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최광희 목사
가난한 사람이란 재산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이 돈이 없으면 힘도 없고 권리도 없고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조차 무시당하게 된다. 요즘은 부유하다 혹은 가난하다는 표현을 쓰지만 내가 어릴 때는 잘 산다 혹은 못 산다는 말을 사용했다. 온 나라가 가난할 때에 가난한 사람은 말 그대로 못 살았다. 뭐라도 일을 할 수 있으면 무조건 고마워했던 그 시절에 중학생, 고등학생 중에 방학 때가 되면 신발 공장에 가서 알바로 취직해서 돈을 버는 학생도 많았다.
우리가 어릴 때 한 교실에 60~70명씩 학생을 집어넣은 콩나물 교실에서는 누구든지 떠들거나 선생님 말을 안 들으면 막대기로 머리를 때렸지만 학생이나 부모나 감히 항의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 시대에는 몇 명이 떠들면 선생님은 으레 단체기합을 주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한번은 반 전체가 의자를 들고 눈을 감는 벌을 받은 기억도 있다. 그 기억이 생생한 이유는 어떤 순진한 친구 하나가 선생님에게 친구가 눈 떴다고 고해 바쳤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눈을 꼭 감고 이렇게 말했다. “그 친구 눈 뜬 것은 니는 우째 알았노?” 그랬더니 선생님도 이렇게 맞장구쳤다. “맞다. 니는 우째 알았노?” 하여간 그 때에는 급우 몇 명이 수업시간에 떠들었다고 아무 잘못 없는 학생들이 체벌을 받고도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 별명이 ‘개패’였는데 말 안 듣는 학생을 개 패듯이 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 수학 선생님이 나에게는 ‘개패’가 아니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었고 굶지 않고 밥이나 먹으면 다행으로 여기던 그 시대에는 동냥을 얻으러 다니는 사람도 많았지만 쌀은커녕 보리쌀도 한줌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나라가 변해서 지금은 가난한 사람도 줄어들었고 가난한 사람이 깡통 들고 동냥하지 않아도 밥은 먹을 수 있다. 국가에서도 복지가 많이 좋아졌고 여러 기독교 기관들과 봉사단체들이 깡통 대신에 깨끗한 식판에 밥을 담아서 무료급식도 자주 해 주고 있다.
나라가 좋아지고 여유가 있게 되면서 인권이라는 말이 유행하더니 어느새 권력이 되기 시작했다.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곳은 헌법기관도 아니면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Political Correctness의 분위기를 등에 업고 오늘날은 온갖 것에다 인권에 갖다 붙인다. 어떤 그룹이든지 소수 혹은 약자라는 이름만 붙이면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고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약자는 힘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당해서는 안 되며 그 동안 인권을 유린당한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 가졌다고, 힘이 있다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갑질을 하던 사람들은 더 이상 그 부끄러운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나치게 인권이 무시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인권에 눈을 떴기 때문인지 이 시대에는 아무 거나 다 인권이라고 소리를 질러댄다. 더럽고 악한 항문성교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인권이라고 주장하는가하면 심지어 소위 차별금지법이라는 역차별법을 만들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노동자가 기업주에게 착취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동조합 중에는 점점 세력을 키워 오늘날은 고액연봉을 받는 귀족노조가 되었고 장기 파업을 강행해서 기업을 고사시키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약자를 무시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약자라고 해서 무조건 편을 들어주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은 3500년 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3500년 전에 하나님은 400년 간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수준 높은 법규를 주셨다. 그 속에는 노예로 살면서 상상도 해 보지 못한 고상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었는데 가난한 사람 즉 약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매우 균형 잡힌 규정이 있다.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출 23:3)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출 23:6)
앞뒤로 나란히 기록된 이 말씀 속에는 가난한 사람이 힘이 없다고 해서 불리하게 해서도 안 되지만 약자라고 해서 무조건 두둔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가난한 사람을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라는 말이 먼저 나오고 그 후에 가난한 사람의 재판을 불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이다. 혹시 그 시대 사람들도 가난한 사람을 두둔하는 마음이 커서 그것이 사회 문제가 문제가 되었단 말일까? 하여간 하나님께서는 약자의 인권도 반드시 존중하되 가난은 곧 착함과 정의이며 부자는 바로 갑질과 악함이라는 식으로 기울어진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가진 자가 자발적으로 나누고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지 약자들이 총 궐기하여 부자의 소유를 빼앗아 골고루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가난한 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바울이 빌레몬에게 말한 것처럼 친형제처럼 대해야 한다. 성경에 근거한 이 가치관은 신앙공동체에서 출발하여 각 개인의 생활방식이 되고 그 사회의 자발적인 규율이 되어야 한다. 가난한 자와 약자는 두둔하지도 말고 억울하게 손해를 끼치지도 말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