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을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10:40-42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와 함께 하시길 빈다.
어제는 현충일이었다. 정부는 언제나 독립운동가, 호국영령, 민주화운동 희생자에게 마땅한 존중과 보상을 한다고 다짐한다. 이런 일에 보수와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국가는 반드시 매국반역자에게는 벌을 주고, 애국자에게 상을 줘야 한다.
영어 격언에 ‘Freedom is not free’라는 말이 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누군가의 희생 덕분임을 기억하자는 의미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경구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 공동체는 숭고하고 고귀한 희생을 하는 이들을 기억하고, 성심으로 존중해야 할 것이다.
1)
지난 주간에 목사의 축도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어느 은퇴한 목사가 오랜만에 교회의 초대를 받아서 감회가 컸다. 방문한 김에 어린이부에서도 설교를 했다. 전도사님은 쉽지 않다고 만류했지만, 그래도 우너로 목사는 아이들 앞에서 설교를 했다.
사실 만류한 이유가 있었다. 아이들은 소란스럽고, 집중하지 않는다. 그래서 설교를 서둘러 끝내고, ‘이놈들, 목사만의 필살기를 보여줄 테다’하고 두 손을 높이 들고 축도를 시작하였다.
앞에 앉은 두 아이가 쑥덕거린다.
“목사님이 왜 저러지? 왜 두 손을 높이 들고 있어?”
다른 아이가 말한다.
“설교를 못해서 하나님께 벌 받는 거야.”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 파송 이야기이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위해, 온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여러 가지 대응 매뉴얼(마 10장)을 들려 보내셨다.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12).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16).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9).
그런데 제자들의 경우, 환영은커녕 푸대접을 많이 받았다. 오죽 영접도 않고, 말도 듣지 않았으면 예수님은 “너희 발의 먼저를 떨어 버리라”(14)고 노여워하셨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참고, 인내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사람은 평화를 빌고, 지혜로우며, 하늘의 상을 고대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샬롬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모두에게 필요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님 대하듯 잘 영접하라고 하신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40).
유대인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현자를 대접하는 것은 수확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내가 보내는 너희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것은 바로 나를 맞이해 주는 것이고, 결국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특권을 요구할만한 자격이 있다고 하신다. 그 특권은 대접을 받고, 상석에 앉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람답게, 그가 보내신 제자답게 그런 자세로 나를 파송하신 예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2)
처음 문수산성교회의 문을 열고 그 지역 월곶면사무소에 인사차 갔다. 25살 풋내기 전도사였다. 나를 응대한 부면장이란 분이 반말 투로 말하더라. 무시당하는 것 같아 불쾌하였다.
내가 당돌하게 지적하였다. “부면장님은 면사무소에서 존경받는 분이 아닙니까? 저도 교회 안에서 존중받는 목회자입니다. 반말을 삼가해 주십시오.”
지금 생각해도 젊은 내가 아주 잘한 듯하다. 사실 내가 대접받으려는 것은 내 본심이 아니었다. 나는 외려 부담스럽다. 그런데 내가 대접을 받거나, 나를 존중하라는 것은 나 자신 때문이 아니다. 내가 아닌, 내 ‘역할’ 때문이었다.
우리 어린이들도 한 사람으로서 존중받는 것은 마땅하다. 어디서든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나를 무시하거나, 내 몸에 손을 대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그러면 안 돼요.”
지난 연말에 색동교회에서 달력들이 담긴 봉투를 가정별로 준비해 속장님이 나누어 주었다. 딱 맞게 준비하였다. 그런데 교회학교 어느 어린이가 내게 물었다. “어린이는 안 주나요?” 그 어린이는 부모님이 교인이 아니어서 속회에 속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소외된 것이다.
저런! 얼마나 미안하고, 부끄럽던지, 이젠 그렇게 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나서서 잘 배려해야 한다. “서안아! 네가 가르쳐 주어서 고맙다.”
예수님은 처음 세상으로 파송 받는 제자들에게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를 따듯하게 맞이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사람과 같을 것고, 그렇지 않으면 기회를 놓쳐버린 그들의 손해라고 말씀하셨다.
영접하는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 그는 반드시 하늘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복음을 전한 사람, 선한 일에 힘쓴 사람, 남을 배려하는 사람,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대접하는 사람에게 상을 줄 것이라고 하신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41).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고, 무시를 당했다. 제자들이 세상의 기준이나 욕망과는 다른 종류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비현실적인 삶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선지자와 의인을 따듯이 맞이하고, 대접하는 일은 때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아무리 소소한 일이라도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며 칭찬하시고, 상을 약속하신다.
그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선지자의 상급, 의인의 상급을 받을 것이다.
3)
오늘은 평신도 주일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 주님의 평화를 나누는 사람 모두가 주님의 제자로 부르신다. 브라우닝은 말한다. “모든 봉사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
옛날 어른들은 목사님을 잘 대접해야 복 받는다고 하였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정말 그렇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대접과 존중을 받으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큰 복을 받는 방법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선지자와 의인을 대접하면 더 크게 복을 받는다고 하신다. 그러니 선지자와 의인의 일을 하는 주님의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접하기 바란다. 우리 교회 안에도 많이 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복을 받는 경우에 대해 말씀하신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2).
가장 큰 복을 받는 경우는 “작은 자”를 대접하는 일이다. 작은 자가 누구인가? 바로 예수 공동체 안의 ‘어린 자, 가난한 자, 낯선 자, 보잘 것 없는 자’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오히려 이들에게 가장 최선을 다해 대접해야 한다고 하신다.
이미 남들에게 존중받을 만큼 높아 보이는 사람은 그 지위 때문에 당연히 대접을 받는다. 겉으로 볼 때 머리가 희거나, 옷을 잘 차려입거나, 아주 좋은 차를 타거나. 대접받을 만한 모습을 한 사람은 그가 보여주는 ‘포스’ 때문에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사는 남들이 인정 안 하고, 외견상 볼 품도 없는 그런 “작은 자”조차 마치 예수님을 맞아들이듯이, 영접하라는 것이다.
정성껏 “냉수 한 그릇”을 나누라고 하신다. 냉장고가 없던 옛날에 어떻게 시원한 냉수를 대접할 수 있을까? 그냥 떠다 놓은 물이 아니라, 우물에 가서 갓 길어낸 물로 대접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여기에서 “냉수”는 사소한 봉사 같지만, 실제적인 친절을 말한다. 낯선 사람에게 베푼 정성의 보상으로 하나님은 그의 영혼의 기갈을 없애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작은 자” 곧 낯선 존재로 찾아 오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신다. 나를 찾아온 “작은 자”는 변장한 그리스도이시다. 바로 하나님은 “작은 자”로 나를 찾아오신다.
사실 하나님은 먼저 나를 따듯하게 맞아주셨다. 내 외모나, 겉모습이나, 지위 때문이 아니라, 내 “작은 자” 됨을 보시고 나를, 우리를, 맞아주신 분이다. 그리고 주님의 평화를 허락하신다.
내가 영접하기 전에 이미 영접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늘 기대하라. 그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고, 복음과 평화를 전하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라.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삶에 동참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