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긴이야기

< 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 > ( 5 ) - 마지막회

작성자색연필|작성시간10.12.10|조회수1,434 목록 댓글 0

 

   0

 

  나는 사생대회 이틀 후, 월요일 아침 조회에서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단 앞으로 가서

  장원 상을 받았어.

  글짓기, 서예, 밴드, 합창, 그림 등 전 분야를 통틀어 우리 학교에서 장원 상을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어.

 

  게다가 4학년이니까 앞으로 2년간 더 많은 상을 학교에 안겨주게 되겠지.

  교장 선생님은 내가 4학년이라는 것, 장원이라는 것을 스무 번도 더 이야기했어.

 

  크레파스 다섯 통, 스케치북 열 권은 혼자 들기에 좀 무거웠어.

  글짓기에서 차하 상을 받아서 앞으로 나온 6학년이 크레파스를 대신 들어줬지.

  나는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는 중에 천천히 걸어서 내가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왔어.

  조회가 끝나고 교실로 들어갈 때 옆에 있던 아이들이 상품을 대신 들어줬고

  나는 상장만 들고 갔어.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흥분한 교장 선생님은 전례가 없이

  그해 학예대회 입상작을 찾아와서 강당에서 전시회를 가지기로 결정했어.

  나는 가보지 않았어.

 

  가서 내 그림을 보는 건 뭔가 창피할 것 같았어.

  그런데가서 그림과 글짓기, 서예 작품을 보고 배워야 하는 아이들은

  입상을 못한 평범한 아이들이야.

  창작의 재능이 없고 겨우 감상만 할 수 있는 아이들인 거야.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일주일 동안 진행된 전시 마지막 날 오후, 나는 강당으로 걸음을 옮겼지. 

  모르겠어.  왜 갔는지.

  강당에는 아무도 없었어. 벽에는 전시 작품들이 걸려 있었어.

 

  글짓기는 원고지 여러 장에 쓰인 작품을 한꺼번에 벽에 압정으로 박아놓고 넘겨가며 읽도록 해놨어.

  차하 상을 받은 동시는 아이들이 넘기면서 침을 묻히는 바람에 글씨가 다 지워지고

  원고지 앞장 아래쪽은 먹지처럼 까매졌더군.

 

  나는 천천히 그림이 전시된 곳으로 걸어갔지.

  내 그림은 맨 안쪽에 걸려 있었어.

 

  입선작 여덟 점을 지나서 특선작 세 점을 지나고나서

  황금색 종이 리본을 매달고 좀 떨어진 곳에,

  검정색 붓글씨로 '壯元' 이라고 크게 쓰인 종이를 거느리고,

  다른 작품보다 세 뼘쯤 더 높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라면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높이에.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 그림은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었어.

  풍경은 내가 그린 것과 비슷했지만 절대로, 절대로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야.

  아버지가 사준 내 오래된 크레파스에는 진작에 떨어지고 없는 회색이

  히말라야시다 가지 끝 앞부분에 살짝 칠해져 있는 그림이었어.

 

  나는 가슴이 후들후들 떨려서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어.

  사방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어.

  나는 까치발을 하고 손을 최대한 쳐들어서 그림 뒷면의 번호를 확인했어.

  네모진 칸 안에 쓰인 숫자는 분명히 124였어.

  124, 북한에서 무장간첩을 훈련시킨 그 124군 부대의 124.

  그렇지만 그건 내 글씨가 아니었어.

 

  누가, 왜 제 번호를 쓰지 않고 내 번호를 썼을까.  실수로? 

  이런 실수를 하고, 제가 받을 상을 다른 사람이 받았다는 걸 알면 가만히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거야. 

  다른 학교에 다니는 아이라서 제 실수를 모르고 있는 거겠지.

 

  아니야. 

  그 그림은 구도로 봐서 내가 그렸던 바로 그 장소에서 아주 가까운 데서 그린 그림이었어.

  그 그림을 그린 아이는 천수기 선생님과 함께 다니던 그 아이인 게 틀림없었어.

  그러니까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라는 거지.

 

  그러면 그 아이는 제가 그린 그림을 봤을 거야.

  그런데 왜? 왜 아무 말을 하지 않은 거지? 상품이 필요없어서?

  실수 때문에 처벌을 받을까 봐?

 

  나라면? 

  나라면 가만히 있었을까?

 

  왜 내가 그린 작품은 입선에도 들지 않았을까?

  비슷한 풍경이고 비슷한 구도인데도?

 

  가만히 그 그림을 보고 있자니 정말 잘 그린 그림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어.

  장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림, 같은 장소에 있었던 나로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부분,

  벽과 히말라야시다 사이의 빈 공간의 처리는 완벽했어.

 

  나는 모든 걸 그림 속에 우겨넣으려고만 했지 비울 줄은 몰랐어.

  그건 나를 뛰어넘는 재능인 게 분명했어.

 

  비슷한 그림에 같은 번호가 써진 걸 보고 심사위원들이 당황했을 거야.

  한 사람이 두 작품을 그릴 수는 없으니 누군가 실수를 했다고 단정 짓고는

  혼동을 초래할지도 모르니까 둘 중 하나는 아예 시상 대상에서 제외를 하자고 했겠지.

  그래서 심사에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고.

 

  그러니까 내 그림은 번호를 착각한 아이의 그림에 못 미치는 그림으로 버려졌던 거야.

  입선에도 들지 못하게 완벽하게.

 

  누구의 생각일까. 

  주 선생님은 아니었어. 심사위원이 아니니까.

  아니, 심사 중에 불려 들어간 것일지도 몰라.

 

  혼란스러워진 심사위원들이 번호를 확인하고 그게 우리 학교 학생의 번호인 줄 알고

  미술반 지도교사를 오라고 했고......

  그래서 그 모든 것이 주 선생님의 조정으로 이루어졌고,

  그래서 이례적으로 주 선생님이 그 결과를 미리 알게 된 것이고......

 

  그런데 나는 주 선생님 품에 안겨서 울었어!

  내가 그리지도 않은 그림을 가지고 상을 탔다고 감격해서, 바보같이, 바보!

 

  나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면서 강당을 걸어 나왔어.

  열 걸음쯤 떼었을 때 강당 문으로 어떤 여자아이가 걸어 들어왔어.

  자주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어. 검정색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지.

 

  나는 그 여자아이를 지나칠 때 눈을 감았어.

  눈을 감은 채 열 걸음쯤 걸어가서 다시 눈을 떴어.

 

  내가 주 선생님을 찾아가서 말해야 했을까.  

  이건 내 그림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고.

  나는 그 사람만한 재능이 없다고. 실수를 바로잡아달라고.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어.

  주 선생님의 품에 안겨 울지만 않았더라도 찾아갈 수 있었어.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내 더러운 눈물로 주 선생님의 앞가슴에 늘어뜨려진 흰 레이스를 더럽히지만 않았더라도.

 

  그림의 주인이 선생님을 찾아가서 그 그림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부정할 도리는 없었겠지.

  하지만 내가 먼저 선생님을, 주 선생님이든 천 선생님이든,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 누구도 찾아갈 수 없었어.

 

  그 뒤부터 나는 늘 나를 의심하면서 살았어.

 

  누군가 나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 나와 똑같은 대상을 두고 훨씬 더 뛰어난 작품을 그렸고,

  앞으로도 더 뛰어난 작품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을 벗어나 본 적이 없어.

 

  그러니까 어떤 작품이라도, 그게 포스터 물감으로 그리는 반공 포스터라도

  내가 가진 능력 전부를, 그 이상을 쏟아 부어야 했지. 언제나, 어디서나.

  그 결과가 오늘의 나일까.

 

  의심의 결과, 좌절의 결과, 누군가 내 비밀을 알고 있다는 생각의 결과.

 

  나는 화가가 된 후 풍경화를 그린 적은 없어.

  나는 그림의 원형, 본질로 돌아갔어.

  선과 원, 점, 그리고 바탕이 되는 사물의 원형.

  본질을 최대한 추상화하고 이상화한 상태로 만들어갔어.

 

  내 모든 색깔의 원형은, 이상은 그날 그 하얀 시멘트 길과 그 위의 흰 햇빛이야.

 

 

   1

 

  어라, 저기 걸어가는 저 사람, 백선규 같네.

  저 사람 도대체 무슨 생각을 저렇게 골똘하게 하고 있을까.

  인사를 해볼까? 

  안녕하세요, 라고 해야 하나?  그냥 안녕이라고?

 

  그러고 나서 고향, 연도, 초등학교를 말하면 알아볼까?

  아이, 귀찮아. 

  그런 걸 하면 뭘 해. 우리는 가는 길이 다른데.

 

  나는 그림을 좋아하고 저 사람은 자신의 그림을 열심히 그리면 그만이지.

 

  점점 멀어지네. 사라졌네. 

  나는 여기에 있고.  나도 곧 가야 하지만.

                                         

                                                                                                       <   끝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