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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역사 7월1일

작성자.掉先(五常)|작성시간26.06.08|조회수79 목록 댓글 0

오늘의역사 7월1일 


2003년 7월 1일.. 청계천 복원공사 기공식- 청계 고가 철거 시작
청계고가 철거작업이 2003년 7월 10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사진은 청계8
가 고가도로 상판이 철거되는 모습이다.

2003년 7월 1일, 1976년 완공돼 서울 근대화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던 청계고가
도로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로써 
2년 3개월의 대역사(大役事)가 시작 되었다.
하늘에는 ‘경축 청계천 복원공사’ 
는 애드벌룬이 떴고,
청계고가도로의 마
지막 모습을 보려는 시민들이 오후부터 몰려들었다.




🌻오늘의역사 7월1일 🌻


🌿02년 군악교사 에케르트, 한국어 찬송가 출판
🌿05년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 한국중앙은행으로 발족
🌿08년 의병장 이강년 체포됨
🌿09년 구세공보 창간. 처음에는 구세신문이라는 제호로 발간.
🌿29년 조선저축은행 설치
🌿31년 금강산(철원-내금강)전철 개통
🌿38년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 창립.
🌿42년 대구에서 40.0℃ 기록
🌿45년 신탄진 담배 발매 당시가격 50원
🌿48년 국회에서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결정
🌿49년 주한 미군사고문단(KMAG) 발족
🌿50년 연합군 지상부대 부산 상륙
🌿53년 서민호 의원, 군사재판서 사형 언도
🌿55년 워싱턴에서 우라늄 대여 등을 골자로 한 한-미 원자력협정 체결
🌿55년 대천 해수욕장 첫 개장
🌿57년 유엔군사령부, 일본서 한국으로 이전
🌿57년 국제지구관측년 개시
🌿61년 서울국제방송국(HLCA) 개국
🌿61년 재건담배 발매 당시가격 100원
🌿64년 경주 석굴암 복원 공사 준공식
🌿64년 아시아방송연맹 발족, 11개나라 방송기관 가입
🌿67년 의정부시에 경기도 북부출장소 설치.
🌿67년 박대통령 제6대 대통령에 취임
🌿70년 우편번호제 실시
🌿70년 300년 전 진주성도(촉석진도) 발견
🌿71년 한·미 제1군단 창설(미육군 제1군단 해체)
🌿71년 '시문학' 창간
🌿72년 잠실대교 준공
🌿73년 경기도 강화면-읍 승격.
🌿73년 경기도 가평면, 가평읍으로 승격
🌿73년 경기 구리면 (읍)으로 승격되어 양주군에 편제.
🌿73년 경기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
🌿73년 경기도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
🌿73년 제주도 한들굴서 신석기시대 동불 뼈와 무문 토기 발견
🌿74년 거북선 담배 발매 당시가격 100원
🌿76년 한국수출입은행 발족
🌿76년 방송윤리위원회, TV 광고방송에 대한 사전 검열제 실시
🌿77년 부가가치세제 실시
🌿77년 북한, 200해리경제수역 선포(15일 정부는 불인정 발표)
🌿77년 직장 의료 보험제 실시.
🌿79년 밴스 미국 국무장관, 서울회견서 남한. 북한. 미 3당국회담을

제3국을 통해 제의(10일 북한 거부)
🌿80년 국보위, 2급이상 공무원중 232명의 강제해직 발표
🌿81년 대구·인천, 직할시로 승격(광명. 송탄. 동두천등 10개 지방도시 시로 승격)
🌿81년 전두환 대통령, 이광요 싱가포르수상과 정상회담 개최 (2일 공동성명 발표)
🌿81년 사북산동광업소 갱내 메탄가스 폭발 35명 사상
🌿81년 인천직할시교육위원회 (2국 5과)초대 교육감 김천홍 취임
🌿82년 서울 서대문 KAL 빌딩 앞 지하철 공사장 붕괴, 승용차 추락으로 6명 부상
🌿82년 정선군 정동광업소 폭발 7명 사망.28명 부상
🌿83년 부분적 금융자산실명거래제 실시
🌿83년 가전제품 등 305개 품목과 342개 약품 원료의 수입자유화 실시
🌿84년 정부, 긴급과세 대상품목을 38개에서 9개로 줄이고 화장비누 등

14개 품목 조정관세 부과
🌿84년 정부, 공익·공해사업을 제외한 660개 업종에 외국인 투자 허용
🌿84년 화물선 원진호 페르시아만에서 이라크 공군기가 쏜 미사일 2발을 맞고 대파.

선원 4명 부상
🌿86년 김영삼 신민당고문, 전두환대통령.노태우대표. 이민우총재.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 5자회담 제의
🌿87년 국립공원관리공단 발족
🌿87년 전두환 대통령,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담화' 통해 6·29선언 수용 발표
🌿87년 소비자보호법에 의해 소비자보호원 설립 (재정 경제부 산하 특수공익법인)
🌿87년 전국 전화 완전자동화
🌿88년 김종필 공화당 총재, 국회 본회의 대표연설에서 5공비리는 전모를 밝히고 정부는 통일논의를 개방 주장
🌿88년 양담배 수입 전면개방-한국판 아편전쟁-한미 협정 실패
🌿88년 수원시에 2개구 설치(장안, 권선).
🌿88년 대한변협·사법연수원생 181명, 정기승 대법원장 지명 반대 성명
🌿89년 안기부, 서경원 의원 밀입북사건과 관련 문동환 평민당 전부총재의 관련여부등 정치자금조달경위 수사
🌿89년 노점상 대대적 철거 단행-종로등 상대 금지구역 지정
🌿89년 대검찰청, 전대협의 '평양축전준비위원회' 이적 단체 규정,

간부 20여명 등 구속키로
🌿89년 도서지역 의료보험 실시로 전국민 의료보험 시대 개막
🌿89년 제13차 평양 세계 청년 학생 축전 개막(∼7. 8).
🌿91년 정부, 96년까지 외국인투자를 완전개방,내국인 해외투자도

50만달러까지 자유화 5개년계획안 확정
🌿91년 정부, 수도권 5개 신도시 아파트의 종합적인 점검등

200만가구 주택건설 계획을 전면 재조정키로.
🌿91년 건설부, 대한건축학회 주관 신도시 전문시공 평가단 구성,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 현장조사에 착수
🌿91년 서울 충북 제주 교육청, 2학기부터 중학교 에서의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폐지하기로 결정.
🌿91년 목동과 상계동 지역에서 국내 최초의 종합 유선 방송 시범 방송
🌿91년 일반여권 유효기간, 3년에서 5년으로 단일화
🌿92년 신촌 세브란스병원 심장혈관센터에서 수혈 받고 AIDS에

감염된 정 모씨 부부 동반자살 부인 숨져. 자살극
🌿92년 신고된 정신대 피해자는 근로 정신대 235명, 종군위안부

155명 등 모두 390명으로 집계.
🌿93년 국군 기무사령부, 시노하라 日후지TV 서울 지국장이 2급 비밀을

빼내 90년 TV에 보도했다고 발표.
🌿93년 공정거래위원회, 한전 한국통신 데이콤 KBS 등

18개 공공사업자를 독과점업체 지정.
🌿93년 서울지검, 이인섭 전경찰청장을 슬롯머신업자,

기흥골프장사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
🌿93년 서울시, 청와대 궁정동 안전가옥 헐고 「무궁화동산」으로 명 명된

시민공원 조성 개장.
🌿93년 한국과학기술원, 90년 美 텍사스大로부터 기증 받은 핵융합로

「토카막」장치 정상가동 성공 발표.
🌿94년 남북한,판문점 북측지역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 접촉에서 대표단 100명,

취재진 80명으로 각각구성합의
🌿94년 정부, 남북한간에 합의된 `비핵화공동선언' 실천 北ㆍ

美수교를 위한 전제 조건화할 것을 미국 측에 요청
🌿94년 성남기능대학, 승격개편 (산업학사과정, 기능장 과정 운영)
🌿95년 검ㆍ경 합동수사본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관련 李회장 등

4명을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구속
🌿95년 서울에서 오존 경보제 시행.
🌿95년 34년만의 완전한 지방자치 시작
🌿96년 노동부, 실업급여제도 실시
🌿96년 KBS, 위성방송 개시
🌿97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제7차 부지조사단, 대북 경수로 건설예정지

신포지역 조사활동을 마치고 귀국
🌿97년 18세 미만 청소년에게 술·담배 판매를 금지.
🌿98년 서울경찰 파출소 통ㆍ폐합ㆍ신설 (31개서, 516개파출소)
🌿98년 서울소년원 대덕지원 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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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7월1일 유엔군 사령부,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동
미국정부가 1957년 7월 1일자로 일본 동경에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를 해체하고
극동군사령부와 함께 있던 유엔군사령부를 서울로 이전했다.
또한 유엔군사령관이 주한 미8군사령관을 겸임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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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미국 지상군 처음 한국 도착
1950년 7월1일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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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7월1일..의료보험제도 실시
의료보험제가 1977년 7월 1일 국내에서 처음 실시됐다.
실시 첫 해인 1977년에는 상용 근로자 5백인 이상을 고용한
전국 5백2개 기업체와 20개 공업단지 등 모두 5백22개소의
근로자와 부양가족 3백50만명을 대상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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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7월1일...김병현 선수,
미국 진출 4년 만에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올스타 첫 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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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인천항 개항

조선 초기에도 제물포로 불리며 항구로 이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인천항이 본격적으로 항구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강화도 조약 체결로 부산항, 원산항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되면서부터이다. 수심이 얕고 조수 간만의 차이가 커 항만을 건설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와 교통이 편리하다는 점 때문에 개항지로 낙점되었다.


개항 초기의 인천항

1883년 일본인 거류지가 설치되고, 1884년 청나라 거류지, 기타 각국 거류지가 설치되었다. 교역량이 증가하면서 일본인 거류지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일본인 거류민회의 주도로 앞바다를 매립하였다[7]. 이를 시작으로 인천역, 인천세관, 만석동 일대 등에서 대대적인 간척(매립)이 개시되었다.


개항 초기의 인천항


인천항의 본격적인 정비는 러일전쟁 이후 불경기가 찾아오고, 경부선(1905)과 경의선(1906)이 개통하면서 시작되었다. 부산항에서 경부선으로 환적하는 새로운 화물 운송 루트가 만들어지자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차가 커 외항에서 쪽배를 이용해 화물 하역을 하던 인천항의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을사조약으로 일본 제국이 사실상 한반도를 차지하게 되면서 인프라 투자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1908년 인천 거류 일본인들은 인천축항기성회를 세우고, 대한제국 정부와 한국통감부에 적극적으로 청원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비용 문제 때문에 이를 꺼렸지만, 경술국치(한일합방)이 가시화되면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이에 호응하여 축항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이는 인천항을 만주 철도로 연결되는 거점으로 삼고자 하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과 일본 정부의 협의 끝에 1911년 6월 인천항 축항 공사가 시작되었다.

1918년 10월 인천항의 이중갑문식 도크가 완공되었는데, 동양에서는 최초로 건설된 이중갑문식 도크이었다(현 내항 1부두 일대). 비록 갑문을 통과하는데 30분이나 소요되기는 했지만, 이전보다 하역 작업이 훨씬 간편해지면서 하역 수수료도 절반이 되었다. 또한 경인선과 항만이 직접 연결되면서 수출입액이 부산항 다음가는 대외 무역항으로 거듭났다.


1974년 월미도와 소월미도를 잇는 현대식 갑문이 신설되면서 현재의 내항 전체에 선박이 접안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여러번 얼어붙은 적은 있지만 이로 인해 폐항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1963년 기록적인 한파로 인해 개항이래 80년만에 폐항했었다. 2017년 한진해운 파산에도 중소 해운 회사(선사) 중심의 인천항은 거의 타격을 입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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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중국 공산당 결성


중국 공산당 제1기 전국대표대회가 1921년 7월 1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는 여자기숙사학교에서 열려 중국 공산당이 창당됐다. 당원이라고 해야 중국 전역에서 57명뿐이었고, 창당대회도 동필무, 모택동, 장국도, 주불해, 진담추 등 12명뿐이었다. 그나마 대회 도중 경찰의 습격을 받아 회의장소를 옮겨 작은 배 위에서 창당선언을 끝내야 했다. 대회에서는 진촉수를 당서기로, 장국도와 이달을 중앙위원으로, 주불해와 이한준, 유인정을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했다. 창당될 때만해도 오늘과 같은 거대한 집권당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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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1일 연합군 지상부대 부산 상륙


1950년 미국 지상군 처음 한국 도착

(1950년 7월1일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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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혼합의서

애통하구나. 가슴이 미어진다.

  아내는 나와 함께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동고동락해 왔는데

 

  뜻하지 않게 오늘 아침에 나를 배반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버렸으니 슬프다.

  저 두 딸은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여 자랄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말이 나오기 전에 눈물이 흐른다.

  칼을 품고 가서 그녀를 죽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장차 앞길이 있기 때문이다.

  십분 생각하여 용서하고 엽전 35냥(현재 100만원 상당)을 받고

  우리의 혼인관계를 파기하고 보낸다.‘

 

조선시대 이혼합의서 내용이다.

최덕현이란 남성이 배신한 부인을 이혼 합의금조로

엽전 35냥을 받고 보냈단다.

 

이렇게 조선시대 이혼은 쌍방간에 합의만 하면 가능했고

훗날 뒷말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기 위해

이혼합의서는 작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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