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김현식
1)날이 더워지고부터 선풍기 바람에 딸아이 머리칼을 말렸다. 졸린 척 눈을 감은 턱을 손으로 받쳐 들고 젖은 머리칼 사이로 손과 마른 수건이 분주히 오갔다. 손바닥에 닿는 물기가 점점 사라져 갔다. 정도껏 치는 장난은 받아 줄만도 하련만 턱에 힘을 주고 바람에서 멀어지는 아이를 보자 순간 화가 치밀어 언성이 높아졌다.
“ 똑바로 하라고.”
2)내 말에 고개를 바로 세웠지만, 이후 내가 하는 말에 딸은 응답하지 않았다. 삐쳤다는 테는 눈 마주치지 않기, 대답 안 하기로 내곤 하는 아이였다. 정도가 심할 경우는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했다. 잠을 잔다며 토라져 누운 아이에게 다가가자 눈짓으로 선을 그으며 그 선을 넘지 말라고 했다. 이럴 땐 선을 지켜 주는 수밖에 없었다.
3)아이가 뒤척였다. 심술로 누웠지만, 정작 잠은 안 오는 거였다. 나는 자는 척 팔 배게 하던 손을 펴고, 손끝으로 살짝 아이 발바닥을 콕 찍어 보았다. 아이는 볼멘소리로 하지 말라니까 나 화났어라 했다. 한 참 뜸 들인 후, 작은 소리로 어떻게 하면 우리 □□이 화가 풀리지 라는 말에 몰라란 답이 돌아왔다. 아이 기분이 반쯤 풀린 듯했다. 이젠 말이 오가고 있으니.
3)좀 더 기다려 주자 아이가 먼저 말해 왔다. 아빠가 정말 진심을 담아 사과할 마음이 있다면 ‘미안해’란 말 백 번 해달라고 했다. ‘미안해’라는 말 한마디에 오른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열 번 말하고 왼손가락도 하나씩 접어 숫자를 보여줬다. 백번쯤 말했을 때 아이 하얀 앞니가 어둠 속에 빛났다. 재미가 들린 모양이었다. 이번엔 ‘사랑해’란 단어를 주문했다.
4)같은 방식으로 말해 주는데 ‘사랑해’를 빨리 말하다 보니 아이 귀엔 ‘사랑해’가 ‘스랑해’로 들린 다 했다. 제대로 해 달라고 재주문했다. 나는 다섯 번 말하고 한 번 숨 쉬며, 정확히 백 번의 ‘사랑해’를 먹여 주었다. 주문한 ‘사랑해’로 부족했던지 이번엔 천 번 말해 달라 했다. 숫자를 셈하며 천 번 말하기는 힘들고, 눈감으면 계속 ‘사랑해’를 먹여 주겠다 했다.
5)‘사랑해’를 다섯 번씩, 네 번씩, 세 번씩 횟수를 줄여 가며 말할수록 ‘사랑해’란 말이 깊어졌다. 마지막으로 한 음절씩 천천히 소리 내어 말했다.
“사~, 랑~, 해~”
말소리가 아이 귀뿐 아니라 내 귀에 울려 퍼질 때 깊고 넓은 바다를 유영하는 나와 아이가 보였다. 그 바다의 이름.
‘사랑해’
엷은 미소로 잠든 아이를 보며 뜻 모를 무엇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