첫째로, 디모데는 제자로 불리었습니다.

당시 디모데의 나이를 학자들은 대략 18세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겨우 고등학교 졸업반 정도나 대학교 1학년에 해당하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린 디모데를 본문은 ‘제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란 말입니다. 이것은 그의 신앙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 디모데는 언제 예수님을 영접했을까요?

아마도 바울이 루스드라를 처음 방문했을 때, 디모데가 회심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루스드라에서 있었던 일(14:8-18) - 루스드라는 작은 도시이고, 유대인이 많지 않아 회당이 없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의 거리에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주목하였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반복하여 전한 복음은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죄 사함을 얻고, 그를 힘입어 의롭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누구든지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평생 열외(예외)의 삶을 살았던 이 사람은 자신같은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에 온 마음을 다해 바울에게 집중하며 그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바울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다가가 네 발로 일어서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람이 곧 일어난 것입니다.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된 장면을 두 눈으로 확인한 루스드라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이상한 소문이 돌리 시작했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은 헤르메스’(제우스의 전령, 대변자)라고 신격화시켰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성 밖 제우스 신당에 있던 제사장이 제우스와 헤르메스라고 생각되는 바나바와 바울에게 제사를 하기 위해서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두 사도는 깜짝 놀라 그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무리 가운데로 들어가면서 옷을 찢고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때,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청년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디모데’였습니다(그리고 그의 어머니).
이때 디모데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말로 디모데라는 제자가 있으니에서 있으니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문법에서 미완료형이라는 것은 계속 반복되는 행동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디모데가 예수님의 제자로 산 것은 한 번, 두 번 그렇게 하고 끝낸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후부터 계속 예수님의 제자로 살며 성장해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둘째로,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디모데를 설명하면서 아버지보다 먼저 어머니가 믿는 유대 여자라고 강조하는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대개 아버지를 먼저 말하고 그 다음이 어머니인데, 여기서 어머니를 먼저 내세웠다는 것은 그의 신앙에 어머니의 영향력이 컸다는 의미도 되지만,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디모데는 어머니의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은 틀림 없습니다.

딤후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이 믿음은 유대교 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의 성품과 믿음을 닮았을 것으로 인정 받았던 것입니다.

 

셋째로,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였습니다.

2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디모데는 다른 사람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잘 맺고 있는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루스드라와 더베, 이고니온 등이 서로 인접해 있어서 정기적인 교류가 가능했습니다.

 

소명에는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1) 내적 소명입니다. 개인적인 뜨거움과 내적 충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2) 외적 소명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합니다(신학교 반드시 담임목사의 추천서가 필요). 디도서에 보면 형제에게 책망받을 것이 없는 사람, 곧 칭찬 받는 자를 장로나 감독으로 세우라고 하였습니다(1:6~7).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 평판도 중요합니다.

한편, 2절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지금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신앙 공동체가 어찌되었는지 궁금해서 방문한 것입니다. 성경에 그곳에 있는 교회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는 감사하게도 바울이 세운 신앙 공동체(교회)는 잘 유지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칭찬을 받을만한 신앙공동체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비시디아 안디옥 교회는 아직 확인할 수 없지만.).

<믿음의 동역자 디모데>

 

바울은 디모데를 아주 귀히 여겼습니다.

3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바울은 디모데를 그의 복음 사역에 있어 동역자이자 조력자(助力者)로 삼고 싶어 하였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마가가 담당했던 역할을 이제 디모데에게 담당시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디모데를 신앙의 계보를 잇는 후계자로 삼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냥 따라다니는 단순한 수행원이 아니라, 바울의 소명을 장차 계승해 나갈 후계자로 키우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디모데를 ‘영적인 아들’로 생각했고,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기쁨도 고통도 함께하며, 평생을 함께합니다. 심지어는 전설에 따르면 그의 무덤도 사도 바울의 무덤 밑에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바울과 같이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디모데를 보내어 수습하였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디모데를 신뢰하였습니다. 훗날 바울의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 보면, 그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딤전6:11)라고 부릅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디모데의 리더십을 확실하게 세워준 것입니다. 훗날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감독으로 섬기다가 순교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목회의 본질은 믿음의 사람’, 곧 동역자를 세우는 것입니다(직분). 나아가 후계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독불장군처럼 혼자 감당할 수 없습니다. 동역자를 세워 함께 나누어 일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디모데와 같은 믿음의 동역자, 믿음의 계승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소망합니다.

 

<디모데의 할례>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의 동역자로 세우면서 특별한 행동을 합니다.

3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놀랍게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역의 사람들은 디모데의 아버지가 헬라인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을 다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할례를 하지 않아도 구원받는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을 위해 ‘유대주의자’들과 싸웠습니다.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였고, 그 결과 사도들로부터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의를 받아내었습니다. 그는 각 교회에서 그 결의대로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할례가 구원과는 관련이 없다고 굳게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디도에게는 할례 주는 것을 거부 - 2:3).

 

그런데 왜 왜 갑자기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풀었을까요? 예, 기존 교회에 목회자로 파송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로 파송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도 선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교와 목회는 다릅니다. 선교는 초신자를 얻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들의 마음의 문을 먼저 열어야 합니다.

반면, 목회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을 양육하는 과정입니다. 믿음을 강화하는 과정과 더불어 성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

 

바울은 지금 디모데를 선교사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은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자녀를 유대인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헬라인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으로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이중 국적자 비슷). 그런데 유대인은 할례받지 않은 디모데로부터 복음 듣는 것을 꺼렸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에게든 헬라인에게든 복음을 전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려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푼 것입니다(바울의 유연한 선교 전략).

 

이러한 유연한 선교 전략은 바울의 고백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고전9:19-22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그렇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지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유연하게 처신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교훈입니다. 현대 선교에서도, 이 원리는 중요합니다.

진리는 불변하지만, 접근하는 방식은 유연해야 합니다. 함부로 율법적인 자를 들이대면 안 됩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경우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신세대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어야 합니다(세대별 예배).

 

<굳게 서가는 교회>

 

이렇게 해서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가 함께 선교에 나서게 됩니다.

4~5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이제 그들은 계속 서쪽을 향해 나아갑니다. 여기서 여러 성이란 것은 거쳐온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의 서쪽에 위치한 소아시아의 도시들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성을 다니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지키도록 가르쳤습니다. 이 규례들은 바로 15장에서 예루살렘 공의회가 결정한 내용을 의미합니다(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메어 죽이는 것, 피를 금함).

그 결과로 첫째,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졌습니다. 둘째로는, 수가 날마다 늘어났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자신의 ‘소명’을 위해, 교회와 성도들 굳게 세우기 위해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의 헌신 속에 디모데라는 훌륭한 동역자(후계자)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이 주신 소명으로 세워진 믿음의 동역자입니다. 나아가 믿음의 계승자입니다.

 

우리 사도교회의 소명은 분명합니다. 더 많은 동역자를 세우고, 더 많은 믿음의 계승자를 세워가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을 통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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