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 /이병률
어느 날 모든 비밀번호는 사라지고
모든 것들은 잠긴다
풀에 스치고 넘어지고
얼굴들에 밀리고 무너지고
감촉이 파이고
문고리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는 오래 빈집을 전전하였으나
빈 창고 하나가 정해지면 무엇을 넣을지도
결심하지 못했다
돌아가자는 말은 흐릿하고
가야 할 길도 흐릿하다
오래 교실에 다닌 적이 있었다
파도를 느꼈으나 그가 허락할 만한 세기는 아니었다
서점 이웃으로도 산 적이 있었다
경우에 따라 두텁거나 가벼운 친밀감이 스칠 뿐이었다
오래 붙들고 산 풍경 같은 것은 남아 있었다
중생대의 뼈들이 들여다보이는 박물관 창문 앞을 지나는 길
늘 지나는 길인데
보내고 보내고 또 보냈을 법한 냄새가 따라 붙었다
'여기'라는 말에 홀렸으며
'그곳'이라는 말을 참으며 살았으니
여기를 떠나 이제 그곳에 도달할 사람
출처 : 시집 << 바다는 잘 있습니다 >> 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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