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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학 강의실]

사주 명리학의 역사

작성자해정법사|작성시간11.11.14|조회수377 목록 댓글 0
2장 명리학의 역사 명리학의 역사는 상고대 하은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시경 서경에서 천인상응(天人相應)의 개념으로 천도(天道)를 자연의 이치로 삼았다. 5천년전 복희가 은하수의 하도 용마의 오성을 보고, 하늘의 운행하는 천문을 건곰감리 손간진태의 팔괘의 선천수로 길흉화복의 점을 치며 역술의 효시를 열었다. 헌원 황제 때에 배달 환웅의 14대 환웅 치우 천황(BC 2706년)이 중원에 나와 전쟁을 도전하니, 황제가 치우 천황과 10차의 전투에서 9번이나 지고, 마지막 탁녹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유혈이 백리에 뻗쳐 이것을 다스리기 어려움에 황제는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비니 하늘이 십간, 십이지를 내리셨다. 황제는 십간을 원으로 포하여 천형을 상징하고, 십이지를 방으로 포하여 지형을 상징하고 그 빛을 합하여 직문에 명하여 이를 널리 퍼지게 하니 그 후는 잘 다스려졌다. 후일 대요가 나와 가로대 '아! 황제가 성인으로서도 오히려 악살들을 능히 다스리지 못하였거늘 후세에 재해를 장차 어찌하리오' 라고 탄식하여 마침내 십간, 십이지를 합하여 육십갑자를 배성하도다라고 연해자평에 기술되어 있다. 기원 전 1734년에 하늘에 목성, 화성, 토성, 금성과 수성의 오행성이 운집하여 오성취루를 이루며, 오행이 상극하는 오각형 별이 생겼다. 태양계의 행성 가운데서 유일하게 서에서 동으로 역행하며 자전하는 금성의 숙살지기를 지닌 금이 지구상에 등장하며 오행상생에서 금이 목을 극하며 목극토 화극금 토극수 수극화의 상극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오행이 상극하는 낙서의 거북이 출현하며, 기원전 12세기에 주나라 문왕이 거북의 등의 구궁을 팔괘의 후천수로 64효의 역술을 체계화하여 주역으로 발전시켰다. 춘추전국시대 天의 개념은 점차 자연의 규칙이나 법칙으로 여기게 된다. 역학은 고대 천문 역법과 함께 성립된 점성술의 발전과 더불어 기원을 같이 한다. 하늘 별의 星道를 관찰하여 천문의 괘도를 연구하고 이에 상응하여 땅에 나타나는 4계절 현상의 주체는 하늘로 여겼다. 하늘 상제는 신(神)의 개념으로 인격적 의지적인 주체로 보았다. 천인상응의 개념에 따라 음양오행의 사상도 함께 대두된다. 역학의 유래는 전국시대 음양가 귀곡자와 낙록자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음양이란 천문현상인 계절현상으로 활동운화(活動運化)의 기(氣)가 변화하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오행이란 말은 수나라 때에 소길이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요소 재료를 뜻하는 말로 五材 즉 오행을 이루는 木火土金水를 말한다. 사주 명리학의 이론적 근거는 천인상응사상, 음양오행설, 천문역법인데 천지인의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서 음양오행설과 천문역법이 발전하게 되며 간지체계의 명리학이 함께 발전한다. 사주 명리학의 이론체계가 성립된 것은 당대 초기의 원천강이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간지로 대체한 사주를 통하여 사람의 명운을 논하는 이론적 체계를 원천강오성삼명지남에서 정립함으로써 사주명리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당나라 시대에는 干支論과 陰陽五行論이 명리학으로 결실을 보게 된 시기이다. 당대 이허중은 이허중명서 3권을 지어 명리학의 중흥을 이루는데 그는 사주상 오행의 왕상휴수와 납음오행 그리고 연간 위주의 논명 방식으로 운명을 논하였다. 당사주에서 신살을 가미한 오성술에 관한 서적 중 가장 완비된 (과노성종)이 현재까지도 전해진다. 사주 명리학을 역경에서 하나의 체계를 세워 세상에 공표한 것은 송나라의 서공승이다. 서공승은 서균 또는 자평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명리를 오성(五星), 육임(六壬), 기문(奇門), 태을(太乙), 하락(河洛), 자미두수(紫微斗數) 등에서 운명을 논하면서 납음(納音), 성신(星辰), 궁도(宮度), 괘리(卦理) 등을 거론했는데, 자평술(子平術:四柱學)은 이런 것들과는 달리 오행으로 운명을 논했다. 徐大升이 서자평의 학문을 계승하여 子平三命通辯淵源과 淵海子平을 지어 격국론등을 상세히 정리하였다. 서대승의 명리학은 이허중이 연월일시 전반에 걸쳐 오행의 생극제화와 왕상휴수로 인생의 화복을 결정한 방식에서 진일보하여 일주를 근거로 십신을 나누어 운명을 논하였으니 논리가 정밀하였다. 명대 말기 마테오리치(1552~1610)가 중국에 와서 서양 역법이 본격적으로 사주학에 사용되면서 중국의 역법과 명리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명대에는 개국공신 劉基(劉佰溫)가 적천수를 주석하여 명리학의 철학적 입지를 심화시켰다. 청대에는 심효첨이 음양오행론과 간지법칙을 중심체제로 삼아 자평진전을 편찬하여 격국론을 체계화하였다. 궁통보감은 원명이 欄江網인데 명대의 신원미상의 인물이 지은 책이나, 청대의 徐春台에 의해 번잡한 내용이 제거되고 책으로 간행된 바 이를 窮通寶監이라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궁통보감 자평진전 적천수와 같은 고전을 주석하는 작업이 활발했으니 서낙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造化元?評註, 평주궁통보감, 子平粹言, 적천수징의와 보주, 자평진전평주 등을 지어 명리학의 이론체계를 정리하고 심화시켰다. 원수산은 유기와 임철초의 주석을 모아 같은 이름의 적천수천미와 命譜, 명리탐원을 저술하였으며 위천리는 명학강의, 팔자제요, 정선명리약언, 呱呱集 등을 지었다.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에 당 사주가 일부 양반들과 역술가들이 점술과 같이 이용하여 왔다. 조선시대에 들어 서며 녹명서가 궁걸에서 이용되엇고,서거정이 이에 통달하였다. 조선시대에 命理學을 연구한 집단은 중인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잡과에서 합격한 중인들이 관상감에 근무하면서 국가의 대소사와 궁궐의 중요한 일에 관여하였다. 이조시대에는 일반인을 상대로 한 운명예측은 무속적인 점술이 대부분이며, 당사주가 유행하고, 사주 명리학은 일부 선비들과 궁궐에서만 사용되어 왔다. 성리학의 태두 퇴계 이황과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은 주역을 통달하였으나, 양반 체면에 사주쟁이란 소리를 듣기 싫어 점술과 명리학은 하지 않았다. 유학자 화담 서경덕, 북창, 토정 이지함과 남명 조식이 은둔하며, 명리에 통달하였다. 토정의 제자 미상이 지은 토정비결이 일반에 널리 애용되고, 남사고의 격암유록이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 후에 우리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우민화정책의 하나로 명리학이 이용되었다. 일제는 무라야마지준의 보고서 '조선의 귀신', '조선의 占과 豫言'을 통하여 각 지방마다 다양한 무속 신앙과 점술이 성행하고 있는 점을 이용하여, 과거제도가 없어져 방황하는 일부 명리학의 식자층에 무속적 점술을 부추겨 '철학관', '역술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했다. 해방 후에 이서경과 박재완 등이 연해자평과 명리정종의 이론을 이용해 사주명리학을 이해하기 어렵고 난잡한 술법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일반 술사들이 철학관이란 간판을 내걸고, 이미 천여년전 중국에서 그 확중률의 평가가 끝난 오성술, 당사주와 관상으로 민중을 현혹시켜 왔다. 생기론의 철학인 명리학이 역술과 점처럼 미신(迷信)으로 취급받는 것은 서구 문명과 기독교 영향도 많지만, 선 무당이 사람 잡는 식으로 돌파리 중이나 얄팍한 지식을 가진 철학관 도사들이 관상과 당 사주로 신살타령을 하며 부적이나 개명으로 닌중을 현혹하고, 푸닥거리 굿과 점술로 혹세무민한데 원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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