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인생 얕은 세상
누가복음 5:1-1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주현 후 다섯째 주일이다. 설날 연휴는 즐겁게 보냈는가? 떡국과 함께 나이도 한 살씩 맛있게 먹었을 것이다. 나이테가 늘어난 것을 축하드린다. 그만큼 인생이 깊어졌다는 증거다.
지난 주일에 교회학교 청소년부가 처음 줌(ZOOM)으로 비대면 예배를 드렸다. 서로 뿌듯해 하는 모습을 느꼈다. 흥미로운 것은 교사들과 청소년들이 자기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서로 자기 나이를 애매하게 말하였다. 청년교사들이 더 자신의 나이를 감추려고 들었다. 제일 떳떳하게 밝힌 사람은 목사였다. 젊은 사람일수록 나이에 더 예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도, 청년들도 모두 자신의 인생이 소중하다. 포장을 다 뜯지 않은 초코렛과 같이 기대하지 못한 달콤함이 있을 것이다. 아직 그들의 나이테는 몇 줄 되지 않으나, 우리 어른들은 그들의 나이테가 두텁고 견고하게 형성되도록 도울 의무가 있다. 그래야 얕은 세상에서도 인생의 깊이를 누리며 살 수 있다.
1)
본문은 처음 제자를 부르신 이야기이다. 복음서에서 가장 생기가 넘치는 대목이다. 예수님의 첫 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요, 사역에 참여할 사람을 부르는 일이었다. 모든 시작은 아름답다.
갈릴리 제자 학교의 신입생 모집 기록을 살펴보자. 4복음서를 종합하면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다가 눈에 띄는 두 그룹을 만나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전혀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을 것이다. 모두 갈릴리 해변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예전부터 소문을 들었고,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던 사이였을 것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드레는 한때 세례 요한의 제자였고,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안내한 적도 있다. 마태복음(4:18-22)은 예수님이 두 그룹을 차례로 만나시며 제자로 초대하시던 그 순간을 강조한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차례로 “곧”,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다.
처음 어부들의 따름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들은 뒤돌아보거나, 재고, 따지며, 수지타산을 계산할 새 없이 마치 기다렸다는 사람처럼 “곧”, “버려두고” 예수를 쫓아갔다. 얼마나 즉각적인가? 그 만남, 부르심, 따름은 놀라운 사건이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평행본문이라고 한다. 같은 메시지의 본문을 비교하면 더욱 풍성하고, 구체적이다. 제자 초청의 기록을 보면 마태복음이 압축적인데 비해, 누가복음은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하려고 훨씬 극적인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누가라는 기록자는 내러티브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요즘 영상시대에 인기 있는 방식이다.
우리도 누가의 의도에 따라 드라마를 구성한다는 마음으로 살펴보자. 먼저 배경이 구체적이다.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1-2).
예수님은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니셨다. TV 속 스타 골퍼가 갤러리들을 몰고 다니는 장면이나, 요즘 대통령 후보들이 유세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마침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말씀을 전하실 무대를 찾으셨다. 마치 산 위에서 무리를 내려다보며 산상설교 하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겠다.
마침 게네사렛(갈릴리)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었다. 어부들은 배 밖으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는데, 아마 이른 아침부터 몰려오는 군중들을 보고 심상치 않게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중 한 사람에게 부탁하여 배를 사용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리고 배에 오르시면서, 뭍에서 바다 쪽으로 떼어 인파와 간격을 두도록 하신다. 누가는 그 배의 임자는 베드로였다고 힌트를 준다.
계속 읽어 보자. 예수님은 배 위에 앉아 해안에 서 있는 무리를 향해 가르치셨다. 그리고나서 배 임자인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
베드로는 갈릴리의 이름 없는 어부였는데, 졸지에 역사의 무대 한복판으로 나선다. 지금까지는 단지 배를 잠시 빌려 주는 입장인데, 이제는 명령을 듣는 입장이 되었다. 어떤 입장(立場), 곧 선 자리가 무엇이냐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구경꾼 베드로에서 주인공 베드로가 되는 순간이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말을 거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 말을 듣는 순간 베드로의 마음이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이른 아침에 해변에서 그물을 씻는 어부라면, 간밤에 밤새도록 그물을 내려 일했던 어부임을 누구나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을 반복하라니 뜻밖이었다.
시몬은 약간 주저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생님다운 분부였기에 정중히 대답하였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6).
그리고 해안에서 다시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깊은 곳은 해변 근처가 아니다. 해변가의 정반대 방향이었다. 그물은 해변 얕은 데서 내리지 않고, 바다 깊은 곳에서 내린다. 해변에서 첨벙거리며 물고기를 잡는 어부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밤의 경험에 따르면 그날따라 깊은 곳이든, 얕은 곳이든 잡힐만한 물고기는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지시였지만, 어부들은 순종하였다. 한 마디로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다.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어부들은 손질하던 그물을 배에 다시 싣고, 노를 저어 바다로 나갔다. 해변에 몰려 선 사람들은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매우 즉흥적인 퍼포먼스였이니, 볼만한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가?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6).
시몬은 인근에 있는 동업자를 불렀다.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배가 달려와 함께 그물을 끌어 올렸고, 물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혔던지 두 배에 가득 차서 가라앉아 잠길 지경이었다. 어부들도 놀라고, 구경꾼도 놀랐다. 이것이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가 말하려는 극적 장면이다.
2)
주목해서 볼 것은 베드로의 관점이다. 베드로는 이럴 줄 정말 몰랐을 것이다. 애초에 주저하던 베드로였다. 예수님의 분부를 듣자마자 베드로는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이라고 변명한 바 있다. 베드로의 대답 중 ‘밤새도록’ 혹은 ‘없다’와 같은 단어에서 절망스런 마음을 들을 수 있다.
아마 더 내러티브하게 표현하자면 이런 대사를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다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구요? 어디가 깊은 곳이죠? 당신이 우리의 깊은 곳을 아십니까? 그 깊은 좌절, 그 깊은 인생말이죠.”
그 아침에 어부들의 심경은 울화가 났을 것이다. 밤이 새도록 애를 썼는데 단 한 마리의 소득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배에서 아침을 맞이하도록 밤새 공을 들였는데, 전혀 내 몫의 소득이 없다니! 이것은 일일노동자로서 한계상황이다. 아예 헛수고라! 그 상황이야말로 온갖 푸념과 화풀이를 내도 이해할 만한 그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사실 어부들은 자주 배신당한다. 그물을 내린다고 그때마다 물고기가 잡힐 것을 기대하는 어부는 없다. 그러나 기대와 희망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면 얼마나 절망적일 것인가? 깊은 수렁에 빠진 느낌, 벗어나려고 허우적거릴수록 몸을 빼기가 점점 어려운 그런 상태이다.
정말 그때 느끼는 절망감은 아주 대단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실패를 겪다보면 트라우마가 생긴다. 실패가 두려워서 더 소심해지고, 더 겁쟁이가 되고, 더욱 회의적이 되어 자포자기한다. 베드로의 심정은 어땠을까? 밤이 새도록 수고를 했는데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이 베드로에게서 느낄 수 있는 절망의 골이었을 것이다. 누가 나를 건져주오!
갈릴리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그 바다에서 그물을 깁고, 그물을 던지고, 그물을 올리며 살았다. 배와 그물은 인생의 전부였다.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다. 사실 그런 그물로는 평생 가난을 이길 수 없었다. 자기의 욕망은 언감생심 채우기 어려웠다. 그물은 정직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인생의 그물이었다. 그들의 인생은 얕은 물에서 첨벙거리기에는 너무나 깊은 바다의 마음이었다.
옛날 그리스 어부들은 이렇게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고 한다.
“나의 배는 너무나 작고 바다는 너무나 큽니다.”
그렇다. 인간의 욕망에 비해 우리의 배는 얼마나 작고, 큰 바다의 위험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자주 풍파에 흔들리는가? 우리의 그물로는 고작 일용할 양식을 얻기도 힘들다.
다시 베드로의 심정을 들어 보자. 즉각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신뢰감을 나타내 보였다. 아마 배 위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었던 베드로였다. 당시 가장 뜨거운 이슈를 몰고 다니던 분이기에 혹시나 하는 기대심리도 컸을 것이다.
그래서 낙심했지만, 비록 의심도 없지 않았지만, 헛수고에 대해 지레 판단하지 않고 다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려고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 순간만큼은 신중한 어부로서의 전문성과 잔뼈가 굵은 갈릴리 바다 지식에 의지하지 않았다. 선뜻 순종한 까닭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더 절박한 ‘깊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얕은 세상에서 첨벙거리면서 다녔지만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깊은 인생이었다. 마치 깜짝 퍼포먼스처럼 눈앞에서 놀라운 체험을 한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한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8).
그리고 예수님은 첫 제자 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10).
제자단의 핵심 그룹의 출발점은 이렇게 그 동기부터 특별하였다. 생각해보라.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사람은 빵으로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겨자씨 속에도 하늘나라가 잉태한다’는 이런 말씀을 하실 때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앞에서 콧방귀나 뀌고, 입을 내밀고 툴툴거리는 얄팍한 인생에게 진심이 통할 리 없다.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의 미련함을 인정해야,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야, 스스로 죄인임을 실토하고 자신을 낮추고 내려놓아야 가능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갈릴리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는 그물을 버리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그물을 택하였다. 물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그것은 인생의 전환점이며, 이전 삶의 청산이며, 삶의 목표에 대한 완벽한 수정이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부르셨다. “나를 따라 오너라.” 그것은 육체적으로만 쫒아 다니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라는 것이다. 누가 참 제자인가? 과연 나는 얕은 세상에서 사람만 쫒아 다니는 존재인가? 아니면 깊은 인생을 주님께 맡기며 나와 동행하시는 그 깊은 은혜에 의지하며 사는가?
제자들의 삶을 보라. 지금 포기하는 자는 나중에는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현실을 포기하고 장차 하나님 나라를 얻었다. 지금 부르심을 받는 자는 나중에는 부르는 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당장 예수의 말씀을 듣고 따랐으며 장차 세상 사람을 부르는 전도자가 되었다. 지금 복음을 듣는 자는 나중에는 전파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지금 예수의 말씀을 들었으며 장차 하나님 나라를 얻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 달콤하고, 듣기 좋았던 것일까? 요한복음 6장의 기록을 보라. 제자 중 여럿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퉁퉁거린다. 저 홀로 못 알아듣고 말지, 사람들을 선동하여 흩어지게 하였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그때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 그때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도 물으셨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처럼 제자들에게는 매번 결단이 요청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한다. 베드로는 괜히 수제자가 아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인생의 깊음을 얻은 사람이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8-69).
3)
현대인인 우리도 그물에 매여 산다. ‘인생의 그물’이다. 누구나 그물에 얽혀 살아가고 있다. 인간관계도 그물이고, 사업상 관계도 그물망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우리 시대의 열쇠말(키워드)은 인터넷(Inter-Net)이다. 가장 현대적인 것은 다 인터넷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인터넷은 바로 그물(Net)이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네트워크(Network)로 통한다.
성경에서 그물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올무, 덫이란 뜻이다. 사람을 속박하고, 걸려 넘어지게 한다. 문명의 이기인 스마트폰도 사람을 부자유하게 한다. 그물에 붙잡힌 인생이다.
또 하나의 그물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일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물은 ‘하늘그물’이다.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색동교회 제자훈련 성경공부의 제목이 <그물짜기>인 까닭이다.
누구나 인생의 그물을 지니고 산다. 그것이 덫이 되기도 하고, 하늘그물, 날개가 되기도 한다. 세상에 강철 그물은 없다. 그러기에 누구든 그물이란 경제적 방편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한 그물 때문에 늘 불안하다.
그물의 진정한 가치를 알던 첫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반응을 보였다. 그들이 예수님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들은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삶의 자리에 일부러 찾아오셔서 말씀하신 일이다. ‘네 그물을 버리고, 내 그물을 소유하라’. 젊은 어부들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수님을 따른 갈릴리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는 그물을 버리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그물을 택하였다. 물고기를 낚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그것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얕은 세상은 내 인생의 깊음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 깊은 인생은 늘 당사자만 안다. 폴 틸리히는 이렇게 말하였다. “신앙이란 ‘궁극적 관심’에 붙잡힌 상태입니다. ... 인간이 궁극적 관심이 아닌 다른 우상들을 섬기는 신앙은 예수의 ‘궁극적 관심’에 의해 회복되고 새롭게 변화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삶의 깊은 곳을 만져주셔서, 얕은 세상에서 이길 능력을 주시길 바란다.
그리하여 믿음의 힘, 믿어주는 힘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