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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추억 이바구

재건대(넝마주의)

작성자연동개|작성시간15.08.06|조회수998 목록 댓글 19



넝마주이는 거지들이 모여 살며 동냥뿐만 아니라 넝마주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양아치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넝마주이는 사설막(대원들을 거느린 주인인 ‘조마리’가 관리하는 막), ‘자작’(개인 또는 가족단위로 만든 막) 방식의 조직을 갖추고 망태기와 집게를 사용하여 폐품을 수집하여 판매하였습니다.

 넝마주이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정부의 감시와 관리는 본격적인 산업화가 이루어지던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넝마주이는 근로재건대에 등록을 해야만 넝마주이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등록한 넝마주이는 지정된 복장과 명찰을 착용해야 했습니다.



넝마주이가 등록을 하지 않는 경우 폐품 수집을 할 수 없었으며, 법으로 처벌을 받았습니다다. 또한  초라한 옷차림으로 주택가에서 폐품 수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대중의 기피 대상이 되었고, 경찰에 의해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본부(?)는  폐허공장 재개발지 야산 중턱등 도심이나 주택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 둥지를 틀고 낮에서 폐지를 줍고 아침저녁으로는 밥을 얻으러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문현동 곱창골목 웟쪽 폐허공장에도 이들이 있었습니다.

1986년 넝마주이에 대한 사회적 배제와 차별을 극복하고, 아파트 단지 폐품 수집을 위한 장비 및 자본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윤팔병을 중심으로 ‘넝마공동체’가 조직되어 활동하다. 1990년대 이후로 넝마주이는 쓰레기산업을 비롯한 폐품산업의 성장과 함께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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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동진 작성시간 15.08.18 연동개 아버님이 그 곳에서 국제사란 복장사를 운영하셨어요.
  • 작성자우리이웃 작성시간 15.08.18 당시 잔치집에서는 그 분들이 와서 차려주는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고 가야 잔치집 같다고 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연동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8.19 인터넷도 전화도 없던 시절 대부분 무명자들인 이사람들이 어떻게 잔치집, 환갑, 돌잔치, 초상 등을 알고 찾아오는지 신기 했었지요! ㅎㅎㅎ...
  • 작성자곽갑진 작성시간 15.10.27 추억의 사진 입니다.
    1959 년도 아미동에(지금은 시장 형성) 살았는데... 빨레, 구두...... 자연적으로 많이도 사라 졌습니다.
    소문에는 넝마인이 쓸쩍 ~... 했다는 말에 아버님께서는 할말을 잃고.....
    추석 전날 사라호 태풍을 맞이한 것도 생각 납니다. 900.
  • 작성자추억따라 작성시간 15.11.16 어릴적.. 말 안듣는 애들은 넝마주이가(집게 아저씨) 잡아 간다기에 겁을 잔뜩 먹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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