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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연구 자료

전통적인 구원관(박영돈)

작성자+진리사랑|작성시간20.06.18|조회수12 목록 댓글 0
전통적인 구원관
(박영돈)

구원이나 칭의에 대한 복잡한 논의가 이해하기 어렵고 헷갈린다는 분들이 있어 전통적인 구원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성경에는 구원에 대한 다양한 개념이 등장한다. 중생, 속량, 해방, 새창조, 칭의, 화해, 양자됨, 성화 등이 그런 것이다. 전통적으로 구원의 다각적인 측면을 설명하는 구원의 서정이라는 교리가 있다. 보통 구원의 서정은 소명, 중생, 회심(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됨, 성화, 견인, 영화로 나눈다. 이것은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구별이다.

이 교리는 이 모든 구원의 단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분리될 수 없이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고 본다. 윌리암 퍼킨스가 말했듯이 이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황금 구슬로 꿰어있어 어느 것 하나 전체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한 면만을 구원의 모든 것 인양 가르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구원을 다른 은혜와 분리된 칭의로만 이해할 수 없다. 구원은 칭의 뿐 아니라 중생과 회심과 성화와 영화 등, 구원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렇게 구원의 여러 단면이 긴밀하게 연합되어있지만 특성 상 서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구원의 은혜의 풍성함과 부요함이 밝히 드러난다. 칭의와 양자됨 같은 은혜는 법정적인 반면에 중생과 성화 등은 갱신적인 은혜이다. 이 둘을 아무 구별 없이 뭉뚱그려 칭의가 성화에 따라 진행되고 완성된다고 보면 칭의가 마지막 심판에서 신자의 삶과 행위에 근거하여 취소되거나 확정된다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칭의는 우리의 의로움(성화)이 아니라 전적으로 낯선 의로움(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신 의로움)에 근거한 법적인 선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비록 칭의와 성화는 동시적으로 경험되지만 구별되어야 한다. 성화는 칭의의 전제 조건이나 근거가 아니라 칭의의 열매로 이해해야한다.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구원의 다양한 측면들이 영롱한 빛을 발하는 다이아몬드와 같이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더욱 찬란하게 빛나게 한다.

바울 사도가 말했듯이 부르심을 받은 이는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된다(롬8:30). 우리 안에 구원을 시작하신 이가 구원을 진행하시며 구원을 완성하신다. 구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삼위하나님의 구속사역에 근거하며 성령 안에서 긴밀하게 연합되어있다. 궁극적인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이 당신이 시작하신 구원사역을 반드시 완성하신다는 사실에 있다. 구원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 그리고 그의 영원불변한 사랑에 있다.

은혜의 황금 사슬은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사랑에 닻을 내리고 있고 하나님의 전능한 손에 붙잡혀 있기에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시작되었다면 그 구원이 미완성이나 실패로 끝날 수는 없다. 성령으로 거듭나 회개하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결국 거룩하게 되고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구원의 과정이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성령은 이 구원을 신자의 역할과 상관없이 진행하고 완성하시지 않는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새 언약의 은혜로 신자의 심령을 새롭게 하여 죄를 사랑하는데서 돌이켜 하나님과 거룩함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 죄와 사탄의 속박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거룩한 삶을 살게 한다. 아들의 형상으로 날로 새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진정한 구원이 시작된 사람이라면 중생과 회심의 증거와 열매가 삶 속에 나타나야 한다. 개혁신학과 고백서에서는 모두 이런 면에서 거룩함을 강조한 것이다. 칼빈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등은 신자의 삶을 십계명의 참된 의미를 철저히 지키는 삶이라고 정의할 정도로 거룩한 삶과 행위를 강조하였다.

구원의 시작, 즉 중생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 죄인을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 우리가 기여할 것이 없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구원의 과정에서 신자는 성화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성화마저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하여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고 성령이 내주하기에 그 은혜로 진행된다.

그러나 성령은 신자의 역할을 무시하고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를 자유로운 인격자로서 대우하시며 신자의 노력과 행함을 통해서 거룩함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따라 거룩하게 살라는 신자의 책임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가득하다. 또한 신자 안에 여전히 방종과 나태에 빠질 수 있는 부패성이 도사리고 있기에 이런 육신의 성향을 따라 살지 말라고 계속 경고한다.

따라서 오래 믿노라 하면서도 회개와 거룩함의 열매가 전혀 없는 사람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자위하는 것은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이 이런 식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그 충만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주어야 한다. 구원의 다양한 측면들이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진행되는지를 설명해주어야 한다. 이런 내용에 대한 진술이 생략된 채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란 말만 되풀이하면 값싼 은혜의 복음으로 남용되기 쉽다(이해를 위해 많이 공유해주세요)
~~~~~~~~~
(박영돈님의 페북 글(2017.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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