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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2020

2020-01-19, "성령님이 묶어주신 샬롬의 밧줄" (에베소서 4:1~6)

작성자최광희|작성시간20.01.18|조회수325 목록 댓글 0

2020-01-19 주일설교

성령님이 묶어주신 샬롬의 밧줄

(에베소서 4:1~6)

 

 

옆 사람과 이렇게 인사합시다. 내 안에 계시는 주님과, 당신 안에 계시는 주님이, 같은 성령님이십니다.”

 

학교 운동회에서 종종 23각 경기를 합니다. 이인삼각를 잘 하려면 다리를 묶은 줄이 풀어지지 않아야 하고 두 사람이 보조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10명이 다리를 묶어 1011각 경기를 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10명이 보조를 맞추려면 더 많은 연습과 상대를 배려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100101각 경기를 한다면 어떨까요?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까? 방법은 똑같지만 사람이 많으면 서로 마음을 맞추는 것이 그만큼 힘들어지죠.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쩌면 100101각 경기와 같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는 빨리 가는 것보다 서로 맞추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꼭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것은 성령님이 묶어주신 샬롬의 밧줄입니다. 샬롬의 밧줄을 어떻게 보존해야 할까요? 말씀 속에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1. 사랑과 존경의 신뢰관계

 

우선, 이 명령을 한 사람은 바울인데 바울은 성도들이 자기 말에 순종해 줄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말과는 달리 헬라어에는 동사 속에 주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인칭, 2인칭, 3인칭, 그리고 단수, 복수에 따라 동사가 다르게 변형됩니다. 때로 헬라어에서 주어를 추가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주어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1절에서 내가... 권하노니가 그렇습니다. 내가(ἐγώ)라는 주어를 넣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울과 에베소 성도들은 특별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특별히 사랑했고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말이라면 혹 내키지 않더라도 순종할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믿었기에 바울은 내가너희를 권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멘토가 있습니까? 그 분이 말하면 설령 내키지 않더라도 순종하는 그런 멘토가 있습니다. 그런 멘토가 없는 사람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외톨이입니다. 여러분의 멘토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목사를 꼭 포함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복입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을 좋아하면 그 과목 점수가 오르는 것처럼 목사를 신뢰하고 순종하면 여러분의 믿음이 쑥쑥 성장할 것입니다.

 

2.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바울의 첫 번째 권면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을 부를 때는 목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에서 직원을 채용하고 월급을 주는 것은 회사가 원하는 것을 잘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채용 목적에 합당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사장이 실망하겠죠.

올해 415일에 국회의원을 새로 뽑는데, 국회의원은 단 하루를 하고 물러나도 평생 연급을 받는 등 엄청난 혜택을 누립니다. 그런 혜택을 주는 것은 유권자의 마음을 헤아려 달라는 것이죠. 그런데 혜택은 누리고 유권자의 마음을 외면한다면 유권자들이 분노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름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 주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혜택과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에 대해서 에베소서 1~3장에 자세히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4:1) 성도는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요약해 준 것이 3절의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평안은 히브리어로는 샬롬인데 샬롬이란 서로 간에 갈등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또 힘써 지키라는 말은 하나 됨을 보존하도록 계속해서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마치 23각 경기에서 줄이 풀어지면 실격이 되듯이 성도가 하나 됨을 깨면 실격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샬롬의 밧줄로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셨는데 그것을 잘 보존하는 것이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소원입니다.

 

3. 하나 됨의 두 방향

 

이제 하나가 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나 됨은 밖으로는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안으로는 자신의 마음가짐, 두 방향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2절을 봅시다.

먼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겸손과 온유가 필요합니다. 겸손과 온유의 원본은 예수님입니다. 마태복음 11:29에서 예수님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내 멍에를 메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짐을 우리에게 떠넘기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고대에 농부가 하나의 긴 멍에를 소 두 마리의 목에 지우고 쟁기를 끌게 했는데 그때 노련한 소와 어린 소를 짝을 지웠습니다. 그러면 어린 소는 노련한 소의 도움도 받으며 일을 배웁니다.

예를들어, 제가 탁구를 하는데 유남규씨와 같은 편이 되었다고 합시다. 제가 공을 받아 넘기기만 하면 유남규씨가 다 이겨 줄 것입니다. 유남규씨와 매일 탁구를 하다보면 실력이 많이 늘겠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멍에를 메고 가면 예수님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예수님께 겸손과 온유를 잘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성도들이 서로 온유하고 겸손할 때 우리가 하나 됨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안으로는 오래 참음과 사랑의 용납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용납이란 헬라어로 견뎌냄을 뜻합니다. 즉 나와 생각이 다르고, 행동 유형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속도가 다르고, 선호도가 다른 성도, 달라서 견디기 매우 불편한 성도를 견디는 것이 바로 용납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달라도 너무 달라서 예수님을 괴롭게 했지만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용납하고 계십니다.

세상 어디나 사람이 사는 곳에는 다름으로 인한 갈등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학식이나 재산의 유무, 신앙의 선호도에도 차이가 납니다. 박수치며 찬송하고 소리 질러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신사적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차이를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용납하셨듯이 성도도 나와 다른 성도를 견디어 내고 용납할 때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4. 막힘 담을 허무신 예수

 

우리나라 사람들은 편 가르기를 좋아합니다. 조선시대에는 남인, 북인, 노론, 소론으로 편을 갈랐습니다. 지금도 그런 편 가르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편 가르기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격차보다 크지 않습니다. 고대에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얼마나 경멸했는지 다음 두 가지 말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지옥의 땔감으로 쓰려고 창조하셨다.”

아무리 좋은 뱀이라도 박멸해야 하듯이 아무리 좋은 이방인도 멸망 받아야 한다.”

 

특별히 성전에 가면 가장 바깥에서부터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의 울타리에는 이 경계를 넘어오는 이방인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헬라어로 쓴 경고문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을 이렇게 생각하는 유대인과 그런 차별을 받은 이방인이 서로 미워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저절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줄곧 이 차이가 무너졌음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모두를 통일하신다고 말했습니다.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이방인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선물로 얻었다고 했습니다.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희생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힘 담도 허무셨다고 합니다.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5. 같은 목표를 위하여

 

예수님이 이루신 하나 됨은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시고 여러 나라 여러 민족에서 천국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예를 들어, 축구를 생각해 봅시다. 축구감독이 전국에서 선수를 모집해오면 서로 출신이 달라도 하나가 되어야 축구를 할 수 있습니다. 천국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전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모으셨는데 그 가운데는 우리가 싫어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일본 사람과 중국 사람은 우리와 이해관계가 다르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은 다 하나입니다. 다른 나라 성도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면 같은 나라 성도들끼리 하나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는 공통점이 매우 많습니다.

1)몸이 하나입니다. 몸이란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말합니다.

2)성령이 하나입니다. 영이란 Spirit입니다. 정신이 같습니다.

3)부르심의 소망이 같습니다. 소망이 같다면 협조해야 합니다.

어민들이 게를 잡아서 대야에 넣어 놓으면 한 마리도 탈출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만일 한 마리가 대야를 넘어서 탈출하면 반드시 다른 놈이 와서 집게로 끌어내리기 때문입니다. 게들의 공동의 목표를 다 함께 탈출하는 것인데 서로 밀어주고 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방해하기 때문에 한 녀석도 탈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같은 소망으로 부르셨는데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가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4)주님이 한 분이십니다. 같은 주인에게 월급 받는 직원들은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5)믿음도 하나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신앙고백을 합니다.

6)세례도 하나입니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7)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한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온 세상을 만드시고 그 모든 것 위에서 다스리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시면서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이 하나로 만드시는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 당연합니다.

 

6. 하나 됨을 실천하기 위하여

 

사람마다 손가락의 지문이 다 다르듯이 취향과 주장이 서로 다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다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같은 하나님을 모시고 같은 천국으로 가는 성도들이기에 하나가 되라고 하십니다.

우선 가정으로 가면 가족들이 서로서로 다릅니다. 부부가 서로의 다른 점에서 매력을 느껴 결혼했지만 그 다른 점 때문에 서로 불편합니다. 자녀들도 서로 달라서 재미있지만 달라서 불편합니다. 그런데 그 다름을 사랑으로 극복하는 것이 천국의 삶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고 행동입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더 커집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하나 됨을 유지하며 천국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또 교회에 오면 역시 성도들끼리 다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크기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차이점이 크게 느껴질 때는 예수님께 배운 겸손과 온유, 사랑과 용납으로 차이를 극복하여 교회에서 천국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7. 결론

 

오늘날, 하나님은 좋지만 교인들이 싫어서 교회에 가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위 가나안교인입니다. 그런 사람은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오지 않으면 믿음을 일어버리고 지옥 백성이 될 것입니다.

쌍둥이가 몸이 붙어 태어난 사람을 샴쌍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머리가 둘인데 몸이 붙은 샴쌍둥이는 있지만 한 사람이 몸 두 개를 가지고 태어난 경우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머리가 하나인데 몸이 둘이 될 수 없듯이 예수님은 한 분인데 교회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평화, 샬롬이라는 밧줄로 교회를 하나 되게 묶어 주셨습니다. 성도는 이 하나 됨을 보존하기 위해서 모든 손해와 고통을 감수하고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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