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1 주일설교
저한테 왜 이러세요?
히브리서 12:4~13
지난주에 귀한 부부와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중에 대화를 나누다가 옛날에 제가 힘든 일을 겪었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제가 그 당시에 상당히 부당하고 억울한 대우를 받은 이야기며, 그런 상황을 잘 이겨낸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는데 옆에서 듣던 부인이 눈물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인지 눈치를 살피는데 저와 대화하던 이분이 대뜸 말했습니다. “오늘 제가 목사님을 위로해드리고 싶어서 만났는데 오히려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이야기만 하고 있었는데 은혜를 받고 해답을 얻었다는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둘째는 그분이 은혜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대화 중에 성도가 해답을 얻는 이런 일은 목사로서 최고의 기쁨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제가 자주 그렇게 쓰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또한, 여러분도 누구와 대화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문제를 해결 받는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특히 오늘 말씀을 듣는 중에 여러분도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그분은 문제가 많은 분이 아니고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모범적인 신자입니다. 부부의 금실도 좋고, 교회에서나 직장에서 인정받는 분입니다. 자녀의 믿음도 정말로 좋고 건실하게 자랐습니다. 이분의 인품을 보면 누구와 불편할 일이 없는 분이고 얼굴을 봐서는 어떤 문제로 고민할 것 같지 않은 분입니다. 그렇게 신실한 신자에게 왜 눈물을 흘릴 만큼 마음 아프고 힘든 일이 있을까요?
그런데 믿음 좋은 신자에게 각종 고난이 오는 것은 사실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도 신자에게 찾아오는 불 시험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이상한 일처럼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벧전 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믿음 좋은 신자가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상당히 독특한 관점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오늘의 본문,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신자가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설명합니다. 본문에는 ‘징계’라는 말이 명사와 동사를 합쳐서 8번이 사용되었습니다.
제가 히브리서가 독특하다고 한 데는 따로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징계라고 하면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벌을 받는 개념입니다. 물론 때로는 우리가 죄를 짓고 징계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징계는 우리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징계가 올 때는 우선적으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돌아보고 회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서가 말하는 징계는 어떤 죄를 벌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 당시 히브리인 성도들은 유대교인 지도자의 박해를 받아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오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박해는 얼마 후에 하나님을 버리고 황제를 신으로 섬기라고 하는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네로 황제나 도미티아누스 황제 같은 박해자들에 의해 많은 성도들이 순교했습니다.
그 후 종교개혁 시대에는 개신교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돌아오라는 박해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청교도들과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많은 박해를 당했습니다. 오늘날도 전 세계 이슬람 국가들과 공산당 치하에서 박해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전 세계 1위 기독교 박해의 나라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자유로운 나라에서는 박해는 없지만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손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런 모든 박해와 고난을 특이하게도 “징계”라고 합니다. 혹시 이 단어가 번역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요? 징계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인데 교육, 양육, 훈련, 훈계, 징계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똑같은 단어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가 에베소서에도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교훈’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징계는 어떤 잘못에 대하여 벌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올바르게, 건실하게 세우는 훈련이 목적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고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고난을 겪는다면 “하나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 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고난을 잘 이기면 복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징계를 감당하기 힘든 이유와 그 징계를 감당해 내면 주어질 유익을 함께 말씀하면서 우리가 징계를 이겨내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징계를 힘들어하는 첫 번째 이유는 (4절에서 말씀합니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를 흘린다는 말은 순교를 의미합니다. 11장에서 나열한 믿음의 사람 가운데 여러 사람이 믿음을 따라 살기 위하여 때로는 목숨을 걸었고 때로는 인생을 던졌습니다. 또 12장 1절에서 말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 가운데 수많은 사람 역시 순교를 당하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렇게 목숨을 거는 사람을 일컬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11:38).
이 세상에서도 가장 무서운 사람이 목숨 걸고 덤비는 사람입니다. 고, 옥한흠 목사님의 제자훈련 세미나에 가면 첫 번째 강의가 바로 광인론(狂人論)입니다. 미치면 성공할 수 있고 미친 사람은 아무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광인론(狂人論)보다 강력한 것은 고, 이중표 목사님의 별세(別世) 신학입니다. 목숨 걸고 주님을 따르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유혹이나 박해를 이겨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다 진짜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보니까 그렇게 안 해도 어차피 다 죽던데요. 그리고, 그렇게 한다고 다 죽지 않던데요. 목숨 걸고 예수님 믿거나, 죽을까 봐 두려워서 피해 다니거나 사람은 죽을 때 되면 다 죽어요. 그리고 사람은 죽을 때가 되어야 죽어요.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계 2:10).
그러므로 피흘리기까지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목숨을 걸면 유혹이든 박해든 다 감당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징계를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두 번째 이유는 (5절에 나옵니다) 권면의 말씀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5~6절에 인용된 말씀은 잠언 3:11~12의 말씀입니다.
(잠 3:11~12)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잠언은 구약 성경이고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신약에서 징계는 헬라어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가 쓰였고 그 뜻은 교육, 양육, 훈련, 훈계, 징계 이런 뜻인데 히브리어에서는 무슨 단어로 쓰였을까요? 잠언에서 징계는 무사르(מוּסָר)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그 뜻은 훈계, 징계, 교훈 등을 의미합니다. 결국 구약과 신약에서 비슷한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히브리서 12:5에서 말하는 핵심은 이미 지혜의 책 잠언에서 징계에 관한 교훈을 주셨는데 그 교훈을 잊어버렸기에 지금 징계를 감당하기 힘들어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는 잠언도 있고 히브리서도 있으므로 더욱 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목숨을 걸고 징계를 감당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시 말하면 부당한 징계, 억울한 징계, 고통스러운 징계를 감당하면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이것을 대답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선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절대로 손해 되는 것은 주지 않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한테 손해 되는 것 시키겠니?”
어떤 어머니도 아들에게 손해될 것을 시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 말씀을 듣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따릅니다. 물론 부모님은 사람인지라 아들을 위해 좋은 것이라고 시켰다가 실수로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수로 나쁜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비록 인간적인 한계가 있어도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영의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징계를 달게 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9~10절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 다 선합니다.”
비록 그것이 징계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해서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자기 실수도 아니고 죄도 아닌데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그 징계는 유익하고 복된 것입니다.
이제 징계의 유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징계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10절). 여러분의 가장 큰 소원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노래하죠.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를 닮기 원함이라.
예수의 형상 나입기 위해 세상의 보화 아끼쟎네.
그런데 예수님을 닮아 거룩하게 되는 방법이 바로 징계입니다.
둘째, 징계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11절). 사람은 누구나 의로운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 하지만 징계를 받지 않으면 불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다윗의 아들 가운데 다윗이 한 번도 “너 도대체 왜 그랬니?”라고 나무란 적이 없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도니야’인데 뜻은 “나의 주님은 여호와이시다.”입니다. 그런데 칭찬만 받고 자란 아도니야는 다윗이 늙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압살롬에 이은 두 번째 왕자의 난이었습니다. 그 반란은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세움으로 평정되었지만 아도니야는 끝내 야심을 버리지 못하다가 솔로몬에게 처형당했습니다. 이처럼 칭찬만 받고 징계를 받지 않은 아도니야는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불의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의의 열매를 맺기 원한다면 징계를 감사히 받고 당당히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신 4~13절의 말씀 가운데 핵심은 한가운데 있는 8절입니다. 8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희는 친아들이므로 징계를 잘 견디어라”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라는 여러분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믿음과 고백으로 이렇게 찬양합시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