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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빛문우회

무거운 옷자락 ( 수정본)

작성자전선현|작성시간26.06.22|조회수18 목록 댓글 0

 

 

무거운 옷자락

 

전선현

 

 

(1) 초지역에서 내려 안산 산업 역사박물관에 갔다. 실의 여정이라는 기획전이 1층에서 열리고 있었다.

(2) 전시는 누에고치에서 시작됐다. 화면에는 손가락 길이의 하얀 누에들이 부지런히 뽕잎을 갉아 먹고 있었다.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에 누에가 뽕잎 먹는 소리라는 설명을 보며 헤드폰을 썼다. 칠월에 내리는 소낙비 소리가 밀려왔다. 귓속을 초록으로 씻어내는 듯한 소리.

(3) 누에가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드는 영상도 있었다. 몸에서 투명한 실을 뽑았다. 빨라서 몸 어디에서 실을 뽑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투명한 실은 쉴 새 없이 빙글거리다 눈처럼 하얀 고치가 되었고, 누에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4) 철 다리미, 재봉틀, 방직 기계 등이 깨끗이 닦여 가지런히 전시실에 놓여 있는 것이 유물을 전시해 둔 듯했다. 전시는 로봇 팔이 수를 놓고, 옷감을 옮기는 현재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다. 완제품들은 매끄럽고 아름다웠다.

(5) 그 완제품들 사이에 친숙한 옷감 인견도 있었다. 레이온, 비스코스, 모달, 라이오셀. 등의 이름으로 옷 꼬리표에 쓰여 있던 이름, 그러나 그에 대한 설명은 서너 문장밖에 없었다. 레이온이 석유에서 뽑아낸 실로 만든 것인 줄 알았는데 나무에서 뽑는다 했다. 레이온, 레이온,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6) 문득 원진레이온이라는 옛 기사 제목이 떠올랐다. 오래전에 알던 이야기라 내용이 가물가물했다. 나는 검색창을 열었다. 원진레이온은 한국 인조 섬유 공장이었고, 거기서 최악의 산업재해가 발생했다. 실을 뽑기 위해 나무껍질을 벗기고, 나무속을 짓이겼다. 나무 속을 부드럽게 만들려고 이황화탄소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 이황화탄소는 독성물질이다.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그것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집단 중독됐다.

(7) 이황화탄소. 그것이 사람들의 몸과 정신을 산산이 조각냈다. 사람들 신경을 마비시켰다. 중독으로 손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매일 걷던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나왔다. 생명까지 잃었다. 부드러운 실을 뽑았지만, 뽑은 이의 인생은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8) 그 사태가 있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세상에 매일 새 옷들이 쏟아져 나온다. 나는 작년에 저렴하게 산 여름 티셔츠 여러 장을 올해는 외출용으로 입지 않게 되었다. 이미 새로운 디자인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9) 답답함에 다시 검색창을 열었다. 지금은 예방하는 법이 생기고, 코 없는 로봇 팔이 그 작업을 대신한단다. 죄책감 없이 입어도 된다고 했다. 정말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될까. 부드럽고 반짝이는 옷감이 내 손에 닿기까지 거쳐와야 했던 가시덤불을 생각하니 괜찮다는 말이 미덥지 않았다. 내 안락한 일상을 단단히 받쳐주던 손들. 매끄러움 뒤에 베이고, 데이고, 꿰매진 시간.

(10)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매끄럽고 아름다운 것들이 좋다. 새 계절에 새 옷 한 벌 입는 것이 삶의 큰 낙이다. 그날따라 전시실 바닥은 유난히 반짝였고 에어컨 바람은 적절하게 시원했다. 그 속에서 완제품은 매끄럽고 아름다웠다.

(11) 잠시 눈을 감았다. 나는 문명의 흐름에 떨어져 나와서 한순간이라도 살아낼 수 있을까. 과거와 멀어진 현재에 서서, 입고 있던 티셔츠 자락을 만지작거리는데 어쩐지 무겁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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