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강해(15) 2026. 6. 17
한 사람의 헌신으로
왕하4:42~44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길갈의 선지 학교에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살아계심을 나타내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사환에서 큰 솥을 걸고 끓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마침 그때 제자 중 한 사람이 들에 나가 들포도 덩굴의 열매(들호박)을 한가득 가져왔습니다. 그것이 정확히 무슨 열매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솥에 넣고 끓인 후, 나누어 먹었는데, 그만 탈(복통과 신경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엘리사에게 “솥에 죽음의 독이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엘리사는 ‘가루를 가져오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루를 국에 넣자 독이 사라져 모두가 먹을 수 있는 국이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두 가지 분명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1) 구약에서 흉년은 보통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신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통하여 여전히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는 분이심이 증명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솥의 독을 해독시키는 재료로 ‘가루’를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국에 들어간 밀가루와 똑같은 가루를 사용하셔서 독을 제거하셨습니다. 같은 재료라도, 같은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시느냐에 따라 그 쓰임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 시대의 죄와 죽음의 독성을 해독시키는 역할을 맡기셨습니다(빛과 소금이 되어 이 시대를 치료하라는 명령).
<한 사람의 헌신으로>
오늘 본문도 앞의 내용과 비슷하게 음식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짧지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흉년으로 모두가 어려운 중에도 어떤 한 사람이 ‘보리 떡 20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를 가지고 선지 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42절a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여기서 제 주목을 끄는 단어는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당신의 역사를 일으킬 ‘한 사람’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의 헌신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해 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단체로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 것보다, 한 사람의 헌신으로 기적이 일어나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모든 믿는 이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울 때의 일입니다. 거인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와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였지만, 모두 겁에 질려 아무도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때 단 한 사람이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바로 소년 다윗입니다. 그는 골리앗 앞에 서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며 물매를 던져 그를 쓰러뜨렸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사6장).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이사야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포로기가 끝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지만, 예루살렘 성벽은 재건되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상황을 보고 들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한 사람이 금식하며 기도했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바사 제국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1세)의 왕비가 되었던 에스더를 기억하십니까? 그녀는 하만의 음모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될 위기에 처했을 때,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스더 4:14)는 모르드개의 말을 듣고, 3일간의 금식 기도 후,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고백하며 왕 앞에 나갔습니다.
그녀의 결단으로 상황은 역전되어 음모를 세웠던 하만이 장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부림절).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바울)을 불러 ‘이방인의 선교’를 맡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한 사람’을 불러 그때의 상황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세상은 능력 있는 사람을 찾지만, 하나님은 헌신 된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첫 열매를 드리다>
이 ‘한 사람’이 가져온 것은 무엇입니까?
42절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보리 떡 이십 개를 가져왔는데, 이 떡이 ‘처음 만든 떡’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 열매로 만든 떡’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루에 담은 채소는 ‘처음 익은 식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첫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모든 식물의 첫 소산을 여호와께 바치는 것이 율법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 23:9-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출 34:26, 신 26:3-10, 민15:20~21)
잠 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본래 여호와께 바쳐진 이 첫 열매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의 몫이었습니다(민 18:13, 신 18:4).
그런데 당시 북이스라엘에는 합법적인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왕상 12:13 – 여로보암 때 금송아지를 섬기는 우상 국가로 전락, 경건한 제사장과 레위인은 남유다로 이주). 그래서 제사장 대신 하나님의 종 엘리사에게 드린 것입니다.
종교적 암흑기에도 하나님이 숨겨 두신 공급자가 있습니다.
선지자 학교에 식량을 가져온 사람은 ‘바알 살리사’(셋째 우상)라는 곳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바알 살리사’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름만 들어도 이곳은 바알 우상을 섬기는 도시입니다.
서울 은평구에 ‘불광동’이 있습니다. 관내의 사찰인 불광사에서 유래. 지명에 ‘부처’(佛)'가 들어가 있어, '불광'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개신교 교회는 하나도 없다. 다만 가톨릭의 경우 '천주교 불광동 성당'이 있긴 합니다.
또, 은평구에 신사동(新寺洞)이 있습니다. 새절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6호선 새절역).
바알 우상을 섬기는 도시에도 하나님이 숨겨 두신 믿음의 사람은 남아 있었습니다.
전에 엘리야가 이세벨의 박해 시기에, ‘자신만 남았다’고 탄식했을 때, 하나님은 네게 알지 못하는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7천 명을 남겨두셨다’고 했는데, 그 7천 명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곳에서 누군가가 식량을 들고 올 줄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숨겨 두시고 필요한 때에 적절하고 요긴하게 사용하십니다.
교회사는 이 같은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자비의 심부름꾼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들도 일상사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심부름꾼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대체로 유명하지도 않고 그다지 부유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일에 더 진지하게 충성합니다.
<첫 열매를 드리는 목적>
여기서 잠깐,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첫 열매를 드리라고 명령하셨을까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1.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첫 열매는 가장 먼저 얻은 수확입니다.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린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첫 열매를 드림으로써 백성들은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결과임을 인정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율법에 얽매이지는 않지만, 헌금이나 헌물을 드릴 때의 마음만큼은 배워야 합니다.
내가 얻은 열매의 진정한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힘들게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을 때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첫 월급을 '첫 열매' 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소중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2. 하나님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라는 뜻입니다.
첫 열매는 남은 것 중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맨 마지막 자리가 아니라 가장 첫 번째 자리를 원하십니다.
잠언 3:9 “너는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물질뿐 아니라 시간, 재능, 삶 전체에서 하나님을 우선으로 모시겠다는 결단입니다.
우스개 하나.. 한 농부가 목사님에게 자신의 소가 뜻밖에 쌍둥이 송아지를 낳았다면서 나중에 잘 키운 뒤에 팔아서 한 마리 값은 교회에 헌금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주 후에 이렇게 알려 왔습니다. "목사님, 안타깝게도 송아지 중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아쉽게도 주님께 드리려고 했던 송아지가 죽었습니다." 왜 하필 죽은 송아지가 드리려던 송아지였을까요...
3. 믿음의 훈련을 위해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첫 열매를 드릴 때는 아직 나머지 수확이 얼마나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첫 열매를 드리는 행위는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 앞으로의 수확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만나를 매일 거두게 하신 것과 같은 신뢰의 훈련입니다.
4.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명령하셨습니다.
첫 열매는 감사의 예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첫 열매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신 은혜를 기억했습니다(신명기 26장).
감사는 받은 후에 하는 반응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5. 그리고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기 위한 상징(그림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첫 열매"라고 부릅니다.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구약의 첫 열매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된 첫 열매를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흉년의 때>
이 떡을 드린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흉년의 때에 드렸습니다. 물질이 부족할 때에는 인심이 박하기 마련입니다. 있어도 없다고 하고 주어도 극히 인색합니다.
그런데 바알 살리사에서 온 사람은 ‘보리 떡 이십 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흉년 때에 한 평범한 개인이 준비한 양식이기에 매우 후한 선물이었습니다.
우리 옛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나눔은 그 이상의 수준이어야 합니다. 나도 부족하지만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가 궁핍과 시련 가운데서 후한 헌금을 한 것을 칭찬하였습니다.
고후8:2~3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바울이 언급한 마게도냐의 교회는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그리고 베뢰아의 교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특히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풍성한 연보’를 했습니다.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교회들을 좋은 본보기로 삼아 고린도 교인들과 아가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선한 일에 참여하도록 권고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들이 연보한 환경과 조건은 열악하였습니다.
그들은 환난 중에서 넘치는 기쁨으로 연보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마게도냐의 교인들이 당한 환난은 그들이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행 16:20, 17:5, 13).
또한, 마게도냐 교인들은 피식민지 백성으로 받는 시련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시련 가운데서도 마게도냐의 교인들은 넘치는 기쁨 속에 살았다고 바울은 전해줍니다.
마치 그들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바울의 모습(6:10)과도 같았습니다.
또, ‘극심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를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보리 떡과 채소 이적>
엘리사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43~44절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
바알 살리사의 농부가 준비한 양식은 선지자 학교의 공동체를 먹이기에는 많이 부족하였습니다. 대략 ‘이십 명’ 정도 먹을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학생의 수는 100명이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라고 명했습니다. 사환은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엘리사는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사환이 순종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백 명이 먹고 남았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기적 아닙니까? 예,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과 비슷합니다(요 6:5-13).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동쪽(벳세다)에서 많은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먹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빌립은 조금씩 받더라도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떡이 있어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때 안드레가 한 소년이 드린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안드레 역시 희망을 가지고 그것을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요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그러나 예수님은 작은 헌신의 가치를 헛되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하신 후,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남자만 오 천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아서 열두 바구니에 가득 채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나의 작은 것이 하나님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싶어 움츠러듭니다. 부자거나 큰 은사가 있어야 주의 일을 도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두 렙돈의 헌금을 했던 예루살렘의 과부는 자기가 드리는 것이 하나님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의 작은 헌신을 사용하여 참된 헌금에 대한 교훈으로 삼으셨습니다(눅 21:1-4).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핵심은 기적이 아닙니다.
그 기적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만든 희생입니다. 헌신입니다.
기적은 어떤 사람이 드린 ‘보리 떡 이십 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를 드린 후에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린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드린 다음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증식시켜 주십니다.
바라기는 우리도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온 사람’처럼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믿음, 곧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흉년에도, 나도 어렵고 힘들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는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작은 헌신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크게 쓰여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