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시는 나희덕의 [푸른 밤]이다. 무수한 길을 걸었지만, 그 길은 너를 향한 에움길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시이다. 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시이지만, 연애시라고 한정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너'가 꼭 연인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나'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만약 너가 나라면, 이 시는 나를 향해 떠나는 자아성찰, 곧 성숙을 위한 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 나희덕, 「푸른 밤」
나희덕의 「푸른 밤」은 쉽게 해석되는 시가 아니다. ‘푸른 밤’이라는 제목부터가 상징적인데, 밤은 어둠(검은 밤)을 속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밤을 왜 ‘푸른’ 밤으로 표현했을까? 시의 내용은 의외로 단순하다. ‘너’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라는 말에 어리둥절할 필요는 없다. ‘절대’라는 말은 그것 이외의 다른 것은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절대적인 사랑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된다. 하지만 네게로 가는 이런 절대적 사랑의 길은 “수만 갈래의 길”로 펼쳐져 있다. 네게로 향한 그 많은 길 앞에서 화자는 사랑의 정열을 불태우기도 하고, 치욕의 감정을 되씹기도 한다. 이것이 이 시에 나오는 화자가 처한 상황이다. ‘너를 향한 미친 듯한 사랑’이라고 간단하게 표현해도 좋다.
화자는 너를 향해 가는 길이 수만 갈래의 길이고, 그런 만큼 힘겨운 길이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가는 단 하나의 에움길”을 걸어갔다. ‘에움길’이라는 말이 어렵지만, ‘지름길’과 대조되는 시어라는 걸 문맥을 통해 추리할 수 있다. 지름길이 빨리 가는 직선의 길이라면, 에움길은 굽어 있는 곡선의 길이다. 그러므로 에움길로 가면 네게로 가는 길은 그만큼 멀고 고통스러운 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의 전 생애를 그 길을 가는 데 바쳤다고 고백한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든, 혹은 그보다는 원대한 존재에 대한 사랑이든 시인은 ‘너’에 대한 절대적 사랑의 의지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푸른 밤’은 이렇게 본다면, 너를 향해 걸어갔던 그 수많은 시간을 의미한다. 이 시의 1연에 나오듯 네게로 가지 않으려고 해도 화자의 발길은 결국 너에게 이른다. 네게로 가는 길을 걸으며 화자는 숱한 번민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 길이 고통의 길이라는 걸 화자 또한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너를 향해 드리웠던 두레박이 텅 빈 상태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걸 보면서도, 화자는 계속해서 그 길을 걸어간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길이라면 그냥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 ‘푸른 밤’은 바로 네게로 가는 이 먼 고통의 길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시인이 자신의 고통스런 내면을 ‘푸른 밤’이라는 감각적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걸 우리는 이 지점에서 자연스레 알 수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