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行無轍迹 善言無瑕謫 善數不用籌策 선행무철적 선언무하적 선수불용주책 善閉無關楗 而不可開 善結無繩約 而不可解 선폐무관건 이부가개 선결무승약 이불가해 是以聖人常善救人 故無棄人 시이성인상선구인 고무기인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明 상선구물 고무기물 시위습명 故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 고선인자 불선인자사 불선인자 선인지자 不貴其師 不愛其資 雖智大迷 是謂要妙 불귀기사 불애기자 수지대미 시위요묘 의역: 만물에 깃든 無爲로 이루는 선한 행위들은 자취를 남기지 않고, 선한 말은 흠이 없으며, 선한 헤아림에는 손익을 따지지 않는다. 선하게 잠그면 빗장이 없어도 열지 못하며, 선하게 맺으면 묶지 않아도 풀 수가 없다. 따라서 聖人은 항상 선한 마음으로 사람을 구하며 그 누구도 포기 하지 않는다. 항상 선하게 만물을 구하기에 포기할 만물이 없으며 이것을 襲明이라 한다. 따라서 善人은 不善人의 스승이고, 不善人은 善人의 자본이다. 道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요, 깨닫지 못한 자는 깨달은 자에게 자본(본보기)과 같다.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자본(본보기)을 사랑하지 않으면 비록 물질적으로는 지혜로울지 몰라도 크게 어지러울 것이니, 이것을 요묘라 부른다. |
“빅뱅인가 창조인가”라는 책이 있다. 神이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스티븐 호킹의 주장을 반박하는 책이다. 神이 우주를 창조했기에 행위자가 있지만, 과학에서 설명하는 빅뱅은 행위자가 없기에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老子는 천지창조 과정을 道生一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道의 정체, 一의 정체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면 道德經 망령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과연 道와 一은 스스로 그러한 것인가 아니면 神처럼 우주를 창조하는 행위자인가?
道德經 전반을 살피면, 老子의 생각은 행위자가 아니라 자발적 의지를 가진 존재이다. 우주어디에도 神아닌 것이 없다. 빅뱅 이전도 有物混成으로 움직이고 빅뱅 이후 원자의 세계에서도 끊임없는 움직인다. 神의 生氣를 퍼트리려는 의지를 따르는 행위들이 우주 어디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우주 전역에 펼쳐진 모든 것이 生氣의 주체이자 神의 의지다. 27章도 “스스로 그러한 것” 無爲에 대한 설명이다.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그러하다.
善行 無轍迹(선행무철적) 선한 행위는 자취를 남기지 않고
善言 無瑕謫(선언 무하적) 선한 말은 흠이 없으며
善數 不用籌策(선수 불용주책) 선한 헤아림에는 손익을 따지지 않으며
선한 행위, 언어, 헤아림은 스스로 그러하기에 인간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흔적이 없고, 흠이 없으며, 손익을 따지지 않는다. 극히 자연스럽다.
善閉無關楗 而不可開 善結無繩約 而不可解(선폐무관건 이부가개 선결무승약 이불가해)선하게 잠그면 빗장이 없어도 열지 못하며. 선하게 맺으면 묶지 않아도 풀 수가 없다. 이 두 표현은 무위로 이루어지는 행위는 극히 자연스럽고 어떤 상황에서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是以聖人 常善求人 故無棄人(시이성인 상선구인 고무기인)
따라서 성인은 항상 선한 마음으로 사람을 구하며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다. 道가 만들어낸 一은 만물의 내부에 깊이 스며들어 道의 본성에 따른다. 이 문장에서도 聖人은 왕이나 도인이 아니다. 老子는 道와 無爲의 본질은 선하기에 근본적으로 악한 생명체는 없다고 본다. 굳이 성선과 성악을 따진다면 老子는 성선 쪽에 기울어져 있다. 이 문장은 62章의 人之不善,何棄之有(인지불선 하기지유)와 연결되어 있다. 생명체들 내부에는 道가 깊이 존재하는데 겉으로 불선하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常善求物 故無棄物 是謂襲明(상선구물 고무기물 시위습명)
항상 선하게 만물을 구하기에 포기할 만물이 없으며 이것을 襲明이라 한다. 이 문장도 만물에 스며들어 내재된 道로 이루어지는 無爲를 설명하며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위 문장에서 생명체를 언급하였고 이 문장에서 물질을 언급하였다. 만물을 이롭게 하려는 道의 의지는 우주 어디에도 펼쳐져 있다.
故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고선인자 불선인자사 불선인자 선인지자) 따라서 善人은 不善人의 스승이고, 不善人은 善人의 자본이다. 이 문장은 해석하기 까다롭다. 老子는 계속 無爲의 움직임을 설명하면서 常善求人 故無棄人 이라 표현했다. 즉, 無爲는 항상 선하게 구하며,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이 표현은, 본성은 道를 따르기에 극히 선하다는 것이다. 만물을 이롭게 하고 생기를 퍼트리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에 따르면, 비록 당장 道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교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살폈던 62章 道者萬物之奧(도자만물지오), 道는 이미 만물 내면에 존재한다. 善人之寶 선인의 보물이며 不善人之所保 道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지녀야할 것이다.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존재를 모를 뿐이다. 표현만 다를 뿐 동일한 의미다. 즉 내면 깊은 곳에 만물을 이롭게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깨달은 자에게는 보물과 같고, 깨닫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깨우쳐야할 것이다. 이 문장을 다시 해석해보자.
故善人者 不善人之師 道를 깨달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요
不善人者 善人之資 깨닫지 못한 자는 깨달은 자에게 자본(본보기)과 같다.
不貴其師 不愛其資(불귀기사 불애기자)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자본(본보기)을 사랑하지 않으면. 道와 無爲를 깨달은 자를 본받지 않고, 道와 無爲를 깨닫지 못한 자의 행위를 통하여 경각심을 게을리 하면
雖智大迷 是謂要妙(수지대미 시위요묘)
비록 지혜로우나 크게 어지러울 것이니, 이것을 요묘라 부른다. 智는 48章에서 언급했던 덜어내야만 하는 學을 상징한다. 즉, 道와 無爲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色界에서 필요로 하는 것만 배우고 學을 나쁘게 활용하여 탐욕을 부리는 것이 智다. 따라서 色界에서는 지혜로워 보이지만 道에서는 갈수록 멀어지기에 크게 어지럽다. 따라서 智는 덜어내야만 하고 축적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차이를 깨닫는 것을 要妙(요묘, 無爲)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