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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리(전CIA요원)의 5*18증언: "5*18은 북한이 계획하고 지휘한 작전이었다"

작성자진리사랑1|작성시간22.05.19|조회수749 목록 댓글 0

☆마이클 리(전CIA 요원)의 5.18 증언:

"5.18은 북한이 계획하고 지휘한 작전이었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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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광주의 진실.......

 

Michael Lee(마이클 리/이명산) 박사님은

CIA에서 40년을 근무 하고 은퇴하신 분으로

그분의 5.18에 대한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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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光州 騷擾 

全 國民 必讀 -  證言

 

1. 누가 그 방아쇠를 당겼느냐?

 

1980년 5월 18일 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시민 들의 무장폭동이 발생하였고,

이 사건을 두고 40년이 넘도록 국내 에서는 그것이 민주항쟁

(Democratic Uprising)이다? 아니다?

북한이 개입한 민중폭동(People's Insurgence)이다, 하며 시비가

계속되고 있는데,

 

결론적으로 단언한다. 

그것은 분명히 북한이 계획하고 지휘한 작전 이었다.

 

사건 경위를 추적하며 시시비비를 따지면서 찬반 양측이 자기들 에게 유리한 대로만

스토리를 전개하고 그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내용만을 선택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은 하나같이 중요한 핵심을 피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발사한 총알이 어디에 맞았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 방아쇠를 왜 당겼느냐? 하는 것이다.

(자위권,정당방위)

 

1979년 후반에 북한에서는 조선노동당의 대남공작 총책이 김중린 이었는데

소위 남조선에 포진되어 있는 혁명역량이,

우리식으로 말하면 잠복간첩들과 동조자들로 구성된 지하세력이,

총동원 되여 남조선 민중봉기에 지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지령을 내렸다.

 

동시에 북한의 특전대인 제17공수여단이 그해 여름부터 치열한 특수훈련에 들어갔는데, 

그 이유는 1980년 여름 이전에 남조선 해방을 위한 대사변이 일어나는데

우선 서울과 마산과 광주에서 동시다발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나고 

남조선 지하에 구축해놓은 혁명역량이 주도하되

표면적으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민주화 투쟁으로 표방하고 이 불길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 인민해방시민군이 북조선에 무력지원을 요청하는 형식을 취하고, 

 

그때 북에서는 제17공수여단과 특전부대를 남파하여 1950년 6.25사변 때 실패한

조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겠다는 것이었다. 

 

해외근무 중에 이 정보를 최초로 접수하고 워싱턴에 보고한 사람이 

바로 필자였다.

 

이 정보를 접수한 미국정부는

1980년에는 남한에서 북한이 계획하고 지휘하는 소요가 있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미국정부는 이 정보를

한국정부와 공유했을 것으로 믿는다.

 

2. 최은희와 황장엽의 증언...

 

그와 비슷한 시기에 북으로 납치되어 간 영화배우 최은희의 증언에도

동일한 내용이 암시되어 있다. 즉, 1978년에 노동당의 고위급 간부 한 사람이 말하기를

약 3년 이내에 남조선이 틀림없이 해방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런 뒷이야기를 제쳐놓고는 5.18 광주사태의 엉킨 실타래를 풀 수가 없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서울과 마산에서는 불발했고,

 

좌우지간 1980년 5월 18일에 예상했던 대로 민중소요가 광주에서 일어났다. 

 

후일에 필자가 탈북자 여러 사람을 심문했는데 그들도 정확하게

같은 내용의 진술을 하였다. 

 

그들은 이런 말도 하였다. 즉, 1981년 6월, 인민군 특전부대 정치담당 간부 학습강의에서

김일성이 언급하기를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1997년에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노동당 비서 황장엽과 그의 동반자 김덕홍도

월간조선의 김용삼 기자에게 북한이 광주사태를 지휘했고 노동당 대남공작부서 일꾼

상당수가 광주 사태 직후에 일제히 훈장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3. 공작대원들의 산발적 침투

그동안 탈북자들이 누차에 걸쳐 북한 특공대원들이 남한에 잠입하여 5.18 광주소요에

가담했다는 증언이 있었는데 그 규모에 대해서는 일관성이 없이 460명 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600명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2013년 5월 18일, 광주사태 33주년을 전후하여 국내에서는

북한특공대 개입여부를 놓고 언론계에서 치열한 공방이 있었는데, 

나는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북한이 개입 하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으며

어떤 형식으로 개입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더 정확한 분석과 판명이 도출 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언론인들은 광주 사태에 동원된 북한 특공대가 마치 Normandy 상륙작전 처럼

일시에 집결한 것처럼 생각하거나 그런 일은 불가능함으로 북한 개입을 아예 부정하기도 하지만, 

북한 특공대는 오래전부터 2인조, 3인조 형식으로 침투 하여 잠복하고 있다가

광주에 집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979년 10월 부마사태 때에 잠입한 북한 공작원들과 1980년 4월 강원도

사북탄광 노사분규 때 침투한 공작원들도 북으로 가지 않고 잠복하고 있다가

광주사태에 합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광주사태 작전 지휘부는 목포에 있었다고 한다.

 

4. 현역 특수군이 아닌 민간인 특공대

 

광주 사태에 북한 특수군의 개입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말이 맞다.

 

광주에 동원된 북한공작대는 현역군인이 아니며, 물론 여러 인민군 부대에서

차출되어 동원된 현역군인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대남 공작부서에서

현역군보다 더 무서운 훈련을 받은, 군부대의 단대호가 없는, 민간인 대남공작 특공대 였다. 

 

원래 계획은, 광주폭동이 성공적으로 진행이 되었다면, 1980년 5월 27일에,

6.25사변 때처럼 현역군대를, 즉 비정규전 특전대 병력이 대거 남침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예상했던 만큼 광주시민들의 협력이 미흡했고, 사태가 27일 오전에 진압이 되었기 때문에

그 계획을 취소하였다고 한다.

 

두말할 것도 없다. 북한에서는 학생교과서에...라고 기록되어 있고,

 

함경북도 청진시 낙양동에는 1980년 8월에 세워진 광주작전 희생자를 위한...가 있다. 

그 비석에는 158명 희생자 이름이 적혀있고, 다른 문헌에는 희생자가 총 490명이라고 되어있다.

 

북한에서도 그들을 인민군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대남공작대의 정체를 은폐하기 위한 거짓말이다.

 

그들은 현역 군인도 끼어 있었지만 조직 자체는 군부대가 아니었다.

 

5. 무등산의 진달래

 

북한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부참모장 상장 박승원이

광주 5.18작전에 왔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2000년 1차 남북 국방장관 회담 때 북측 차석대표로 제주도에 왔던 인물이다. 

 

그는 마식령 스키장 건설과 관련해 공이 크다며 북한 정부로 부터

노력영웅 칭호와 금메달, 국가훈장 1급을 받은 바 있다. 

 

그는 1988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대남영웅대회’'에서 (인민문화궁전 지상에서는

‘'전국영웅대회’'가 열렸고 지하에서는 ‘'대남영웅대회’'가 열렸음) 

 

토론자로 출연하여 5.18 광주항쟁참전의 공훈담을 증언하였다.

 

그리고 5.18 광주참전 ‘'대남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김정일의 지시로 제작된

노래 제작에도 기여한 바가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김일성을 찬양하는 ...처럼, 

이...가 

지금 평야에서 뿐만 아니라 남한 광주에서도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고 있는가.

 

6. 擧事(거사)인가 巨事인가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에 대한민국의 국가 안위가 심각하게 위태로웠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북한이 또다시 무력남침을 계획했으나, 

 

군 장성 주도 세력이 혼란을 수습하였고 나라를 바로 지켰기 때문에 광주작전을

실패하고 바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북한과 남한 좌파세력이

지금까지 전두환 대통령을 그토록 증오하고 있다.

 

역사를 바로 평가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1979. 12.12 애국적인 거사를 ...라고 매도하고 그에 대한 반감을 민주화 열망으로 착각하였다. 

 

설령, 광주에 민주화 열망이 불타고 있었다 하자, 

그러나 북한의 개입이 없이 광주시민들만의 순수한 민주화투쟁으로 진행이 되었더라면,

혹 불미스러운 혼잡이 있었다 할지 라도 

우리가 품어야 하는, 

거사(擧事)가 아닌, 역사적인 거사(巨事)가 되었을 것인데,

 

광주 사태에 가담한 인간들은 광주의 애국시민들이 아니고 

김대중 추종 좀비들 이었으며

 

북한의 시각으로도 순수 광주시민들의 협조는 없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

 

자유대한 국민들은

이제라도 

5.18의 진실을 정확히 알기를 바란다...

 

자유대한민국《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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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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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 역사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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