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기억하는 방법
전선현
(1) 대곡역에서 서해선을 탔다. 서해라는 이름과 바다 향해 달리는 상상을 했다. 깊은 지하를 통과해 달리다 초지역에서 내렸다. 안산 산업 역사박물관을 가려는 참이었다. 역 근처엔 고층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단지 둘레엔 키 큰 나무들이 울창했다. 도로는 8차선이었다.
(2) 긴 건널목을 건넜다. 조금 걸으니 너른 공터가 펼쳐졌다. 개망초꽃이 만발했다. 노란 나비, 흰 나비, 나비 여러 마리가 이 꽃에 앉았다 저 꽃으로 날아갔다. 꽃은 끄떡도 없었다. 햇살도, 나비도 다 받아 주고 있었다. 나비 날갯짓에 햇빛이 떨리는 걸 한참 바라봤다. 나비의 보드라운 날개옷은 빛났다.
(3) 박물관 3층 건물 앞에 유리 격자 벽이 반원 모양으로 세워져 있었다. 투명한 유리를 통과해 파란 하늘이 내려왔다. 실의 여정이라는 기획전이 1층에서 열리고 있었다. 전시실 바닥도 반짝반짝 윤이 났다.
(4) 전시는 누에고치에서 시작됐다. 화면에는 손가락 길이의 하얀 누에들이 부지런히 뽕잎을 갉아 먹고 있었다. 헤드폰을 썼다. 칠월에 내리는 소낙비 소리가 밀려왔다. 귓속을 초록으로 씻어내는 듯한 소리. 누에가 뽕잎 먹는 소리가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에 들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고개 끄덕이며 헤드폰을 벗었다. 누에가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드는 영상도 있었다. 몸에서 투명한 실을 뽑았다. 빨라서 몸 어디에서 실을 뽑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투명한 실은 쉴 새 없이 빙글거리다 눈처럼 하얀 고치가 되었고, 누에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5) 철 다리미, 재봉틀, 방직 기계 등이 깨끗이 닦여 가지런히 전시실에 놓여 있는 것이 유물을 전시해 둔 듯했다. 전시는 로봇 팔이 수를 놓고, 옷감을 옮기는 현재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완제품들은 매끄럽고 아름다웠다. 마치 내가 막연히 품고 있던 검은 연기 내뿜는 공장 기억이 잘못된 듯 여겨졌다. 어리둥절했다.
(6) 그 완제품들 사이에 친숙한 옷감 인견도 있었다. 레이온, 비스코스, 모달, 리오셀...등의 이름으로 옷 꼬리표에 쓰여 있던 이름, 그러나 그에 대한 설명은 서너 문장밖에 없었다.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7) 그런데 내 혀끝에서 ‘원진레이온’이라는 옛 기사 제목이 맴돌았다. 오래 전에 알던 이야기라 내용이 가물가물 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검색해 보았다. 레이온이 석유로 만든 인공 섬유인 줄 알았다. 그러나 화면에 뜬 것은 내가 막연히 짐작했던 것보다 무거웠다. 이황화탄소. 그 단어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산화탄소로 읽었다. 다시 보니 이황화탄소였다. 나무를 부드럽게 만드는 약품이, 어떤 사람들의 신경을 망가뜨렸다는 사실을. 손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매일 걷던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8) 미안했다. 한숨 쉬며, 뻑뻑해진 눈을 문질러 보았다. 부드러운 실을 뽑았지만, 뽑은 이의 인생은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나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 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를 살펴 보았다. 답답함에 다시 검색창을 열었다. 지금은 예방하는 법이 생기고, 코 없는 로봇 팔이 그 작업을 대신한단다. 죄책감 없이 입어도 된다고 했다. 정말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될까.
(9) 하지만 나는 부드럽고 반짝이는 옷감이 내 손에 닿기까지 거쳐와야 했던 가시덤불을 생각했다. 내 안락한 일상을 단단히 받쳐주던 손들. 매끄러움 뒤에 베이고, 데이고, 꿰매진 시간.
(10) 잠시 눈을 감았다. 들어오며 보았던 나비들 날갯짓이 맴돌았다. 나비 날개옷이 부러웠다. 나는 자꾸 입고 있던 티셔츠 자락만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내 옷이 너무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