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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씀

너 자신이 되어라 (2025.8.24/ 성령강림 후 제11주일)

작성자송길똥|작성시간25.08.24|조회수65 목록 댓글 0

 

너 자신이 되어라

예레미야 1:4-9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어느새 절기상으로는 여름의 막바지다. 오랜 경험으로 시절도, 계절도 다 자신의 길이 있음을 느낀다. 어제는 처서였다. 처서는 모기의 입이 비뚤어지는 절기라고 한다. 아직 무덥더라도 결국 가을이 다가오는구나 싶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길이 있다. 사람들은 평생 ‘내 길’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아무도 자신의 길을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 열 번 된다’는 속담도 있다. 사실 누구나 자신이 어려서 희망한 대로 인생을 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직업은 내 능력이나 기대와 상관없이 결정되는 때가 많다.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장차 ‘무엇’이 되기를 원했나? 우리 집 아이는 나중에 어떻게 될까?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다. 주님, 내 아이의 갈 길을 인도하옵소서. 자신의 미래를 향해 도전할 믿음을 주옵소서. 사람과 사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살게 하옵소서.

 

루마니아 작가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가 있다. 그는 루마니아 정교회 사제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대를 이어 사제가 되기를 원했지만, 처음에는 소설가가 되었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비르질이다. 루마니아정교회 전통에 따라 아이는 세례를 받은 날에 생일축복을 받는데, 365일 중 비르질이란 성인의 날은 없었다. 그래서 해마다 생일축복을 받지 못하는 비르질은 아버지를 원망하였다. 왜 내게 성인의 이름을 주지 않았나요?

 

아버지는 로마제국의 대시인 중에 ‘비르질’이란 이름이 있다고 말해 주었지만, 어린 그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게오르규는 이때 전 생애를 이끌어갈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너 자신이 성인이 되어라”였다.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소명이라면, 그 소명은 내 생애를 이끌어갈 등불이 된다.

 

1)

 

본문은 유명한 예레미야의 소명 기록이다. 하나님이 어린 예레미야를 부르셨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4).

 

예레미야가 장래 희망을 말하기 전에, 하나님은 일찍 예레미야를 점찍으셔서 당신의 예언자로 삼으셨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를 성별하셔서 선지자로 선택하셨다. 예레미야의 유전자, 희망, 선택, 능력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하나님의 강권이었다.

 

예레미야는 즉각 사양한다. 자신은 너무 어리고, 선지자로 살기에는 말주변이 없다고 변명한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6).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린 것이, 내가 말 못하는 것이 거절할 변명거리는 안 된다. 예전에 어린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라고 순순히 따랐고, 선지자 이사야도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응답하였다. 성경에서 사무엘과 이사야의 소명은 모범사례이다.

 

어쩌면 나이나 말주변의 문제가 아니다. 모세는 나이 여든 살에도 변명한다. 그는 40세에 애굽에서 도망쳐서 미디안 광야에서 숨어 지냈다. 살인 혐의를 받았으니 이름을 내세우고 살 수 없었다.

 

그러다가 죽기 전, 나이 80세에 기회가 찾아왔다. 잊혀진 인물이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할 찬스인데, 그는 사양한다. 그것도 다섯 번이나 변명하고, 회피할 기회를 찾는다.

 

“내가 누구이기에”(출 3:11), “내가 무엇이라고”(출 3:14),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출 4:1),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출 4:10),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3).

 

나이가 어리거나, 또 나이가 많거나 생각하기에 따라 다 약점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들의 기준과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의 기준에 맞추지 않고 하나님의 필요에 맞추신다. 적고, 어리고, 말주변이 없는 것이 핑계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쓰시겠다면 적대자 사울도 전도자 바울로 바꾸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부족과 한계로부터 시작하신다. 하나님의 상식은 언제나 인간의 판단을 넘어선다.

 

사실 어리다는 것은 얼마나 큰 약점인가? 우리 교회가 후원하는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임’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989년 일이다. 고난모임은 당시 시대의 아픔을 싸매는 작은 위로자가 되려고 하였다.

 

의기투합하여 문은 열었지만 우리 힘만으로 될 것 같지 않아 대표 직함을 맡아주실 어른을 찾았다. 취지를 이해하는 분들 중에서 연배도 있고, 이름도 알려져 있고, 후원 능력도 있는 그야말로 훌륭한 사람이 필요하였다.

 

우선순위로 연세대학교 교목실장인 이계준 목사님을 찾아갔다. 젊은이들에게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솔직히 우리 입장을 말씀드렸다. 그분은 뜻에 공감하고, 후원도 약속해 주었다. 그런데 대표 맡는 일만큼은 사양하였다. 이런 말로 사양하였는데, 그 진심이 느껴졌다.

 

“당신들은 결코 어리지 않아. 이 일은 소명감을 가진 자네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네. 그러니 어리다고 생각하지 말고 송 목사, 자네가 대표를 하게.”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감히 내가?’라고 주저하였고, ‘네가 뭔데?’라는 생각에 주눅 들었다. 아직 서른도 못된 햇병아리, 가난한 시골교회 목사가 아닌가?

 

사실 가장 두려운 것이 사람이었다. 내 마음도 마음이지만,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웠다. 결국 강력한 권유로 준비모임 대표를 떠안았다. 그날부터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하여 자라온 역사가 올해 36년째이다. 종교계를 통틀어 무성했던 인권관련 모임들이 오래전에 다 사라졌지만, 고난모임은 여전히 유일하게 존재하는 교단 공인 선교기관이다. 지금도 나는 고난모임을 시작한 사람이라는 명예로운 인사를 듣는다.

 

2)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무슨 주장을 해야 할 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사람이다. 사람의 눈치, 입장, 평가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저앉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부모나 배우자, 동료의 역할이 참 중요하다. 선한 일이라면 늘 한 편이 되고, 격려자가 되어야 한다. 의리있게 도와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역할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장을 들으시고, 어린 나이, 말주변이 없음을 대체할 능력을 주신다. 예레미야의 입에 손을 대시고, 그에게 할 말을 담아 주셨다.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

 

예레미야를 만방의 예언자로 세우신 하나님은 하나의 원칙을 말씀하신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8).

 

하나님은 무엇보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의 눈치를 살피고, 그들의 장단에 맞추면서 살지 말라고 하신다. 그깟 사람들의 품평이나, 시빗거리는 다 스쳐 지나갈 것이다.

 

예레미야의 전기 이야기를 읽어 보면 그는 순종을 하면서도, 불평도 많이 했다. 예레미야의 불평은 하나님을 향한 고달픈 항변이었고, 자신의 소명에 대한 하소연이었다. 예레미야서 곳곳에 선지자의 변명, 고백, 탄식이 계속된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6).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렘 15:10).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렘 20:7).

 

예레미야의 푸념을 들어보면 그는 다른 예언자들에 비해 훨씬 인간적이다. 예레미야의 항변은 공감대가 넓다. 그는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입에 담고 살았다. 그런 그를 눈물의 예언자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8).

 

예전에 한여름이면 납량특집 영화 ‘조스’를 보여주었다. 무더위를 식혀주는 소름 돋는 영화다. 바다에 식인 상어가 나타났다. 그런데 해수욕장 번영회는 이를 알리려는 보안관의 입을 막으려고 한다. 그런 소문이 나면 해수욕장에 손님이 오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소득이 줄어들까 봐, 많은 사람들에게 닥친 생명의 위협을 덮어버리려고 하였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참 힘이 든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남들과 달리 더 힘든 것은 그의 얄굿은 역할 때문이었다. 그는 원수 바벨론의 승리를 외치고, 자기 민족 예루살렘을 향해 항복을 권고하였다(렘 38:2).

 

지도자라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라고 해야 정상인데, 예레미야의 경우 기껏 한다는 말이 “항복해야 살 수 있습니다”였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처지였다. 그는 시대를 거스르는 악역을 감당해야 하였다.

 

3)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를 수 없는 까닭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민족의 사활이 걸린 문제고, 시대의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역사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소명은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다는 분명한 자각에 대한 고백이다. 그 자각이 거룩한 사명을 품게 한다. 하나님은 어린 예레미야를 통해 세상의 멸망을 보여주시고, 다시 세우실 일도 계획하신다. 예언자는 오로지 주님의 말과 뜻을 따를 뿐이다.

 

콘그탄틴 비르질 게오르규는 결국 47세가 되어 그리스 정교회의 신부 서품을 받았다. 그는 파리의 교회에서 사제로 일하였다.

 

게오르규가 그 시대의 예언자라는 평가를 듣는 이유는 대표작 <25시> 덕분이다. 저자가 제2차 세계대전 때 겪은 생생한 체험이 이 소설의 바탕이 되었다. 그는 요한 모리츠라는 평범한 인간의 비극적 인생을 통해, 약소국가 루마니아 민족이 겪어야 했던 눈물겨운 고난을 재현하였다.

 

‘25시’는 어떤 뜻일까? 이 시각은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을 상징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가치를 상실하고, 일차원으로 축소되어 가는 사회를 의미한다. 작가는 말한다. “25시는 모든 구원이 끝나버린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최후의 시간에서 이미 한 시간이나 더 지나버린 절망의 시간,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순간이 바로 25시입니다.”

 

그는 정교회 사제보다, 소설가로서 더욱 사제의 직분을 다한 사람이다. 작가로서 시대의 예언자가 된 셈이다.

 

게오르규는 2차 세계대전 중 잠수함을 타는 수병이었다. 당시의 잠수함은 필수적으로 토끼장을 싣고 다녔다. 토끼는 잠수함 안의 산소를 측정하는 일종의 계기 역할을 하였는데, 게오르규의 임무는 토끼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게오르규의 말은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잠수함의 토끼처럼 시대와 역사의 흐름 앞에 민감하라는 의미였다. 바로 역사의 파수꾼으로 살라는 뜻이다.

 

우리가 가진 소명은 하나님과 관계이다. 소명은 어린 날, 젊은 뜻에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순간순간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신다. 그리고 내 삶을 인도하신다. 그것은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다.

 

이제 내 인생에서 어떤 기회가 찾아온다면 너무 남의 눈치를 살피지 말라. 이 나이에 무슨, 노인이 주책이지, 라는 말은 정직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어린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라”는 무슨 의미인가? 남의 눈치를 살피고, 입장을 따지지 말며, 세간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다.

 

‘너 자신이 되어라.’ ‘남이 아닌 네 자신의 삶을 살아라.’

 

너는 남의 인생을 대신 사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에 네게 주신 너 자신의 삶을 잊지 말라. 네 인생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을 붙들어라. 내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8).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당당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셔서 그런 부르심 가운데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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