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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희 칼럼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첫 순교자, 패트릭 해밀턴

작성자최광희|작성시간25.08.18|조회수48 목록 댓글 0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첫 순교자, 패트릭 해밀턴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어도 절망하지 말라-

최광희 박사

 
 

우리는 종종 선한 일에 헌신하고 당장 성과가 보이지 않을 때 실망하고 좌절하곤 한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신실히 역사를 진행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 1504?1528)은 오늘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를 준다. 그는 젊은 나이에 불의에 맞서 개혁 신앙을 고백하고 목숨을 바친 첫 순교자였다. (1406년에 에든버러에서 화형당한 제임스 레스비는 루터파 종교개혁 이전 위클리프의 성경에 영향을 받은 롤라드(Lollards)이며 종교개혁 이전의 순교자이다. 그러므로 루터파 종교개혁 사상으로는 해밀턴이 최초의 순교자라고 할 수 있다.)
패트릭 해밀턴은 너무나 젊은 나이에 피어보지도 못하고 꺾여버린 꽃봉오리와 같은 인물이다. 그의 삶은 불꽃처럼 짧고 강렬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 당대에는 이렇다 할 열매가 없어 보였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는 사울의 회심이라는 극적인 열매로 이어졌지만, 해밀턴의 순교는 그렇지 못했다. 가족과 친구들의 눈에 해밀턴은 너무 성급하게 나서다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으로 보였을 수 있다.

 

패트릭 해밀턴은 누구인가? 1504년경 스코틀랜드의 유력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파리와 루벤, 비텐베르크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루터와 멜란히톤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 해밀턴은 세인트레오나드 칼리지(St Leonard’s College)에서 교수(Fellow)로 활동하며 학생들에게 신앙과 진리를 가르쳤다. 눈앞에는 출세가 보장된 길이 있었지만, 그는 안락한 길 대신 개혁 신앙을 전하는 좁은 길을 택했다.
해밀턴은 특히 Patrick's Places라는 저술을 통해 중세 가톨릭 교리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구원이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으로 주어진다고 선언했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며, 율법은 죄를 드러내지만 복음은 생명과 은혜를 준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교황권을 유지하던 스코틀랜드 가톨릭 교회에게 용납될 수 없는 도전이었다. 그의 사상은 젊은 학생들과 귀족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권력은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1528, 해밀턴은 고작 스물넷의 나이에 이단자로 몰려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당시 교회는 이단의 사상을 뿌리 뽑는다는 의미로 불로 태우는 형벌을 집행했다. 젊은 해밀턴은 그 불길 속에서 단호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생애를 마쳤다.

 

그의 죽음은 너무도 잔인했고, 당장에는 헛된 희생처럼 보였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의 죽음은 참담한 충격이었다. 일부 동료는 해밀턴의 선택이 너무 성급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순간을 종교개혁의 씨앗으로 사용하셨다. 해밀턴의 순교는 후대 개혁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불씨가 되었다.
알렉산더 알레시우스(Alexander Alesius)와 같은 학자들은 그의 신앙과 죽음을 목격하고 개혁 신앙으로 돌아섰으며, 존 녹스 등은 해밀턴의 희생을 바탕으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수십 년 뒤, 그의 피는 땅속에서 싹을 틔워 스코틀랜드 전역에 복음의 불길을 일으켰다. 해밀턴의 순교가 없었다면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지금과 같은 강력한 기반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계 최대의 장로교회를 이루고 있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그리고 그 첫 순교자인 패트릭 해밀턴에게 큰 빚을 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해밀턴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한국교회 역시 그 열매 중 하나이다. 우리는 그의 용기와 신앙, 그리고 헌신을 기억하며 감사를 드리게 된다.

 

해밀턴의 삶과 순교를 묵상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교훈은 분명하다. 선한 일을 하면서 당장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때로는 스데반처럼 즉시 열매가 맺히기도 하고, 때로는 해밀턴처럼 오랫동안 숨겨져 있다가 후대에 열매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모든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 우리의 작은 수고와 눈물 어린 헌신도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풍성한 열매로 돌아올 것이다.
패트릭 해밀턴은 젊은 나이에 꺾인 꽃 같았지만, 그의 향기는 지금도 한국교회와 전 세계 교회 안에 살아 있다. 그의 삶과 죽음은 우리에게, 특히 오늘날 신앙과 사역에서 눈에 보이는 성과를 기다리며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큰 격려와 위로가 된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정문 앞 해밀턴이 순교한 자리에는 그의 이름 첫 글자(PH)를 돌로 새겨 놓았는데 사람들은 이를 무심히 밟고 지나간다. 한편 정문 위 벽돌에는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곳이 있는데 일설에 해밀턴이 화형당할 때 화염이 날아가서 벽돌에 그의 얼굴이 새겨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믿기 곤란한 이런 이야기에 더욱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는 이 얼굴을 보고 조롱하면 낙제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PH”, 이 땅에서 그의 이름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지만 천국에서 그의 이름은 스테파노스(στέφανος, 면류관)처럼 영원히 빛나고 있다.
 
 
 

패트릭 해밀턴을 기억하는 이니셜,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정문 앞 바닥에 있다.
패트릭 해밀턴을 화형시키던 불씨에 그을려 그의 얼굴이 새겨졌다고 전해지는 벽돌.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 정문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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