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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씀

신령한 세 가지 (2026.6.21/ 성령강림 후 제4주일)

작성자송길똥|작성시간26.06.21|조회수49 목록 댓글 0

 

신령한 세 가지

베드로전서 2:2-5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와 함께 하시길 빈다.

 

성령강림절기이다. 이제 한 여름에 접어든다. 무더위가 시작되고, 장마철이 찾아오고, 유월은 초록빛으로 더욱 무성할 것이다.

 

특히 이 주간에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6.25를 기억할 것이다. 76년 전의 일이지만 과거가 아니다. 지금도 남과 북은 휴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위한 기도와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그럴 수록 더욱 안전해 진다.

 

1950년 여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해에도 참 무더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 덕분에 과일이 참 흔했다고 한다. 피난 가는 사람들이 요기를 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고통을 함께 겪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 있었다.

 

예전히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는 전쟁들은 군사적 대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저마다 경제 전쟁, 종교 전쟁, 국민과 세계인의 마음을 모아내야 할 공감의 전쟁도 함께 치룬다.

 

겨우 미국과 이란 간에 합의한 60일 휴전도 그런 배경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이와 여성들, 가난한 사람들이다. 당장 발이 묶이고, 인생이 묶인 사람들이다.

 

국제적인 전쟁만 전쟁이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인생에서 갈등과 전쟁을 치룬다. 잘 견뎌내야 한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감을 얻는 일이 필요하다. 모두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1)

 

베드로전서 2장에는 당시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박해와 위기 그리고 이를 대처할 베드로의 권면이 담겨있다. 초대교회의 박해적 상황이다. 그들의 신앙에 위기가 닥쳤다.

 

베드로전서는 박해의 상황에 대해 말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소망이 죽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산 소망”(벧전 1:3)이 있다. 우리의 믿음은 여전히 살아있다. 버림받은 듯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여전히 살아서 성장하는 ‘산 돌’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서 다시 강조한다. 이럴수록 우리의 신앙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한다. 그는 버림받은 돌처럼 천대받았으나 살아있는 돌처럼 우리 안에 계신다. 다시 말하면 예수와 함께 하는 삶, 그분의 사랑과 결합하는 삶, 이런 영적인 삶을 살라는 것이다.

 

본문은 세 가지를 주문한다. ‘신령한 젖’(2, 영적 음식)을 먹고, ‘신령한 집’(5, 영적 삶)을 짓고, ‘신령한 제사’(5, 영적 예배)를 드리라.

 

먼저 ‘신령한 젖’에 대하여 말한다. 신령한 젖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고, 예수의 제자로 사는 삶의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

 

좋은 신앙인이 되려면 바른 음식을 선택해야 한다. 어린 아기가 젖을 빨고, 이유식을 먹고, 점점 음식을 바꾸어 먹듯이, 영적 음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신령한 젖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몸에 탈이 나면 가장 먼저 바꾸는 것이 음식이다. 특히 신앙은 영적인 양식이다. 무엇을 먹고 자라는가는 얼마나 중요한가?

 

육적인 생명이 있는 것처럼 영적인 생명이 있다. 몸을 위해 육의 양식을 먹듯이, 내 영적인 삶을 위해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기도 생활을 비롯해 영성, 경건, 거룩한 생활, 선한 실천, 주님의 평화를 누리는 일은 모두 영적인 삶을 위한 방법들이다.

 

교회는 신령한 젖, 영적인 음식을 먹는 공동체이다. 주일마다 듣는 설교를 언제나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듣는 순간 잊어버리기도 하고, 잠시 머물렀다가 연기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의미가 없는가?

 

그때그때 우리가 먹는 음식의 메뉴를 일일이 기억하고, 그 재료와 요리 방법과 그 영양가를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마음과 영혼이 기억한다. 내 몸의 건강과 에너지와 영적 활력을 가져온다. 그러니 설교를 듣고, 성경 공부를 하고, 묵상할 때, 영의 양식을 섭취하는 즐거움으로 참여하라.

 

내 영적 삶의 건강과 에너지와 풍성함을 위해 영의 양식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지식이나 흥미로 듣는 사람과, 아예 듣기를 포기한 사람은 삶의 태도와 질이 달라질 것이다.

 

영적 깊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들여진, 복음으로 새로워진, 예수의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리모델링 한 그런 신령한 사람이 지닌 신앙의 깊이이다.

 

신령한 젖은 나를 새로운 차원의 영적인 삶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우리는 몸을 지니듯, 영을 지닌 존재이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삶을 사모하며,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찾는 일은 쉬어서는 안될 것이다.

 

2)

 

인생의 위기는 그 위기의식조차 모를 때에 심각하다. 그럴 때 다른 데서만 원인을 찾지 말고, 내 영적인 삶에도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는 이유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를 구별하셨다. ‘택하신 족속으로, 그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 2:9)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렇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삶인가?

 

둘째로 예수님과 더불어 ‘신령한 집’을 지으라고 한다. 영적인 삶을 살라고 한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4-5).

 

누구든 삶의 위기에 부딪치면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뭐가 잘못되었는가를 점검하고, 문제를 고치려고 도전한다.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그 위기를 점점 키우고,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웬만하면 인생 리모델링을 시작하지만, 그것 가지고 안 되겠다고 판단되면 아예 재건축을 시도한다. 집의 경우처럼, 사람도 가능할까?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영적인 삶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가 늘 입버릇처럼 사용하는 영성, 영적인 삶, 성령, 속사람 등의 개념이나, 기도, 축복과 같은 행위를 보더라도 그렇다. 육적인 삶을 리모델링하듯이, 영적인 삶을 재건축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과 결합하는 삶은 영적인 삶에 깊이를 가져온다.

 

베드로전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삶을, 특히 영적인 삶을 재건축한 당사자들이다. 직업이나 습관, 생각이나 뜻을 리모델링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영적인 삶을 재건축하였다. 그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하는 것이다. 그 분은 살아있는 돌이므로, 거기에 결합함으로서, 그 사랑에 접목함으로써 신령한 집, 영적인 삶을 세워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흩어졌으나, 당장 고난을 겪고 있으나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허물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고,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한없는 감격과 기쁨으로 복음을 널리 증거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과 결합하는 삶, 이것이 영적인 삶에 깊이를 가져온다. 베드로전서는 중요한 본보기를 제시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다.

 

세 번째는 바로 ‘신령한 제사’이다. 성화는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생활하는 것’이다. 영적인 삶은 늘 지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예배하는 생활을 통해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5).

 

예배는 하나님과 관계를 지속하는 일이다.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요,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내 삶을 고치고, 영적인 삶을 새롭게 한다.

 

라틴어로 제사장을 ‘폰티펙스’라 부른다. 그 뜻은 다리를 놓는 사람이란 뜻이다. 제사장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주는 사람인 것이다.

 

개신교회에서는 제사장만이 아니라 누구나 예배자이다. 과연 나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다리를 놓고 있는가? 다만 설교 소비자, 습관적 예배 참여자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릭 워렌은 “제1차 종교개혁이 믿음(believe)에 관한 것이었다면 오늘 필요한 종교개혁은 삶(behavior)이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3)

 

베드로전서를 읽으면서 여전히 박해와 고난 속에 살고 있는 현실을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지금도 아랍권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시리아에서, 레바논에서, 이집트에서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가능할까?

 

 

나는 팔레스타인에 사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2006년에 처음 들었다. 그해 서울에서 세계감리교대회가 열렸는데 초청을 받은 팔레스타인 지역 멜카이트교회 차코르 대주교가 방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스라엘과 레바논 사이 분쟁 때문이었다. 유대교 이스라엘과 기독교 레바논 사이 분쟁은 아주 오래된 역사이다.

 

차코르 대주교는 참석을 못하는 대신 이런 편지를 보내 양해를 구하였다.

 

“부디 우리 교구 성도들과 함께 해야 하고 돌봐야 하는 저의 입장 때문에 세계감리교 대회에 불참한 것을 용서해 주시고, 지금 여기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사람들을 위한 기도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과의 우정을 잊지 말아 주십시요. 세월은 흘러가고 여러분들 중 몇몇 아니 모두를 이곳 갈릴리(부활의 땅)로 초정하는 명예로운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지금도 위기가 계속되고, 고난이 끝없이 이어지며, 평화가 정착되기까지 요원해 보이는 갈릴리로 우리를 초대하였다.

 

우리 교회가 대림절 입례송으로 팔레스타인 찬송가 ‘평화의 하나님’을 부르는 배경이다.

 

사실 사람들에게 외적인 고통만이 고통의 전부는 아니다.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 장애를 입은 사람, 성장통을 앓는 젊은이, 관계의 파괴를 겪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이 있다.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한 심리치료사가 자기 손자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다.

 

전신마비가 된 할아버지는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하나는 ‘문제집’으로 대하는 것이다. 푸는 즐거움이란 없고 넘길수록 팍팍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보물상자’로 여기는 것이다. 놀라운 선물이 켜켜이 쌓여있다고, 열면 열수록 감사할 일이 가득하다고 하였다.

 

신앙도 인생도 마음가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백번 말해도 모자람이 없다. 세상살이가 고달프지만, 사랑만큼 귀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고통을 겪는 손자에게 힘들 때면 비상깜빡이를 켜도 괜찮다고, 현실적인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사도 베드로는 고통을 겪는 그리스도인에게 그럴수록 신령한 양식을 먹고, 신령한 삶을 살고, 전 생애를 통해 신령한 예배자로 살라고 권유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가 되고, 기본기를 훈련하는 일이다.

 

내 삶을 바꾸려고 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깊고, 지혜롭고,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원하는가?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인답게 리모델링하라. 늘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라. 성령의 도우심을 빌라.

 

신령한 세 가지는 내 삶, 내 영혼과 관계있다. 영적인 삶뿐 아니라, 세상의 삶 즉 가정, 일터, 인간관계, 내 생각, 내 소망, 내 죽음까지도 간섭할 것이다. 신령한 세 가지는 내 삶의 영적 부흥, 내면의 화해 그리고 진실한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신령한 집을 이루어가며, 신령한 제사를 드리기를 그리하여 거룩한 공동체로 자라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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