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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폰 파펜 - 수상 역임 - 나치에 협조 - 90세 귀천

작성자도무사|작성시간20.01.01|조회수173 목록 댓글 1

프란츠 폰 파펜 Franz von Papen -수상-90

 

성명: 프란츠 폰 파펜 Franz von Papen 남자

생년월일: 1879년 10월 29일 오후 15시 정각

출생장소: 독일, Werl, 51n33, 7e54

시간대: LMT m7e54 (지방표준시간)

출처: 출생증명서 (확인자-Gauquelin)

출생시: 출생시가 15시 정각이라 미시 혹은 신시로 볼 수 있음. 


양 력: 1879년 10월 29일 15:00

음/평: 1879년 09월 15일 15:00 남자

 

시 일 월 년

甲 乙 甲 己

申 酉 戌 卯

 

甲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壬 癸

子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酉

96 86 76 66 56 46 36 26 16 6.12

 

사망일자: 1969년(91세, 乙丑대운 己酉년) 05월 02일 사망함.

 

부친 Friedrich von Papen-Köningen (1839–1906)

모친 Anna Laura von Steffens (1852–1939)

부인 Martha von Boch-Galhau (1880–1961) -- 5명의 자식 출산.

 

부자이고 귀족 집안의 3번째로 출생함.

1891년 학교에 다니기 시작함.

1905년 5월 3일 Martha von Boch-Galhau와 결혼하여 5명의 자식을 출산함.

1906년 부친 사망함.

1913년 대위로 장군의 참모로 근무 시작함. 미국 주재 독일 대사관 주재무관으로 근무함, 장군참모본부 근무함,

1915년 간첩사건과 태업에 연루되어 본국으로 소환당했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팔레스타인에 주둔한 터키 제4군의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1918년 11월 9일 빌헬름 2세는 제위에서 물러나 네덜란드로 망명함,

1919년 봄에 중령으로 제대하고 정치계로 뛰어듬.

1921년~1932년 연방 하원의원을 지냄.

1932년 6월 독일의 수상 취임,

1933년 1월 30일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새로운 내각의 총리로 임명함,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 치하에서 부수상을 지냈다.

1934년 6월 30일 히틀러가 돌격대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던 장검의 밤에 파펜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나 숙청일로부터 3일 후 부총리직을 사임했다.

1934년 오스트리아 대사로 발령남, 나치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에 큰 역할을 함.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88세 폐암으로 사망함.

1938년 오스트리아 대사 퇴임.

1939년 모친 사망함.

1939년 터키 주재 대사로 임명됨, 터키가 연합국들과 동맹을 맺지 못하도록 노력함.

1944년 터키 대사 퇴임,

1945년 4월 연합군에게 체포된 그는 전범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뉘른베르크 국제사법재판소는 그가 침략전쟁을 준비하는 데 공모한 사실이 없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그 후에 열린 독일 재판소에서의 재판에서는 중요한 나치 당원이었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1949년 법원에 상소하여 벌금형으로 감형된 후 석방되었다.

1952년 그의 회고록인 〈진실의 길목에서 Der Wahrheit eine Gasse〉가 발간되었다.

1961년 부인 Martha 사망함.

1969년(91세, 乙丑대운 己酉년) 05월 02일 본인 사망함.

 

 

프란츠 요제프 헤르만 미하엘 마리아 폰 파펜 출처-위키백과

Franz Joseph Hermann Michael Maria von Papen

 

독일국의 수상

임기 1932년 6월 1일 ~ 1932년 11월 17일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전임 하인리히 브뤼닝

후임 쿠르트 폰 슐라이허

 

프로이센의 국가판무관

임기 1932년 7월 20일 ~ 1932년 12월 3일

전임 오토 브라운(총리)

후임 쿠르트 폰 슐라이허

프로이센의 총리

임기 1933년 1월 30일 ~ 1933년 4월 10일

전임 쿠르트 폰 슐라이허(판무관)

후임 헤르만 괴링

대독일국의 부수상

임기 1933년 1월 30일 ~ 1934년 8월 7일

수상 아돌프 히틀러

전임 헤르만 로베르트 디트리히

후임 공석(1934년 ~ 1941년) 헤르만 괴링(1941년)

 

신상정보

출생일 1879년 10월 29일

출생지 독일 제국 라인란트 베를

사망일 1969년 05월 02일 (89세)

사망지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오베어자즈바흐

정당 독일 중앙당(1932년 이전) 무소속(1932년 이후)

배우자 마르타 폰보흐갈하우 Martha von Boch-Galhau (m. 1905; died 1961)

자녀 프리드리히, 안토이네테, 이자벨라, 마르가레트, 슈테파니에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군사 경력

복무기간 1913년 ~ 1919년

최종계급 중령

근무 미국 주재 독일 대사관 주재무관, 장군참모본부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프란츠 요제프 헤르만 미하엘 마리아 폰 파펜(독일어: Franz Joseph Hermann Michael Maria von Papen, 1879년 10월 29일 ~ 1969년 5월 2일)은 독일의 귀족, 참모 장교, 정치인이다. 1932년 독일의 수상으로, 1932년 아돌프 히틀러 치하에서 부수상을 지냈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 파펜은 나치당이 의석 수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히틀러를 통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힌덴부르크에게 그를 수상에 임명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파펜과 그의 동료들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로 빠르게 소외되었으며, 나치가 그의 심복들 중 일부를 살해한 장검의 밤 사건 이후 정부를 떠났다. 그는 1934년부터 1938년까지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내면서 나치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에 큰 역할을 하였다.

  

 

파펜 Franz von Papen 출처-다음백과

 

출생 1879. 10. 29, 독일 베를

사망 1969. 5. 2, 서독 오버자스바흐

국적 독일

요약 독일의 정치가·외교관.

 

바이마르 공화국을 해체하고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가 되도록 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부유한 가톨릭 지주 가문의 자손이었던 그는 직업군인으로 출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워싱턴 주재 독일 육군 무관으로 있었다. 그러나 1915년 간첩사건과 태업에 연루되어 본국으로 소환당했다. 


그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팔레스타인에 주둔한 터키 제4군의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전후 독일로 돌아온 왕정주의자 파펜은 정계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다. 1921~32년 연방 하원의원을 지낸 그는 가톨릭 중앙당의 극우파에 속해 있었다.

 

그는 독일 왕정주의자, 이전의 귀족, 대실업가 단체, 독일군 등과 확실한 연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정치적 추종자는 1명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고문관이었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이 만들어낸 각본에 따라 1932년 6월 1일 파펜이 총리직에 취임하자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그는 의회에서 정치적 토대나 다수 세력의 확보 없이 우파적인 권위주의 정부를 수립했다. 의회 내의 제2당을 형성하고 있던 나치당을 달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6월 15일 나치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Sturmabteilung/SA)에 대해 취해졌던 금지령을 해제했으며, 7월 20일 프로이센의 사회민주당 정부를 해산시켰다. 


외교문제에 있어서 그는 베르사유 조약에 입각한 독일의 배상 의무를 사실상 말소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독일을 통치하고자 했던 히틀러는 여전히 야당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독일의 바이마르 정치체제를 권위주의적인 지배체제로 바꾸려 한 파펜의 반동적인 정책들과 노력들은 진정 대중의 뜻에 따라 범국민전선을 형성하고자 했던 슐라이허를 소외시켰다. 그에 따라 슐라이허는 파펜의 정책들을 거부하도록 대다수의 정부관료들을 설득했다. 결국 파펜은 사임하게 되었고 12월 4일 그의 뒤를 이어 슐라이허가 총리로 취임했다.

 

파펜은 자신이 축출되었음에 격앙하여 슐라이허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1933년 1월 4일 히틀러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또한 그는 나치 지도자를 총리직에 앉히도록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했다. 부총리가 된 파펜은 그의 동료인 비(非)나치계 민족주의자들이 장관직의 다수를 차지하자, 순진하게도 자신이 나치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히틀러를 보좌했다. 히틀러가 돌격대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던 1934년 6월 30일 파펜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나 숙청일로부터 3일 후 부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뒤 그는 1934~38년 오스트리아 주재 독일 대사로 파견되었고, 그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병합시키기 위해 힘썼다. 1939~44년에는 터키 주재 대사로서 터키가 연합국들과 동맹을 맺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노력했다(나치당).

 

1945년 4월 연합군에게 체포된 그는 전범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뉘른베르크 국제사법재판소는 그가 침략전쟁을 준비하는 데 공모한 사실이 없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그 후에 열린 독일 재판소에서의 재판에서는 중요한 나치 당원이었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그는 1949년 법원에 상소하여 벌금형으로 감형된 후 석방되었다. 1952년 그의 회고록인 〈진실의 길목에서 Der Wahrheit eine Gasse〉가 발간되었다.

 

프란츠 폰 파펜 출처-나무위키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 하지만 역사는 그를 나치 독일 탄생의 1등 공신으로 기억한다.

갑자기 슐라이허에 의해 총리로 임명된 파펜은 지지기반이 없었기에 힌덴부르크에 아부하며 독재하기 위하여 프로이센 쿠데타도 일으키다가 너무 막 나간 나머지 총리 자리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히틀러와 나란히 손잡고 총리나 해먹으려다가 2차 대전에서 패망하고, 이후에는 숙청 당하지 않기 위해 깨갱거리게 된다. 뛰어난 외교 실력으로 살다가 전범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나치 독일은 자신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우겼다. 물론 세계적인 평가는 '너 때문 맞거든?' 이며 당연히 지금까지도 나치 독일을 탄생시킨 장본인 중 한 명이라고 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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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도무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1.02 히틀러가 정권을 잡는데...음으로 양으로 도움이 된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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