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
당신의 전방향에서 변화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당신이 받았다는 구원 다시 생각해 보라!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그러나 그 구원의 믿음을 가장 정확하게 판별해 주는 척도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그의 행동 지침'에 있다.
이것을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직 믿음, 하나님 절대주권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J.C 라일이라는 감독은
'기도하지 않는 자는 구원 받지 못한다.'고 담대히 주장했다.
어떻게 이런 주장이 가능할까?
그의 글의 짧은 부분만으로도 진정 거듭난 자들은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말 못하는 자녀를 두신 적이 없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우는 것처럼, 기도는 새롭게 태어난 본성의 일부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척도가 더 포함된다.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없는 자도 가짜 구원일 가능성이 크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서신을 보내며 마게도냐인들의 헌금생활을
본으로 내세우며.. 도전했다.
요약하면.. '너희가 하나님 앞에 물질을 사용하는 방법이
너희가 주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의 진실성을 증명'한다(고후 8:8).
하나님께 생명을 다 드릴 것처럼 말하지만 십일조도 드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유는 항상 한결같다.
'하나님은 형편이 어려운 자들에게 물질의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인들은 극심한 환난과 극도의 가난 가운데..
넘치도록 헌신했다. 그 헌신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실만큼 가난해지셨다.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해 진노에 합당한 우리가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자신의 안위를
부인하는 헌신이 자신들과 이웃 형제들에게
'모두' 부요함이 될 것을 믿었다.
경제적 한파가 이미 시작되었다.
모두 움츠러드는 시즌이다.
이 한 파를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은 지금이야말로
믿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순서는 내교회부터 선교지(미자립교회) 그리고 가난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내가 쓸 여유밖에 없는데..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이다.
라일 감독처럼 말하고 싶다. '하나님은 말 못하는 자녀를 두신 적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인색한 자식을 둔 적이 없으시다.'
연약함이라는 것..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어느 영역은 버거워 할 수 있으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기권리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인정하게 된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다.
당신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은 어디인지 점검하라.
그리고 진정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모색하라.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은 영역을 의식적으로 더욱 훈련하라.
(2018.3.15 묵상단편/ 고린도후서8:1~15절)
=================
많은 이들이 칼빈의 신학을 오해하고 있다.
"'예정'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 라는 신학체계가
오늘날 성도들을 영적인 안일함과 나태함 가운데 방치해 둔다"는 주장이다.
(흔한 실수가, 이것을 구원파가 주장하는 교리와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다르다)
그러나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종교개혁의 중심에 있으며..
썩고 부패했던 교회에 다시 생기를 불어 넣은 동력이었다.
물론 보완해 가야할 과제가 있음에도 그것은 단지 인간의 신학체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잃어버렸던 사도바울의 신학을
회복했다는 점에 그 공이 있다.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사실 칼빈신학의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부흥의 중심에 쓰임 받았던
인물들을 살펴보라. 그 중 대부분은 칼빈의 신학을 DNA로 삼는 자들이었다.
최소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을 읽어 보지 않았다면 칼빈의 신학을
평가하는 것은 무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에 기반을 둔 설교자들만큼 확실한 열매를
요구한 일도 드물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스런 헌신이 없는 자들을
가짜로 간주했다.
~~~~~~~~~~
(이환희 목사님의 글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