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바꾸기
전선현
(1) "사는 게 재미없어"
앞에 앉은 친한 언니의 한마디에 콜라를 들이켜려다 나도 멈칫했다.
“실은 나도 그래. 계속 축 처져.”
나도 조그맣게 대꾸했다. 구름이 머리 위까지 내려와 있었다. 유리창 밖도 회색빛이었다. 나 역시 책 반납하라는 문자에 겨우 몸을 일으켜 도서관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둘째 유치원 시절부터 알고 지낸 그녀. 아이 키우는 동안 늘 초롱초롱한 눈으로 각종 정보를 명랑하게 나누어 주곤 했는데 이렇게 마주 앉아 열정이 식어버린 삶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을 줄은 몰랐다.
(2) 간호조무사와 보험 설계사로 두 개의 직업을 감당하니 힘든 것 같았다. 그러다 다시 그녀는 내게 보험 상품을 설명했다. 아예 옆으로 와서 서류에 검은 볼펜으로 줄을 치며 짚어주었다.
암, 심근경색, 골절…. 심각한 병명들이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의 삶에 벼락 치듯 내리면 어쩌지…. 그새 하늘은 더 어두워진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칼은 조금 뻗쳐있었고 입꼬리는 내려가 있었다.
“그래, 우울은 우울이고, 할 일은 해야지. 나 애 낳을 때 빼고 입원한 적 없는데 보험료도 적게 나오지? ”
내가 대답했다.
(3) 다음날 만난 지인은 올해 첫 아이가 고3이었다.
“한 6개월만 사라졌다 오고 싶어요.”
그녀의 입에서 조그맣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첫아이 고 3 시절이 떠올라 나도 그녀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때는 쉴 새 없이 기분이 오르내렸다. 일이 없어도 마음 날씨는 시시각각 변했다. 눈을 감고 좋은 결과를 빌고 있으면 막무가내 떼쓰는 아이가 된 것만 같았다. 마음의 구름까지 걷을 수 없었다.
(4) 불쑥불쑥 마음의 하늘에는 번개도 쳤다. 그럴 땐 생각 없이 SNS를 들여다보곤 했다. 아침 다섯 시 기상, 하루 한 페이지 읽기, 하루 3km 달리기, 다양한 챌린지를 하며 행복해하는 얼굴들 보면 활력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다 치매 초기 어머니와 하루 천 번 감사를 시작했다는 사연을 보게 되었다. 어떤 기대나 흥분 없이 덤덤히 사실만 이야기하는데 나도 모르게 핸드폰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한쪽 손으로는 '좋아요'를 눌렀다.
(5) 인터넷 상점에서 계수기를 주문했다. 파란 원통 모양의 위에 붙은 버튼을 누르면 앞면 숫자판에 숫자가 바뀌었다. ‘감사합니다.’ 한 번 말하고, 버튼 한 번 누르기. 그냥 단순하게 감사합니다만 되뇌면 됐다. 이거라도 해보자 싶었다. 매끈한 플라스틱을 만지고 있으니 새로운 일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6) 나는 짬을 내 공원에 갔다. 주머니 속에서 엄지손가락으로 계수기를 누르며 감사합니다라고 읊조렸다. ‘감사할게 뭐가 있지?’ 다음번 감사합니다로 넘어가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의문이 솟았다. ‘억지 감사라도 의미가 있다고?’ 하기로 했으면서도 생각은 잘도 피어올랐다. 또 한편에선 아들을 위해 엄마로서 좋다는 거, 이것도 못 하나 싶었다.
(7) 100번, 200번 자꾸 하다 보니 어느새 감사합니다는 리듬을 타고 술술 기계처럼 나왔다. 미신 같고 헛수고 같았는데 1000이라 찍힌 숫자를 보자 숨이 뱃속까지 내려갔다. 바람이 나뭇잎을 들추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먹구름이 걷힌 것 같았다.
(8) 횟수를 거듭할수록 내 마음에 맑은 날이 많아졌다. 마음도 무게를 잴 수 있는 걸까.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그렇게 수능 날 김밥 도시락을 가방에 담을 때도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지인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나와 헤어진 날 바로 시작했다고 했다.
(9) 북쪽에서 내려온 차갑고 습한 구름과 남쪽에서 올라온 덥고 습한 구름이 장마전선을 만들 듯, 내 마음의 날씨는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말과 주변의 말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주변의 말은 바람 같았다. 언제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감사를 읊조릴 때, 바람이 먹구름을 데려오진 않았다.
(10) 그런데 잊고 지냈다. 입시라는 폭풍이 지나고 평온한 날들이 지속되는 사이 나는 더 이상 감사에 매달리지 않게 되었다. 절박함이 사라지자 나도 모르게 계수기를 서랍에 넣은 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먹구름이 몰려왔다. 입가에 늘어나는 주름살을 보며 한숨 쉬는 날이 늘어났다.
(11) 집으로 돌아와 계수기를 꺼냈다. 마침 전화가 왔다. 친한 언니의 목소리도 훨씬 밝아져 있었다. 나는 계수기를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햇살을 안은 나뭇잎이 살랑거렸다. ‘감사합니다.’ 마음에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