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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패망의 교훈과 우리나라의 현실!

작성자+진리사랑|작성시간18.04.30|조회수1,656 목록 댓글 0

월남 패망의 교훈과 우리나라의 현실!

 

월남 패망의 교훈

 

이 글은 <월남패망의 교훈> 동영상을 녹취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월남패망 당시와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 비슷함을 보고,

월남 패망을 교훈 삼아 종북좌파 세력에 의해 공산적화통일 위기에 처한

조국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이 글을 국민 앞에 올립니다!

 

 

애국 국민여러분, 좀 길지만 꼭 읽어봐 주시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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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피플"(Boat People)!

 

월남(남베트남) 패망 후 공산정권을 피해 고국을 탈출한 월남인들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속으로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맡긴 채 살아남기 위해

고국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 106만 여명의 월남인들이,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만 같은 운명을 맡긴 채 공산화된 조국을 떠나야만 했다.

 

월남은 우리나라와 너무나 닮은 역사와 모습을 가졌었다.

 

1954년 7월 21일 프랑스가 물러가면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에는 자유 ‘월남’이,

그리고 이북에는 공산정권인 ‘월맹’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1960년 12월 공산월맹의 지원으로 월남 내 공산조직인 ‘월남민족 자유전선’이 설립되어

월남정부에 전면적인 공세를 취하면서 ‘월남전’이 시작되었다.

 

신생독립국 월남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미국은,

1964년 이후 연간 500억 달러를 퍼부으며 53만 여명을 파견,

전사(戰死) 5만 8256명, 부상자 20만 명이라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발을 빼기 위해 1968년 5월 10일 파리에서

월맹과 비밀리에 협상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100만 톤의 식량을 비롯한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대남적화 공세를 멈추지 않았던, 월맹이 평화협상에 나선 목적은,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통해 인민민주주의(=공산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세우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적화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대용’ 예비역 장군(월남 패망 당시 주월 공사)의 증언:

 

“공산당 측에서 평화협상을 제의한 것은

결국은 미국을 내쫓기 위해서 한 것이었죠.

미국을 내쫓으면 공산화 시킬 수 있다. 평화회담을 하기 전에도,

할 때에도, 한 다음에도 무력남침 공산화 전략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변한 것 같아서 거기에 속았죠. 그래서 월남은 망한 것이지요.”

 

월남의 정치 상황은 이러한 월맹의 치밀함과는 대조적이었다.

전쟁이 치열했던 1967년 9월 3일 치러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는,

무려 11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했다. 이 선거에서 패한 야당 지도자 ‘쭝딘주’ 변호사는,

외세 배척 및 우리민족 끼리를 내세우며 동족살상과 월맹에 대한 폭격 금지, 미군 철수,

조속한 남북평화회담 등을 주장했고, 이같은 발언은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여론’(反戰與論)을 자극했다.

 

이대용 예비역 장군의 증언:

 

“(야당지도자 ‘쭝딘주’변호사가 말하기를) 우리끼리 싸움을 해서 말이야,

더군다나 외국군까지 불러들여서 여기가 피바다가 되었으니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시겠는가, 안된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평화협정을 맺어서 평화적으로 남북통일을 해나가겠다. 우리는 한민족이다.

이렇게 자꾸 주장을 하는데 그는 공산당 당원이었던 거야. 몰랐죠.”

 

파리에서의 비밀협상 진행이 알려진 후, 월남 내부에서는 국론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결국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5년여 협상 끝에

월맹에 40억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 등 12개국이 참여한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월맹의 심리전, 월맹 내 사회불안, 미국 내 반전분위기 등에 시달리던 미군은,

월남 야당의 철군주장을 빌미로 1973년 3월 전면 철수하게 된다.

 

미군 철수의 결정적 원인, ‘택토’(월남의 구정 연휴) 공세

 

‘택토’ 공세:

월맹의 기습공세로 미대사관이 점령당하는 등 위기를 맞았으나,

미군의 반격으로 9만명 이상의 월맹군이 사살됨.

 

이대용 예비역 장군의 증언:

 

“미국이 발을 뺀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 대사관이 점령 당하니 말이야 앞으로 아무리 싸워도 끝이 안 나겠구나.

그들이 미국을 내쫓기 위해서 한 것이죠. 월맹군이 결정적 타격을 입었는데도,

그건 전부 외면하고 (좌익세력이 장악한) 신문에서는,

‘미 대사관이 점령당했다, 미군이 몰살당했다’고 (거짓 보도)하니까,

정말 이쪽이 사실은 크게 이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패배하고 있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어 버렸습니다. 다 이긴 전쟁이었는데. 다 평정하고 월맹군이

산악지역에 조금 남아있었는데, 월남 통일을 못하고 미군이 나가 버렸죠.”

 

(월맹군) 13만 군사 중 9만 명 이상을 잃은 채, 미군의 공격을 피해 산악지역으로 피했던 월맹군,

하지만 미군은 월맹군을 완전 섬멸하지 못한 채, 반전여론에 의해 철수하게 된 것이다.

 

철수 당시 미국은 월남과 ‘방위 조약’을 체결하면서,

월맹이 평화협정을 파기하면 해군 및 공군력을 동원하여 월맹에 대한 폭격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하기로 굳게 약속했었다.

더불어 주월 미군이 철수하면서 그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전차와 장갑차 400대,

항공기 700대 등 10억 달러 이상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함으로써

그 무렵 월남의 공군력은 전 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의 남북의 경제력 차이와 미군의 철저한 유사시 지원 약속은,

주월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 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대용 예비역 장군 증언:

 

“(평화협정 체결 후) 티우 (월남)대통령을 만났어요.

월맹이 공격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죠.

‘월맹은 전쟁할 능력이 없다. 너무 가난해서 하루 두 끼도 못 먹는다.

그것도 소금반찬으로 연명하고 있다. 미국이 40억 달러를 원조하기로 했는데

어떻게 협정을 깰 수 있겠는가? 10년 동안은 못 나온다.

그 기간 동안 석유개발 등을 통해 월맹과 격차를 벌여놓으면,

월맹은 끝내 적이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월남에서는 파리에서 체결된 평화협정을 완전히 믿고 있었죠.

협정을 통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고...(착각)”

 

이같은 믿음은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이 월맹을 과소평가하고 총체적 안보불감증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신부, 승려, 언론인, 학생 등 좌익 인사들은

이같은 분위기를 이용해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민중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또한 월남 정부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 내용이

단 하루 후면 반정부 게릴라 단체인 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청사에 보고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부까지 많은 공산 간첩이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

 

1967년 대선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를 비롯해,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와 대통령 비서실장,

월남 패망 당시 사이공 경찰장관이었던 ‘창반만’, 대통령궁을 폭격한 월남 공군대위 ‘구엔타인충’ 등

많은 정치인과 관료, 군인, 언론인, 종교인들이 ‘공산 간첩’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월맹의 치밀한 정보수집과는 대조적으로

월남의 대공 정보력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이대용 예비역 장군의 증언:

 

“쿠데타가 일어나서 정권이 바뀌면 정보기관들이 또 바뀌고 이러다보니

정보기관들이 완전히 무력화 되어 이북(월맹)의 정보가 많은데도

하나도 알아내지 못한 것이죠.”

 

(월남)총인구 2000만명 중 공산당 당원 9500명, 인민혁명단원 4만명 등

0.25%의 좌익 공산세력이 자유월남의 패망을 유도함.

 

좌익공산세력들은 자신들이 장악한 수십 개의 언론사를 통해,

정부에 대한 원색적 비난과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우익 인사들을 ‘무식한 전쟁광’으로 매도하는 한편, 무자비하게 암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 중산층, 언론인 등 다수의 우익들은 침묵을 선택함으로써

결국 소수의 조직화된 좌익들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3월 10일 월맹은 파리평화협정을 파기하고

월남에 이미 오래전부터 침입해 있던 간첩들을 이용해서 주민들을 선동하는 동시에,

18개 사단이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즉각 전쟁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는

티우 대통령의 호소를 외면하고, ‘짠후탄’ 신부와 야당 지도자들은 정부를 비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분열과 총체적 부패 그리고 의욕상실에 빠져있던 월남에게는

이미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군사, 경제력 및 인구 등 모든 면에서 월맹을 압도했던 자유 월남은

결국 월맹의 총공세 이후 50여일 만인 4월 30일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과 경찰은 수용소로 보내졌고,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은 물론,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며 월남 패망에 앞장섰던 ‘짠후탄’ 신부 등

종교인, 교수, 학생 및 통일 운동가들까지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어졌고,

대부분 처형되는 등 수백만 명이 처형 학살되었다.

 

‘리 라닝’(‘베트콩과 월맹의 내막’ 저자)의 증언:

 

“베트콩으로 활동한 월남인들은 모두 숙청되었고

일부는 재교육 수용소에 월남인 적들과 함께 수용해 제거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월남 패망에 앞장섰던 인사들까지 처형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반역) 짓을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였다.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이 행하는 잔인무도한 혁명전술전략이다!

우리나라도 만약 공산화되면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공산혁명 역사상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이 다 그랬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구 소련의 스탈린, 중국공산당 모택동, 북한 김일성 등이 다 그랬다.

 

우리나라의 종북좌익 세력들은 들으라! 당신들도 혁명을 위해 이용하지만

혁명후 용도폐기 되면 없애버리는, ‘토사구팽’ 당한다는 사실을 알라!

공산(사회)주의는 이상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가짜 민주주의요,

진보가 아니라 퇴보요,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망국 사상, 거짓 사상 체계이다!)

 

동양의 흑진주, 제2의 파리로 불렸던 아름다운 항구도시 사이공,

하지만 함락 이후 사이공은 피와 파편이 즐비한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총구 앞에서 목숨을 구하는 자들의 절규, 스스로를 지킬 줄 몰랐던 국민들은,

너무도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렇게 월남이 월맹에 의해 유린될 때,

평화협정 서명국들은 월남국민들의 절규에 침묵으로 대답했다.

 

결국 스스로 지킬 의지가 없는 월남 국민들에게

평화협정과 방위조약은 단순한 휴지조각일 뿐이었다......

.....................................................................................

 

 

 

<월남 패망의 교훈>과 남한의 현실!

 

북(北)대남공작 ‘현지본부’ 서울에 있다?

 

월간지 ‘한국논단’(발행인 이도형)은 2008년 7월호에서

익명을 요구한 전직 정보요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남한에서 활동 중인 하급공작원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느라 북으로 갔던 시대는 지나갔다”면서,

북한의 대남공작 조직이 서울에 있다고 보도했었다.

 

구체적으로 전직 정보요원들은 북한의 대남공작은 김정일->통일전선부작전부가

분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1990년대 들어 남파공작원들이 북한 공작부와 교신한 무선전화는

하루 10만 건 내외였으나, 김대중 시대 들어서는 한 때 하루 50만 건을 넘다가

노무현 시대에 와서는 1만 건 이하로 감소했다고 밝혔다.

 

무선 전화를 통한 공작원들의 대북접촉이 이처럼 줄어든 이유에 대해,

전직 정보요원들은, “인터넷을 통한 e-메일의 활용과 함께 남한 현지 지휘본부가

서울에 설치되고, 북한 정권에서 서열이 20번 내외쯤 되는 거물책임자가

서울에 상주하게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이어 1975년 남베트남 패망 당시 북베트남 대남공작부가 현지 지휘부를

수도 사이공에 두었던 점, 90년대 초 독일 통일 직전까지 서독 정부 산하에

1만 명의 동독공작원들이 있었던 점 등을 예로 들면서,

“남한의 사정은 월남이나 독일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어 구체적으로 “행정,입법,사법,언론,문화 등 각 분야는 물론

심지어 군부와 정보기관에도 공작원들이 침투해 있다”면서

이들이 안주하고 있는 곳은 “각 기관, 시민단체 등 광범위하며

그동안 혁명과업 수행에 바빴다”고 언급했다.

 

‘황장엽’씨(전 김일성종합대학총장, 김일성주체사상을 만든자, 한국으로 망명)의 증언:

 

“한번은 김정일을 만나러 갔는데, 김정일은 자리에 없고

책상에 서류 하나가 있었다. 그 문서는 바로 직전에 진행된

남한 대통령과 장차관들이 가진 국무회의 회의록이었다...

남한에 북한 공작원이 5만 명쯤 있다.”

 

공산주의 혁명이론은 국제적인 매뉴얼을 가지고 진행된다.

그렇기에 각 나라의 공산화는 비슷한 상황으로 진행되며,

베트남에서 발생한 적화가 이곳 남한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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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도 남한이 적화되지 않는 것은 한국 교회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에서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지난 2007년 대선에서 친북대통령이 당선되지 않자,

김정일은 2008년 2월에 남한의 친북단체들을 총괄하는 통일전선부 부장 즉,

우리나라의 국정원급 기관의 장관에게 책임을 물어 총살시켰다.

그리고 '북한은, 베트남은 적화가 되는데, 왜 남한은 안 되는가? 남한은 교회 때문이다.

교세를 10분의1로 줄이면 통일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지저스아미, 2012년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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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패망이 우리에게 남긴 것
<영상: 링크 보세요>
https://t.co/DgJBpudGPM


 

● 공산화 혁명에 앞장 선 종북세력과 종교지도자들의 최후!
(월남공산화 예 등)

(링크 보세요)
https://t.co/lzPjbBN0wp


~~~

 

 

* 공산(사회)주의는 거짓말, 망국 사상!

(아래 링크 보세요!)

http://cafe.daum.net/saintfullgospel/NqOe/1554

 

 

 

      월남 패망 당시 보트 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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