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를 금지하는 법?
최광희 목사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갈라디아서에서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한 이 표현은 우리에게 굉장히 유명하고 익숙합니다. 어떤 분이 이 구절들로 노래까지 만들어 놓아서 은혜롭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익숙한 구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왜 금지한다는 표현이 나왔는지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금지할 필요도 없고 그런 법도 없는 것은 당연한데 굳이 왜 이런 말을 덧붙였을까 하고요. 그런데 이제 좀 감이 잡힙니다.
바울은 지금 율법을 지켜 할례를 행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버리고 율법의 의무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중입니다(5절). 그것은 성령을 버리고 육체로 가는 것이니까요. 육체의 일은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같은 것인데(20~21절) 그런 것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즉 천국가지 못합니다. 반면에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22-23절).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κατὰ τῶν τοιούτων οὐκ ἔστιν νόμος’ 입니다. 바로 이 부분을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로 번역해 놓아서 왜 여기서 금지한다는 말이 나오는지 제가 고민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헬라어 본문과 다른 번역을 좀 참고해 봤습니다. NIV는 이 부분을 ‘Against such things there is no law’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의 직역은 이런 것들(9가지 열매)과 반대되는 율법은 없다는 뜻이고 약간 의역하면 여기 9가지 중에는 율법과 반대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저의 이런 이해에 도움을 준 것은 [현대어성경]인데 ‘여기에는 율법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법’은 어떤 국가의 실정법(實定法)이나 한 사회의 도덕법 혹은 개인의 양심의 법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히브리어: תּוֹרָה 토라)를 지키지 말 것을 설명하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헬라어로 νόμος라는 말은 ‘법’보다는 ‘율법’으로 번역해야 맞습니다. 결국 바울이 말하는 취지는 율법을 지키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살면 율법과 반대되기는커녕 율법의 법정신을 다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위에 14절에서 이미 그런 말을 했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그래서 "너희는 성령을 따라서 행하라"라고 했습니다(16절).
이제 바울이 왜 그토록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는지 이유가 명백해졌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17절).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인간적 결심이나 어떤 의무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성령을 모시고 사는 성도의 삶이고 바로 그런 성도가 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율법을 지켜 할례를 행하면 왜 안 될까요? 둘 다 하면 더 안전하고 더 확실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운전도 못하는 사람이 운전대를 잡고 좌충우돌 사고를 내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운전석 내 놓으라고 했더니 운전은 성령님이 하시되 저는 운전대만 잡고 있으면 안 되겠느냐고 떼를 쓰는 격입니다. 그러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성령님의 운전 실력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고 마지막에 자기의 도움으로 성령님이 운전을 한 것이라고 우기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오로지 성령을 의지하고 순종하여 살아야 하며 그럴 때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나타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