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기(熱氣)
김현식
1)대학입학 후 첫 여름방학 때였다. 방학 동안 용돈 벌이로 사촌 형이 운영하는 환풍구 설비업체에서 일했다. 동작 버튼을 누르면 굉음을 내는 간이 절단기가 회전했다. 철판 위 표시해 둔 선을 따라 철판을 자르고, 조각들을 고무망치로 두드려 뀌어 맞췄다. 무더웠다. 보호 안경과 두꺼운 작업복, 무거운 안전화로 땀 범벅이 된 몸피, 대형 선풍기 바람으로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갯바람으로도 식혀지지 않는 공장의 열기 속에 예정된 근무 기간을 채웠다. 방학이 끝날 무렵 고향 집에 가 근처 큰 집에 들러 사촌 형에게 줄 더덕구이를 챙겨 오던 버스 길이었다. 공장 열기에 비하면 에어컨 바람 부는 시외버스 안은 시원했다.
2)리넨으로 만든 흰 치마, 은빛 도는 금속 허리띠, 바다색 머리띠를 한 그녀가 시원한 바람과 함께 옆에 앉았다. 벌어져 있던 내 다리는 가지런해졌고, 혹여 어깨라도 닿을까 싶어 자세를 고쳐 잡고, 몸을 되도록 창 쪽으로 기댔다. 왠지 모를 기분 좋은 열기로 달아오른 얼굴을 버스 창밖으로 고정한 채, 머리로는 뒷줄에 빈자리도 많은데 굳이 좌석번호대로 옆자리에 왜 앉는 걸까 하며 그녀의 속내를 추측했다. 결론은 ‘내가 별로라 여겼다면 옆에 앉진 않았을 거야. 적어도 싫진 않다면 한번 말 걸어 보자.’였다.
3)도착지까지 가는 동안, 한 번만 쉬는 휴게소에 내려서 서로 말문 트는 데 괜찮을 만한 간식을 찾았다. 생각 같아선, 캔맥주와 구운 오징어포를 나누고 싶었지만, 초면에 그럴 수 없는 일. 아이스크림 두 개를 샀다. 버스 안에서 먹기 불편하진 않을까 싶어 망설였지만, 텔레비전 광고 속 산토리니 골목을 지나 해변으로 달리던 광고모델 같던 그녀에겐 아이스크림이 어울렸다.
4)아이스크림 두 개를 들고 버스에 올랐을 때 이미 그녀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버스엔 다른 손님 몇 명도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해변으로 달려온 그녀만을 위해 수줍게 다가가 아이스크림을 내밀며 말했다.
“더우시면, 이거 하나 드실래요?”
그녀의 입, 눈, 눈매, 코는 서로 다른 메시지를 던지는 듯했다. 입꼬리는 양옆으로 올라가며 오케이 신호를, 눈매는 미간 쪽 꼬리가 살짝 들리며 노 신호를, 눈은 깊고 맑은 동공이 더 커지며 오케이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마른 침 삼키며 듣게 된 그녀의 대답.
“괜찮아요.”
5)그녀의 괜찮음은 나의 불편함이었다. 이후 나는 종류가 다른 열기에 시달렸다. 보이지 않든 버스 승객들이 뵈었고, 버스 기사가 외치던 출발할 테니 착석하라는 말에 양손에 든 아이스크림과 함께 방향을 잃은 내가 보였다. 엉겁결에 버스 뒤쪽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국도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올라탄 버스는 시원스레 달렸지만,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 두 개를 꾸역꾸역 먹어도 나를 휩싸던 열기는 식지 않았다.
6)무심한 버스와 그녀는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뒷좌석에 구겨져 있던 나는 승객이 다 내릴 때까지 기다려 마지막으로 내렸다. 고맙다는 말을 남기며, 버스에서 내리는 데 운전석 거울 너머로 버스 기사의 희미한 미소가 보였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겨우 터미널을 벗어나 지하철에 탑승할 무렵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앗, 더덕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