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리스트 갈루아(1811∼1832) - 요절한 천재 수학자
양력; 1811년 10월 25일
음력: 1811년 09월 09일
시 일 월 년 남자
甲 甲 戊 辛
子 申 戌 未
35 25 15 5
甲 乙 丙 丁
午 未 申 酉
사망일시: 1832년, 22세, 丙申대운 壬辰년 6월 1일 권총 결투로 인한 부상으로 사망함.
오미공망, 무토당령, 생시 출처는 출생증명서가 있다고 함.
1814년(4세, 갑술년) 부친이 부르라레느의 시장이 됨.
1823년(13세, 계미년)까지 법률을 전공한 모친에게서 배움,
1823년(13세, 계미년) 갈루아는 리세 루이르그랑(프랑스어: Lycée Louis-le-Grand, 루이대제 기숙학교)에 입학하였다. 갈루아가 입학한 해에 정치적인 문제로 백여명의 학생이 퇴학당하는 일이 있었지만, 처음 두 해 동안 갈루아는 별다른 문제없이 학교생활을 하였고 2학년 때에는 라틴어 과목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4세(만나이)가 될 무렵, 갈루아는 학업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수학에만 몰두하였다.
1828년(18세, 무자년)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낙방함.
1829년(19세, 기축년) 7월 28일 부친이 모함을 받아 자살함. 부친 사망 1주일 후 다시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낙방함.
1830년(20세, 경인년) 7월 혁명 당시 학교 교장을 비난한 편지투고 사건을 일으킴, 사건 직후 학교를 그만두고 급진 공화주의 세력이었던 국가방위군 포병대에 가입하였다. 학교를 그만 둔 이후 갈루아는 수학과 정치 집회에만 몰두하였다. 대원들과 함께 정치 토론을 거치면서 갈루아는 자연스레 국가방위군 포병대의 일원이 되었다.
1830년(20세, 경인년) 12월 31일, 국가방위군 포병대는 정부를 약화시키고자 한다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같은 시기 19 살 포병대 장교였던 갈루아는 국가전복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1831년(21세, 신묘년) 1월 4일 정식으로 학교에서 제적됨.
1831년(21세, 신묘년) 4월이 되자 포병대 장교들에게 씌워졌던 혐의가 벗겨져 모두 석방되었다. 5월 9일 포병대원들은 명예가 회복된 것을 기념하여 알렉상드르 뒤마와 같은 저명한 인물들을 초청한 가운데 연회를 열었다. 연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끌벅적하게 변했고, 갈루아는 단도를 잔에 대면서 국왕 루이 필립을 위해 건배하였다. 누군가 갈루아가 왕의 목숨을 위협했다고 밀고하였고 다음날 체포되었지만, 6월 15일 석방되었다. 갈루아는 바스티유의 날인 7월 14일 국가방위군 포병대의 제복을 입고 권총과 소총, 단도로 무장한 채 공화주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갈루아는 다시 체포되었으며 금지된 국가방위군 포병대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6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갈루아는 1832년 4월 29일까지 수감되었고, 이 기간 동안 그의 수학 이론을 개발해나갔다.
1832년(22세, 임진년) 4월 29일 석방됨.
1832년(22세, 丙申대운 壬辰년) 5월 30일 권총 결투로 인한 부상으로 6월 1일 사망함. 여자문제로 권총결투를 했다는 설이 있음.
[이만근 교수와 함께 수학의 고향을 찾아서]
<10·끝> 갈루아 기사입력 2012-05-18
5차 방정식 연구하다 ‘群論’ 정립… 현대 양자역학 기초가 되다
지난해 갈루아 탄생 200주년 기념 행사에서 사용된 갈루아의 초상화. 권총 결투로 쓰러지는 장면이 얼굴 좌우에 자그맣게 그려져 있다.
시대를 앞서가다 유성(流星)처럼 20대에 요절한 비운의 천재 수학자.’
프랑스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1811∼1832)를 수학계는 이렇게 부른다. 전해지는 그의 초상화는 대부분 남동생 알프레드가 그린 것으로 얼굴에 우수가 가득 묻어난다. 무의미한 권총 결투로 사망하기까지 21년이라는 짧지만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는 여러 편의 소설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파리에서 남쪽으로 자동차를 타고 20여 분 거리에 있는 소도시 부르라렌. 갈루아의 고향이다. 시의 한쪽 ‘페이자제’ 공동묘지에 있는 아버지 니콜라가브리엘 갈루아의 무덤을 찾아가 보니 니콜라가브리엘의 묘비는 물론이고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라고 적힌 아들의 묘비까지 얹혀 세워져 있었다. 죽은 후 무덤도 찾을 수 없었던 갈루아와 왕정 시대에 공화주의자로 살면서 반대파의 모함과 모욕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아버지, 두 부자(父子)의 굴곡 많은 삶이 상징적으로 비쳤다.
부르라렌 시 정부는 지난해 10월 갈루아의 모교 에콜 노르말 측과 갈루아 탄생 200주년 행사를 개최하는 등 갈루아 기념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생가 ‘제네랄 르클레르 54’의 5층집 2층 벽에는 ‘갈루아가 살았다’고 적힌 작은 동판이 부착되어 있다. 시 정부 산하 관광안내소 직원 로제 니콜라 도리에 씨(45)는 “갈루아의 생가는 시가 매입해 기념관 등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말했다.
아버지 묘 위에 아들 묘비만… 프랑스 파리 남쪽 근교 부르라렌의 ‘페이자제’ 공동묘지에 서있는 갈루아의 ‘묘비’. 이곳은 자살한 그의 아버지 니콜라가브리엘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권총 결투로 사망한 갈루아의 무덤을 찾을 수 없어 아버지의 묘비 위에 그의 묘비를 세워 놓아 ‘부자의 비극’을 보여준다. 부르라렌=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최근 이만근 교수(동양대)와 함께 찾은 부르라렌의 지하철 역 플랫폼에서는 시 정부의 갈루아 기념 자료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갈루아가 살면서 거쳤던 주요 장소를 시간순으로 번호를 붙여 표시한 지도에는 그의 삶이 압축돼 있다.
그의 생가, 루이 14세 중고교, 그가 제출한 논문을 두 차례나 분실해 논문 심사를 받을 수도 없게 만들어 좌절을 안긴 프랑스 학사원, 그가 한 손에 칼을 들고 술을 마시다 왕을 모독했다고 모함받아 체포됐던 식당(방당주 드 부르고뉴), 포병대 복장을 입었다가 체포됐던 퐁뇌프, 그가 수감됐던 생트 펠라지와 라 포르스 감옥, 그리고 1832년 5월 30일 결투 다음 날 숨진 코섕 병원 등.
갈루아의 아버지는 부르라렌 시에서 17년간 시장을 지냈다. 그 덕분에 갈루아는 당시 귀족 자제들이 많았던 루이 14세 중고교에 다녔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싫어했고 생활기록부에는 ‘품행 불량’이라고 적혀 있다. 모범학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1차 대수 방정식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낼 정도로 수학에 몰두했다.
한 교사는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수학에 대한 광기”라고 평가했다(‘앵무새의 정리’·드니 게즈). 그는 아드리앵 마리 르장드르(1752∼1833)가 유클리드의 13권짜리 ‘기하학 원론’을 현대화한 수학 이론서를 마치 소설책을 읽듯이 이틀 만에 독파했을 뿐만 아니라 내용 대부분을 이해했다고 전해진다.
갈루아가 17세 때 아버지가 시장직을 내놓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그의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집안의 경제적 형편도 급격히 기울었다. 부친 사망 1주일 후 그는 당시 수학 최고 명문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응시했으나 면접에서 낙방한다. 결국 한 단계 수준이 낮았던 에콜 노르말에 입학한다. 에콜 노르말은 현재는 명문 그랑제콜(고등교육기관) 중 하나다.
그가 왜 낙방했는지에 대해 여러 설이 있다. 천재성을 과신해 시험 준비를 너무 소홀히 했다거나 아버지 사망으로 인한 정서적 불안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하지만 이브 앙드레 에콜 노르말 및 프랑스 국립과학원(CNRS) 교수는 파리 연구실에서 기자를 만나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앙드레 교수는 “당시 면접관이 ‘산술 대수에 대해 설명하라’고 질문하자 갈루아는 ‘산술 대수 같은 수학은 없기 때문에 설명할 것도 없다’고 대답해 시험관을 격분시켰다는 설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수학적 능력은 이미 면접관들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공화주의자였던 그는 정치적 파동 속에 에콜 노르말에서 제적당한 후 국가방위군 포병대에 가담한다. 하지만 포병대는 공화주의를 지원한다는 이유로 곧 해산됐다. 갈루아는 부대 해산 후에도 여전히 포병대 복장을 입고 다니다 체포돼 옥살이를 했다.
갈루아가 수학자의 길을 걷지 못한 요인에는 몇 가지 황당한 불운이 잇따랐기 때문이라는 얘기들이 거론된다. 그는 에콜 노르말 재학 시절 ‘방정식론’에 대한 논문을 파리 한림원에 보냈는데 심사를 맡은 오귀스탱 루이 코시가 논문 원고를 분실했다. 여기에는 그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로 ‘5차 이상의 방정식의 해(근)는 구할 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갈루아는 이후 한 단계 발전시킨 이론으로 ‘5차 이상의 방정식 중 대수적으로 풀 수 있는 조건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필요충분조건을 증명’하는 논문을 프랑스 한림원에 다시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심사관인 조제프 푸리에가 심사 도중 사망하는 바람에 원고가 없어지고 말았다. 푸리에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수행한 유명 수학자다.
갈루아는 사망하기 전해인 1831년 프랑스 한림원에 또다시 방정식 등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심사를 맡은 수학자 시메옹드니 푸아송이 “전혀 이해할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대를 앞서간 그의 이론을 당시 수준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갈루아가 수학에서 남긴 가장 큰 업적은 군론(群論·group theory)이다. 군론이란 연산이 정의된 어떤 집합의 수학적 구조를 연구하는 것으로 ‘군’이란 용어도 갈루아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4차 방정식까지는 대수적인 풀이는 알려져 있었지만 5차 이상 방정식의 근의 공식이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갈루아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군론을 도입했다. 군론 등 갈루아의 이론은 현대 수학의 기초가 됐으며 양자역학 등 물리학에도 응용되고 있다.
앙드레 교수는 “갈루아 이론은 문구 이상의 깊이가 있어 글을 읽으면 영감을 얻는다”며 “하지만 아직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 많다”고 말했다.
갈루아의 허무한 죽음을 후대 수학계는 안타까워한다. 그는 사귀던 여성 문제로 동료 공화주의자로부터 결투 신청을 받는다. 상대의 뛰어난 사격 실력을 알았던 갈루아는 결투 전날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친구 오귀스트 슈발리에 등 지인들에게 작별의 편지를 남기고 자신이 알고 있던 주요 수학 이론 등을 밤새 정리했다. 갈루아는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스스로 “무의미한 결투”라고 밝힌 것처럼 목숨을 잃을 것이 뻔한 결투에 왜 꼭 나가야 했는지 등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에바리스트 갈루아(프랑스어: Évariste Galois, 1811년 10월 25일 - 1832년 5월 31일)은 프랑스의 수학자이다.
갈루아는 십대 시절에 수학의 오랜 난제였던 5차 이상 고등 다항식을 거듭제곱근의 해로 나타낼 수 있는지 판별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밝혔다. 이 과정을 통하여 갈루아는 수열을 특정한 수학적 조건에 따라 묶는 방법을 가리키는 "군"(프랑스어: groupe )이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였다. 갈루아의 연구는 추상대수학의 주요 분야인 갈루아 이론과 군론의 기반이 되었으며, 하위 분야인 갈루아 접속에 대한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갈루아가 살던 시기 프랑스는 루이 필립이 왕으로 있던 군주제였으며, 갈루아는 급진적인 공화주의자였다. 갈루아는 스무살이 되던 해 미심쩍은 상황 속에서 일어난 결투에서 부상을 입어 사망하였다.[1]
[편집] 생애
[편집] 초기 생애
갈루아는 1811년 10월 25일 니콜라스 가브리엘 갈루아와 안델라이데 마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화주의자였으며 부르라레인 지역 자유당의 당수였다. 니콜라스 가브리엘은 루이 18세가 왕위에 복위된 1814년 부르라레느의 시장이 되었다. 어머니는 법률가의 딸로 라틴어로 된 고전 문학을 읽을 수 있었고, 갈루아는 12세가 될 때까지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갈루아는 10세 때 랭 컬리지에 입학하기를 희망하였으나 어머니는 아직 집에서 배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였다.
1823년 갈루아는 리세 루이르그랑(프랑스어: Lycée Louis-le-Grand, 루이대제 기숙학교)에 입학하였다. 갈루아가 입학한 해에 정치적인 문제로 백여명의 학생이 퇴학당하는 일이 있었지만, 처음 두 해 동안 갈루아는 별다른 문제없이 학교생활을 하였고 2학년 때에는 라틴어 과목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4세가 될 무렵, 갈루아는 학업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수학에만 몰두하였다.
갈루아가 스스로 말한 바에 따르면, 그는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의 《기하학 기초》를 "마치 소설처럼" 읽었다고 하며 처음 읽자마자 내용을 숙지하였다. 15세가 되자 조제프루이 라그랑주의 《대수 방정식 해법 탐구》를 읽었고, 이는 갈루아 자신의 방정식 이론을 세우는 기반이 되었다. 갈루아가 그랑주르의 《함수 계산 연습》과 같은 전문적인 수학 서적을 읽는 사이 학교는 평범한 수업만을 계속하였고 갈루아의 이러한 학습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2]
[편집] 새내기 수학자
1828년, 갈루아는 별다른 시험 준비 없이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시험에 응시하였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당시 수학계에서 가장 저명한 학교였다. 그러나, 갈루아는 면접 시험에서 떨어졌는데, 구두시험에 대한 설명이 서툴렀기 때문이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 시험에서 떨어진 갈루아는 당시 수학 과목에 대해서는 평판이 형편없었던 에콜 노말(당시 이름은 에콜 프레파라투아('École préparatoire), 예비 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갈루아의 상황을 헤아려 줄 교사를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듬해 갈루아는 연분수를 주제로 첫번째 논문을 발표하였다.[3] 같은 기간 갈루아는 다항 방정식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갈루아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앞으로 두 편의 논문을 보냈다. 오귀스탱 코시가 갈루아의 이 논문을 심사했지만, 불명확한 부분이 아직 남아있다는 이유로 출판은 거절하였다. 하지만, 코시는 논문에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갈루아의 연구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카데미 수학상을 수여할 수 있도록 두 논문을 하나로 합쳐주라고 요청하였다. 당대에 가장 유명한 수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코시는 갈루아가 아카데미 수학상을 수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4]
갈루아의 아버지는 짧은 풍자시를 짓고는 했는데 반대파는 그것을 교묘히 위조하여 갈루아의 아버지를 공격하였고, 결국 시장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1829년 7월 28일, 갈루아의 아버지는 결국 자살하였다. 아버지의 죽은지 몇일 지나지 않아 갈루아는 다시 한 번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시험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갈루아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매우 심란해져 있었기 때문에 시험에 제대로 응시할 수 없었다. 갈루아는 시험관이 수학에 대해 매우 무지한 것에 화가 난 나머지 칠판지우개를 집어던졌다고 한다.[5][6] 갈루아를 평가한 면접관은 그의 논술이 비약이 심하여 논리적으로 취약하였다고 평가하였다.[2]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시험에 낙방한 뒤, 갈루아는 에콜 노말의 졸업 시험을 치렀다. 에콜 노말의 시험관은 "갈루아의 논지는 간혹 불명확하지만 그의 수학적 지성과 번뜩이는 예지는 특기할만 하다"고 평가하였다. 갈루아는 졸업 시험을 통과하였다.
갈루아는 5차 이상의 다항 방정식의 해의 존재를 가리는 판별식에 대한 자신의 논문을 여러 차례 제출하였으나 살아생전에 출판되지는 못하였다. 1829년 처음 제출한 두 편의 논문은 코시가 거절하면서 한 편으로 고쳐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게 하여 한 편으로 고쳐 제출된 논문은 아카데미 수학상의 심사위원이었던 조제프 푸리에에게 전달되었으나, 푸리에가 사망하면서 논문이 분실되었다. 결국 그해 수상자는 카를 구스타프 야코프 야코비였는데, 심사 과정에서 갈루아의 논문과 닐스 헨리크 아벨의 논문은 석연찮은 이유로 제외되었다. 갈루아는 자신의 논문이 심사에서 제외된 것은 정치적 음모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갈루아는 결국 수상에 실패하였지만 자신의 논문을 학회지에 기고하여 출간하였다. 하나는 갈루아 이론에 대한 것이었고[7], 다른 하나는 고차 방정식의 해에 대한 것이었으며[8], 세 번째의 것은 유한체에 대해 최초로 정리한 것이었다.[9]
[편집] 공화주의자
갈루아가 살던 시기 프랑스의 정치 상황은 매우 불안하였다. 1824년 루이 18세의 뒤를 이어 샤를 10세가 즉위하였지만, 1827년 선거에서 그를 지지하던 정파는 다수당의 지위를 잃었고 1830년에는 반대파였던 자유당이 다수당이 되었다. 사퇴 압력에 직면한 샤를 10세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악명높은 7월 포고령을 선포하였지만, 이 때문에 일어난 7월 혁명으로 결국 하야하였고, 루이 필립이 새 왕으로 즉위하였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학생들도 혁명에 참여하여 거리 곳곳에서 역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영광의 3일" 동안 갈루아와 에콜 노말의 학생들은 교장에 의해 학교에 감금되어 한 발자욱도 나갈 수 없었다. 갈루아는 격분하여 교장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편지를 〈가제트 데제콜〉에 기고하였다. 편지에는 갈루아의 실명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가제트〉의 편집진은 갈루아의 이름을 감춘 채 보도하였지만, 갈루아는 퇴학당하고 말았다.[10]
갈루아가 공식적으로 제적된 것은 1831년 1월 4일이었지만, 갈루아는 편지 사건 직후 학교를 그만두고 급진 공화주의 세력이었던 국가방위군 포병대에 가입하였다. 학교를 그만 둔 이후 갈루아는 수학과 정치 집회에만 몰두하였다. 대원들과 함께 정치 토론을 거치면서 갈루아는 자연스레 국가방위군 포병대의 일원이 되었다. 1830년 12월 31일, 국가방위군 포병대는 정부를 약화시키고자 한다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같은 시기 19 살 포병대 장교였던 갈루아는 국가전복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1831년 4월이 되자 포병대 장교들에게 씌워졌던 혐의가 벗겨져 모두 석방되었다. 5월 9일 포병대원들은 명예가 회복된 것을 기념하여 알렉상드르 뒤마와 같은 저명한 인물들을 초청한 가운데 연회를 열었다. 연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끌벅적하게 변했고, 갈루아는 단도를 잔에 대면서 국왕 루이 필립을 위해 건배하였다. 누군가 갈루아가 왕의 목숨을 위협했다고 밀고하였고 다음날 체포되었지만, 6월 15일 석방되었다.[11]
갈루아는 바스티유의 날인 7월 14일 국가방위군 포병대의 제복을 입고 권총과 소총, 단도로 무장한 채 공화주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갈루아는 다시 체포되었으며 금지된 국가방위군 포병대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6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았다.[12] 갈루아는 1832년 4월 29일까지 수감되었고, 이 기간 동안 그의 수학 이론을 개발해나갔다.
[편집] 마지막 날
갈루아를 기념하는 비석. 갈루아는 일반 공동 묘지에 묻혀 실재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 지는 알 수가 없다. 갈루아는 수감을 계기로 수학을 다시 시작하였지만 집중하지는 못했다. 갈루아는 에콜 노말에서 퇴학당한 이후 개인적으로 대수학 공부를 이어갔지만, 정치적 행동이 우선하였다.[4] 1832년 1월 갈루아는 시메옹 드니 푸아송의 요청으로 방정식 이론에 대한 논문을 제출하였다. 푸아송은 7월이 되어서야 "갈루아의 방정식 이론은 충분히 엄밀하지도 않고 더 이상 엄밀하게 발전시킬 수도 없을 것"이어서 "이해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평가서 말미에 "우리는 저자가 보다 명확한 견해를 가진 양식으로 자신의 연구 전체를 작성하여 출판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13] 푸아송의 평가서가 작성될 무렵 갈루아는 바스티유의 날 사건으로 체포되어 수감되었기 때문에, 10월이 되어서야 평가서를 받아볼 수 있었다. 자신이 처한 불운한 상황 때문에 침울해 있던 갈루아는 이 평가서를 보고 매우 격하게 반발하였으며, 차라리 나중에 자비로 출간할지언정 아카데미를 통해서 자신의 논문을 출판하는 것은 단념하겠다고 친구인 오귀스트 셰발리에를 통해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갈루아는 푸아송의 의견에 따라 자신의 연구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하였고, 그동안 작성하였던 기록들을 모두 감옥으로 보내달라고 하여 출옥할 때까지 연구하였다.[14]
갈루아는 석연찮은 이유로 5월 30일 결투를 하게 되었다. 왜 결투를 치르게 되었는지, 자신에게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피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추측만 무성할 뿐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결투가 있기 5일전 갈루아는 친구 셰발리에에게 이루어 지지 않은 사랑때문에 결투를 하게 되었다고 편지를 썼다.[4]
믿을 만한 몇몇 조사에서 갈루아가 사랑에 빠졌던 여인의 이름은 스테파니펠리시에 포테린 뒤 모텔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녀는 갈루아가 생애 마지막 한 달간 머물렀던 여관 주인의 딸이었다. 갈루아 자신이 쓴 편지에 그녀의 이름을 지웠던 흔적이 있다.[15] 갈루아는 뒤 모텔이 맞닥뜨린 어떤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하다가 결투에 연루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수학자이자 오랫동안 갈루아의 일생을 연구하였고 《수학을 만든 사람들》을 집필한 E.T. 벨은 갈루아가 왕당파와 경찰이 연루된 정치적 사건에 휘말렸다고 썼다.[16] 그러나, 미국 우주망원경 과학 학회의 과학부장인 마리오 리비오는 갈루아가 결투 전날 자신의 정치적 동지들에게 썼던 편지를 아래와 같이 공개하면서 결투 상대가 오히려 공화주의자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17]
“ 두 애국지사가 결투를 걸어왔습니다. …… 저는 피할 수 없습니다. …… 이런 사소한 일을 두고 내 의지에 반해 결투를 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십시오. 조국에 내 이름을 남길 만큼 오래 살지 못하는 운명이니 여러분이 나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 에바리스트 갈루아, 1832년
갈루아는 이 편지 외에도 모든 공화주의자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와 셰발리에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겼다. 셰발리에에게 남긴 편지에는 갈루아가 그동안 연구하였던 수학 이론에 대한 간략한 정리가 들어 있었다. 갈루아는 이 편지에 담긴 내용을 독일의 수학자 야코비나 가우스에게 보내줄 것을 당부하였다. [17]
1832년 5월 30일 갈루아는 권총을 사용한 결투에서 오른쪽 복부에 총상을 입었고, 총알은 내장을 뚫고 들어가 왼쪽 둔부에 박혔다. 갈루아를 병원에 데려간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코셍 병원의 의사는 이미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가족을 불렀다. 급히 달려온 동생에게 갈루아는 "울지마, 20살 나이에 죽으려면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짜내야 하니까"라고 말하였다. 다음날 갈루아는 사망하였고, 6월 1일 사망확인서가 발급되었다. [17]
알렉상드르 뒤마는 갈루아와 결투는 벌인 사람이 페쇼 데르엥비에라고 여겼다. [18]
[편집] 수학적 업적
갈루아는 추상대수학과 군론, 갈루아 이론 등에 중요한 아이디어를 개발하였다.
[편집] 대수학
갈루아 이전부터 여러 수학자가 군에 대한 개념을 알고 있었지만, 군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하고 군론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갈루아였다. 갈루아는 오늘날 정규부분군으로 불리는 군을 정의하였다. [19] 또한 , 갈루아의 이름을 기려 갈루아 체라고도 불리는 유한체를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또한, 갈루아는 소수의 거듭제곱 Pv에 대한 일반선형군 GL(P,v)을 정의하고 이의 차수를 계산하였다. [20]
[편집] 갈루아 이론 이 부분의 본문은 갈루아 이론입니다.
갈루아의 가장 중요한 수학적 업적으로는 갈루아 이론의 개발이 꼽힌다. 갈루아는 순열군을 이용해서 주어진 방정식의 다양한 해들이 서로 어떻게 대응되는가를 기술하고 이를 이용하여 다항 방정식이 거듭제곱근을 해로 갖는 필요충분조건에 대한 판별식을 개발하였다.[21]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도무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5.24 1811년에 출생증명서를 발행했다니....놀랄만 합니다... 프랑스도 기록을 남기는데는...뛰어남니다.... 병신대운에 부친 자살...본인 사망...그 와중에서도 수학 연구를 했으니...천재는 천재인 모양입니다....일간이 뿌리가 없고...3개의 재성이 금 관성을 생하고... 申금 관성운에...관성이 더욱 더 강해지니....일간이 견디지 못하는군요....
-
작성자松栢 조흔 작성시간 12.05.24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