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새벽에 드리는 ‘고난기도회’(수)
“굿모닝!”
⁋ 묵상- 사 53:7-9
⁋ 찬송- 251장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 기도- 최봉호 집사
⁋ 성경- 마가복음 2:13-17
⁋ 말씀- ‘의인과 죄인’
⁋ 주기도문
고난주간 수요일이다.
오늘은 세월호 11주년이다. 여전히 슬픔과 아픔 속에서 살아가는 유가족과 우리 국민 모두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을 빈다.
이 땅에서 사회적 재난이 더 이상 없도록 우리 모두가 건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난주간 수요일의 경우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행적이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과 갈등이 점점 깊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사람들에게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고, 그 복음을 믿으라고 초대하셨다.
예수님의 초대는 의외의 인물도 해당되었다. 세관 앞을 지나가던 길에 알패오의 아들 레위, 곧 마태를 부르신 것이다.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14).
마태를 부르셨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채 살아 온 바로 그런 사람까지 부르셨다는 의미이다. 세리는 당시 죄인 취급을 받았다.
부르심을 받은 세리 마태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친구들도 불러들여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나누려고 하였다. 이제 다른 세리와 죄인들도 모여들었다.
이것을 보고 당시 의인을 자처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제자들에게 비난하였다. 당신의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불순하다는 것이다.
세리는 누구인가? 어느 지역의 세무업무를 임대하여, 관리하는 사람들이다. 돈 내고 돈 먹는 야바위꾼 같아서, 도둑이나 강도 취급을 받았다. 무엇보다 이방인인 로마 점령군을 섬기고, 또 비유대인들과 숱하게 접촉했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들로 통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죄인들까지 하나님 나라 한가운데로 초대하셨다. 세리들과 친구처럼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가르쳤다.
이것을 보고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반발하였다. 자칭 경건한 사람들은 그들을 멸시하고 미워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대별된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의 식탁을 거부하였다. 하나님 나라와 그 복음을 외면하였다.
그들은 자기 의로움을 위해 율법을 필요로 했지만, 죄인과 달리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리의 경우는 달랐다. 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필요로 하였다. 예수님은 자기가 죄인이라고 여기며 살던 그들을 진심으로 받아 주셨다. 그들은 예수님이 찾으시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필요한 죄인들이었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파스칼은 두 가지 인간이 있다고 말하였다.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다.
의인은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면서 죄인들을 배척하였다.
그들과 친교도, 왕래도, 거래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부정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향해 비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
예수님을 거절하고, 비난하고, 혐오한 이유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마치 한 통속처럼 지내셨다. 예수님은 지극히 편파적이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
당시 죄는 이중적이었다.
세속법을 지키지 않은 경우와 율법을 어긴 경우가 같이 취급 받았다. 살인한 자도 죄인이지만, 돼지고기를 먹는 자도 죄인이 되었다. 도둑질한 자도 죄인이지만,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은 경우도 죄인이었다.
과연 누가 죄인을 초대하였는가?
누가 죄인들과 같이 밥을 먹는가?
누가 죄인들과 친구가 되는가?
누가 죄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는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17).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종교적으로 선하다고 여겼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율법적으로 의인이라고 자부하였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관습적으로 완전하다고 생각하였다.
문제는 그런 생각 때문에 예수님에게 아무런 기대와 바램이 없었다. 율법이 아닌 은혜로 구원받겠다는 생각은 아예 안중에 없었다. 그들에게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반대로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를 맞이하고 환영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사회적 관습으로, 구원받지도 인정받지도 못하였다. 스스로 결핍된 자들, 죄인, 실패자, 루저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처지를 뒤집고 싶었다. 병든 삶, 죄인의 인생이 고침 받고, 치유 받고, 새로운 삶을 원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맞이하였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이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향해 문을 여는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겸손히 병자와 죄인의 자리에 설 것이다. 그것이 은혜의 자리였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귀를 열고, 눈을 열고, 마음을 여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자기 죄를, 자기 아픔을, 자기 상처를, 자기의 결핍을 안다.
그리고 고침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그의 삶은 새롭게 변화할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오늘의 교회는 어떤가?
스스로 의인과 건강한 사람으로 자처하고, 자부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 자신의 허물을 모르고, 병에 대한 자각증세조차 못하는 병든 의인들의 모임이 아닐까? 자기의 죄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으니 예수님은 얼마나 답답해 하실까?
복음의 원리는 정반대이다. 병든 의인이 아니라 건강한 죄인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역설적이다. 교회는 건강한 죄인의 공동체여야 한다.
건강한 죄인으로만 병든 세상을 고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는 자가 차지한다.
하나님의 평화가 거룩한 고난주간 동안 여러분의 마음을 지켜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