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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7월4일

작성자.掉先(五常)|작성시간26.06.08|조회수46 목록 댓글 0

오늘의역사 7월4일

 

 

 

 

1972년 7월 4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자신이 평양에 다녀왔으며 북측과 평화통일
3대 원칙(자주-평화-민족대단결)에 합의했다고 발표한다.
한국전쟁 이후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해 있던 상황에서
남북의 고위당국자가 분단 4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만나고
평화통일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디뎠다는 사실은 국민을 깜짝 놀라게 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남북대화의 물꼬를 틀며
통일을 꿈꾸게 만든 7·4남북공동성명의 역사적 의의를 되짚어본다.
또 이 성명이 나오기까지 격변하던 세계 정세와 남북의 물밑 접촉,
긴박했던 움직임도 돌아본다.
아울러 7·4 남북공동성명이 현재 남북 관계에 시사하는 바를 따져본다


🌻오늘의역사 7월4일 🌻

🌿12년 상해에서 독립 운동 단체 동제사가 조직됨.
🌿50년 구국총련 조직(위원장 조병옥)
🌿50년 미군 선발대 오산 부근서 첫 교전
🌿50년 북, 최고 인민 위원회 상임 위원회, 남한 토지 개혁에 관한 정령 채택.
🌿52년 개헌안 발췌통과 : 경찰이 국회포위, 기립 방식 으로 표결,

대통령 직선제가 163:0 기권 3 으로 가결
🌿61년 반공법 공포.
🌿67년 대학 조기 방학.
🌿72년 7, 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오전 10시, 서울과 평양에서 분단

4반세기 만에 처음-이후락 평양방문
🌿80년 첫 국산 남제주 화력발전소 준공
🌿80년 계엄사, 김대중을 학원 소요 및 광주 민중 항쟁 배후 조종과 내란 음모

혐의로 군법 회의에 회부.
🌿81년 전두환 대통령·프램 태국 수상 정상회담(6일 공동성명 발표)
🌿81년 쿠바, 아바나 국제의원연맹(IPU) 총회에 한국을 초청
🌿83년 남북조절위원회 서울측, 남북한 최고책임자 회담을 북한에 촉구
🌿83년 과학기술처,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기계 연구소와 기업기술지원센터를

신설하기로 결정
🌿83년 제17차 한-중 경제각료회담 개막,관세율 인하 등 합의(서울)
🌿84년 공산품 출고가 인하 러시-전경련,기술혁신 원가절감 다짐
🌿84년 미국신문, 벡텔사 한국전력공사와 체결한 원자력 발전 건설 계약

1600만 달러를 과다 지불 보도
🌿85년 경제기획원, 정년의 단계적 연장 등 제6차경제사회발전5개년

계획안(87∼91년) 마련
🌿86년 문화재관리국 고적발굴조사단, 경주 용강동 고분이 통일신라시대의

왕릉급임이 확인됐다고 발표
🌿87년 김영삼 민주당 총재ㆍ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 시국대처방안위한 6개항을 발표
🌿88년 50개 재야단체 주최, 통일염원 범국민평화 대행진 개최
🌿89년 한국에너지연구소 장인순.박진호 박사팀, 세계 에서 6번째로 경수로형

원자로의 재변환공정기술 개발
🌿89년 임종철전대협의장.전문환평양축전준비위원장, 북한조선학생위원회

공동명의 공동선언문 초안 발표
🌿89년 서울시는 서울 옥수동 재개발지구 민간아파트 투기 당첨자 35명에게

첫 당첨무효 조치
🌿89년 행정개혁위, 3616건의 행정규제중 849건으로 폐지·완화하는

내용의 행정규제 합리화방안 의결
🌿90년 북한, 한반도통일문제 협의키 위한 「민족통일협상회의」 소집을 주장
🌿90년 국어 정보학회' 설립.
🌿91년 대한상의, 3/4분기 (7~9월) 경제성장률이 상반기와 비슷한 8.8%에

이를 것으로 전망.
🌿91년 강경대군 구타치사사건 서울시경 기동대 소속 이형용일경(22) 등

피고인 5명에 대한 첫 공판-연기
🌿91년 대한적십자사, 헌혈한 혈액의 수혈로 인한 AIDS와 간염 감염자에게

최고3000만원까지 보상해 주기로.
🌿92년 상공부는 삼성그룹 계열사인 삼성중공업에 8t이상의 대형트럭생산을 허용.
🌿95년 정부, 대북 지원을 위한 쌀 3500 톤을 실은 벤처호 등 3척을 각각 출항시켜
🌿96년 김수한 국회의장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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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4일...한국 지휘자 정명훈-일본 나루히토 왕세자,
우정의 가교’ 음악회서 공동 연주
한국의 음악인 정명훈(鄭明勳)씨와
일본의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한 무대에서 함께 연주했다.
7월 4일 오후 6시30분 일본 도쿄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 대전시관에서
열린 ‘일한(日韓)우호 특별기념 음악회’가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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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7월4일 을축(乙丑)대홍수.

사망 6백70명

을축년 대홍수로 670명이 사망, 가옥 6363채가 유실됐다.

1925년 7월 4일부터 `을축년

대홍수`라 일컫는 홍수가 시작됐다.

이날부터 9월까지 네차례에 걸쳐

전국을 휩쓸어 6백70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재산피해는 가옥침수 및 붕괴 7만여호,

논밭 유실 약10만단보 등 1억3백만원을 기록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 서울이었다.

1차 (7월9~12일) 와 2차 (7월15~19일)

두 차례 9일간에 걸쳐 서울에 내린

강우량은 무려 7백48.9㎜였다.

한강 수위는 뚝섬 13.59m, 인도교 11.66m,

구(舊)용산 12.74m로 사상최고를 기록했다.

 

서울은 온통 물바다였고 영등포와 용산은

한강 제방이 유실돼 3만여정보가 진흙밭이 됐다.

용산 철도관사들은 1층 천장까지 물이 들어찼으며,

용산역도 침수됐다. 뚝섬은 거의 모든

집들이 지붕까지 침수됐다. 청량리에선 역(驛)으로부터

용두교까지 나룻배로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진풍경을 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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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7월4일... 첫 국산 남제주 화력발전소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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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7, 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오전 10시,

서울과 평양에서 분단 4반세기 만에 처음-이후락 평양방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1972년 7월 4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자신이 평양에 다녀왔으며 북측과 평화통일

3대 원칙(자주-평화-민족대단결)에 합의했다고 발표한다.


한국전쟁 이후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해 있던

상황에서 남북의 고위당국자가 분단 4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만나고 평화통일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디뎠다는 사실은 국민을 깜짝 놀라게 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남북대화의 물꼬를 틀며

통일을 꿈꾸게 만든 7·4남북공동성명의 역사적

의의를 되짚어본다. 또 이 성명이 나오기까지

격변하던 세계 정세와 남북의 물밑 접촉,

긴박했던 움직임도 돌아본다.

아울러 7·4 남북공동성명이 현재 남북

관계에 시사하는 바를 따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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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필리핀, 미국으로부터 독립


필리핀 초대 대통령 마누엘 록사스.

1946년 7월 4일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이 독립했다.

스페인의 식민지배기간까지 포함하면 425년 만이었다.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어 마누엘 록사스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대통령 취임식은 비가

오는 가운데 진행됐다. 취임식에 참석한 수십만 군중 앞에

선 록사스 대통령이 `필리핀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식장에 게양된 성조기가 내려지고

그 자리에 필리핀공화국기인 `태양과 별의 기`가

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게양됐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필리핀 제도를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은 미국은 필리핀을 영구적으로

식민지화 할 생각이 없고 다만 필리핀이 민주적

자치능력이 생길때까지만 지배하겠다고 했지만

이 기간이 36년간이나 지속됐다. 필리핀은 1934년

미 연방의회로부터 자치권을 승인받아 1935년에

발족한 필리핀 연방의 대통령에 케손을 선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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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계엄사, 김대중을 학원 소요 및

광주 민중 항쟁 배후 조종과 내란 음모 혐의로 군법 회의에 회부.

1979년 10월 26일을 끝으로 유신체제는 막을 내린다.

전두환 신군부는 권력의 공백기를 노려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대학가를 중심으로 계엄해제 및 신군부의

퇴진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잦자, 전두환은 5월 초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에게 지시하여 민주화 시위를 제압하고

 

학생시위를 배후 조종하는 정치인, 재야인사,

복학생 등을 강제 체포토록 했다. 한편 재야 정치단체

‘국민연합’은 5월 7일과 16일 각각 ‘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정치일정 구체화'를 정부가 22일까지

실행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80년 3월1일 정부의 2. 29 복권조치로 다시

정치 일선으로 나서게 된 김대중 씨가 동교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최규하 대통령을 만나 국정 전반에 걸쳐

진지하고 솔직한 의견을 교환하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


1980년 5월15일 전국 대학생 10만여명이

서울역에 집결해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한다. 그리고 그날 밤 자정이

다 될 무렵 김대중은 중앙정보부 수사요원들에 의해 남산으로 끌려간다.


비상계엄을 보도하는 신문들.

1980년 5월 들어 대규모로 민주화 요구 시위가 잇달자,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정치활동이 중지되고, 대학은 휴교됐다.

김종필, 김대중 등 26명이 연행됐고 옥내외 시위,

직장이탈, 파업 등은 불가, 언론은 사전검열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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