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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고려인 장군 고선지 장군의 탈라스 전투에 관해서

작성자생원|작성시간26.06.09|조회수80 목록 댓글 0

키르기즈스탄 탈라스(Talas) 지역에서 당나라 군대를 이끈 고려인 출신

고선지(高仙芝) 장군과 이슬람 압바스 왕조 군대 사이에 벌어진 이 전투는

세계사적으로 매우 유명한 탈라스 전투(Battle of Talas)입니다.

탈라스 지역 구글지도  . 검은 띄는 우거진 숲이며 그 안으로 강물이 흐른다.

 

탈라스 지역 구글어스로 보기:

https://earth.google.com/web/search/Talas+stadium++river,+%ec%b9%b4%ec%9e%90%ed%9d%90%ec%8a%a4%ed%83%84/@42.53302859,72.21131353,1212.27005698a,14081.64876405d,35y,0h,0t,0r/data=CiwiJgokCTgX9k_FREVAEc0yc0bLQkVAGX2xeVyzEVJAIerNaJzVDlJAQgIIAToDCgEwQgIIAEoNCP___________wEQAA?hl=ko

 

751년에 일어난 이 전투의 배경, 전개 과정, 그리고 역사적 의미를 정리해 본다.

 

1. 전투의 배경: 동서양 두 제국의 충돌

8세기 중엽, 아시아 대륙에서는 두 개의 거대한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며

서역(중앙아시아)에서 정면충돌할 기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 당나라 (동쪽): 고구려 유민 출신의 뛰어난 장군 고선지를 총사령관(안서절도사)으로 삼아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 압바스 왕조 (서쪽):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 일어난 이슬람 제국으로,

   적극적인 동방 진출을 꾀하며 중앙아시아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습니다.

 

직접적인 도화선은 중앙아시아의 소국인 '석국(오늘날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이었습니다.

고선지 장군이 석국을 공격해 왕을 사로잡고 수도를 약탈하자, 석국의 왕자가 탈출하여

당시 신흥 세력이던 이슬람 압바스 왕조에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압바스 왕조는 이를

기회 삼아 대군을 파견했고, 고선지 장군 역시 당나라 군과 동맹국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우기 위해 진격했습니다.

 

탈라스 강을 따라 흐르는 만년설이 녹은 차가운 물줄기들

 

2. 전투의 전개: 치열한 공방과 배신

두 군대는 현재의 키르기즈스탄과 카자흐스탄 국경 지대인 탈라스강 유역에서

마주쳤습니다.

 

  -. 시기: 751년 7월 (약 5일간 지속)

 

 -. 군대 규모: 당나라 연합군 약 3만 명 vs 이슬람·중앙아시아 연합군 수만 명

    (사료에 따라 수치가 다르나 이슬람 측이 수적 우세였던 것으로 추정)

    초기 며칠 동안은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뛰어난 전술로 팽팽하게

    맞서 싸웠습니다.

 

전세의 역전 (카를루크족의 배신) 전투 5일째 되던 날, 당나라 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인 카를루크(Karluk)족이 갑자기 당나라를 배신하고 이슬람 군의

편에 서서 당나라 군의 후방을 기습했습니다.

전방에서는 압바스 군이 압박하고, 후방에서는 믿었던 동맹군이 기습하자 고선지 장군의

군대는 순식간에 와해되었습니다. 고선지는 필사적으로 퇴로를 열어 극소수의 생존자만을

데리고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탈라스 주 정부청사 전경

 

3. 역사적 의미와 영향 (세계사의 전환점)

탈라스 전투는 고선지 장군 개인에게는 뼈아픈 패배였지만, 인류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엄청난 사건이 되었습니다.

 

① 종이 제조법(제지술)의 서구 전파 (가장 중요한 사건)

전투 과정에서 수많은 당나라 군사들이 이슬람 군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 포로들 중에는 종이를 만드는 기술자(제지공)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슬람 제국은 사마르칸트에 종이 공장을 세웠고, 이 제지술은 이후 바그다드를 거쳐

유럽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이는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의존하던 서양에 엄청난

지식 혁명(르네상스와 인쇄술 발전의 토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됩니다.

 

탈라스 시 어린이 공원

 

②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

이 전투의 결과로 당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세력은 중앙아시아(서역)에서 영향력을 잃고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은 급격하게 이슬람 문화권으로

편입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등이 이슬람교를

믿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탈라스 시 어린이공원 내 건국영웅들 두상 조각품

 

③ 고선지 장군의 역사적 평가

비록 탈라스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고선지 장군은 험준한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서역을 경영했던 '아시아의 나폴레옹'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명장이었습니다.

오늘날 패전지인 키르기즈스탄 탈라스 지역은 고구려 유민의 기상이 유라시아 대륙

한복판까지 떨쳤던 역사적인 장소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고선지 장군의 전투 기념비가 인터넷에 찿아보니 있어서 그 내용을 옮겨본다.

위 내용과 중복 되지만 기념비 세운 내용이라 그대로 사용하였음.

인터넷 사진

 

2021년 5월 27일 키르기스 현지에서는 고선지 장군의 탈라스 전투를 기리는

 '탈라스전투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기념비는  'KF실크로드 프로젝트 컨소시엄'이

키르기스스탄 관광청 및 탈라스 주정부의 지원을 받아 '포클로프카 평원'에 건립하였습니다.

(이 곳에 기념비를 세운 이는 키르기스스탄에서 'KF(Kyrgyz Friends) 실크로드 프로젝트'(이하 KF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국내외 컨소시엄.)

'탈라스 전투'는 서역정벌에 나선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수인 고선지 장군의

당나라 군과 이슬람 세력이 751년 처음으로 격돌한 역사적인 전투이자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양측이 치열하게 맞붙은 전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양 세력이 자웅을 겨룬 '탈라스 전투'는 현재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 접경 지대인

'포클로프카 평원'에서 벌어졌는데 이 전투에서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군은

대패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탈라스전투기념비 (인터넷 사진)

 

이 전쟁 후에 당나라 포로들이 이슬람으로 많이 잡혀 갔고,  그 포로들 중에 종이 만드는

장인들도 섞여 있어 그로 인해 중국의 제지술이 이슬람에 전해지고 결국 유럽에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기념비는 중국으로 대표되는 동양문명과 이슬람 문명을 뜻하는 두 개의 기둥과 3개의

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은 맨 아래부터 지름이 7m, 5m의 바닥과 천정의 1m로

전투가 벌어진 751년을 나타낸다. 천정은 이곳 유목민의 전통가옥인 유르타의 천정인

'툰둑'을 상징하고 있는데 동서양 문명이 한 지붕 아래에 있다는 뜻입니다.

 

"세계 전쟁사와 문명교류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탈라스 전투와 전사들을 기린다"는

비문은 한글, 영어, 중국어, 아랍어, 키르기스어, 러시아어 등 6개 언어로 새겨졌습니다.

 

참고로 ,

KF(Kyrgyz Friends) 실크로드 문화관광 개발사업을 주관하는 단체 및 관련 국가는

한국(대한민국)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의 외교부 산하 무상원조 전담 기관인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민관협력 사업(IBS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습니다.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관 및 협력: 한국의 민간 단체/기업인 '키르기스 프렌즈(Kyrgyz Friends)'가 KOICA와 

협력하여 진행했습니다.
대상 국가: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 농촌 지역입니다.
프로젝트 목적: 키르기스스탄 현지의 문화관광 자원을 발굴·홍보하고 관광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현지 주민들의 일자리 창출과 소득 증대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즉, 사업을 기획하고 예산을 지원·주관한 주체는 대한민국(한국)이며, 사업이 수행된 무대는

키르기스스탄입니다.

 

참조:Gemini Ai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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