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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 - 프랑스 왕 - 징크스

작성자도무사|작성시간15.08.11|조회수533 목록 댓글 1

 

루이 16세 - 프랑스 왕 - 징크스


이름: 루이 16세, Louis XVI, King of France 남자

생년월일: 1754년 8월 23일 06시 26분

출생장소: 프랑스 베르사유궁 48n48, 2e08

출처: 뉴스/신문자료


양 력: 1754년 8월 23일 06:26

음/평: 1754년 7월 6일 06:26 남자


시 일 월 년

乙 癸 壬 甲

卯 未 申 戌


辛 庚 己 戊 丁 丙 乙 甲 癸 대운: 순행

巳 辰 卯 寅 丑 子 亥 戌 酉

85 75 65 55 45 35 25 15 5.5


1761년(8세, 癸酉대운 辛巳년) 부활절에 형님 부르고뉴 공작 루이 조제프가 암으로 사망함,

1765년(12세, 癸酉대운 乙酉년) 부친의 죽음으로 인해 조부(루이 15세)의 뒤를 이을 왕세손이 됨.

1770년(17세, 甲戌대운 庚寅년) 마리 앙토와넷트와 결혼

1774년(21세, 甲戌대운 甲午년) 5월 10일 조부가 사망하자 왕위에 오름

1789년(36세, 丙子대운 己酉년) 10월 장남 사망, 혁명 시작, 파리로 도망

1792년(39세, 丙子대운 壬子년) 8월 폭도들에게 체포됨.

1793년 1월 21일(음력으로 39세, 1792년 丙子대운 壬子년) 10시 20분 단두대로 처형됨.


서프라이즈’ 루이 16세가 가장 두려워 한 것은? ‘숫자 21’

[MBN스타 김윤아 기자] 기사입력 2015.08.09


프랑스의 와 루이 16세가 숫자 21을 제일 두려워했다.


9일 오전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신비한TV 서프라이즈’(이하 ‘서프라이즈’)에서는 루이 16세와 관련된 ‘21의 저주’가 전파를 탔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한 루이 16세는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며 죽음을 맡게 된 비운의 인물이다.


그런데 왕이 되기 전부터 그는 특이한 습관이 있었다. 식사를 할 때마다 음식의 가짓수가 21이 안되게 피했고, 21시가 되기 전에 반드시 잠자리에 들었다. 심지어 매달 21일이 되면 외출도 삼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 점술사는 “숫자 21을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 것”이라는 뜻밖의 예언을 루이 16세에게 했다.

루이 15세가 사망하자 루이 16세가 왕이 됐고, 왕이 된 후에도 숫자 21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다.


실제로 루이 16세는 1793년 1월21일 처형됐다. 루이 16세가 1793년 1월21일 찬반투표에서 유죄가 인정됐고 당일 바로 콩코드광장에 마련된 기요틴에서 공개 처형을 당했다.



루이 16세(프랑스어: Louis XVI, 1754년 8월 23일 ~ 1793년 1월 21일)는 1774년부터 1792년까지 프랑스 왕국을 통치한 부르봉 왕가 출신의 왕이다. 본명은 루이 오귀스트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퇴위당한 후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그로 인해 ‘마지막 루이(Louis le Dernier)’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루이 15세의 손자이다.


개요[편집]

국정[편집]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하였다. 선량했던 그는 프랑스 사회를 개혁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나약하여 의지와 추진력이 부족하였고 국왕으로서의 적성이 결여되어, 이후 닥쳐온 비운의 최대 원인이 되었다. 당시 귀족층의 사치스러운 생활 또한 심각하였다. 튀르고를 등용하여 구제도의 모순 해결, 재정위기를 타개하도록 하였으나, 궁정 및 특권 신분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이어 네케르를 기용하였으나, 아메리카 독립혁명에 개입하여 국비를 낭비함으로써 재정은 더욱 곤란해졌다. 이후 칼론, 브리엔을 기용하였으나, 재정은 악화될 뿐 개혁은 특권신분의 반항으로 실현할 수가 없었고, 1788년 삼부회(三部會) 소집을 결정, 재차 네케르를 기용하였다.


혁명[편집]

1789년 6월 삼부회가 국민의회로 성장하여 입헌왕정에의 움직임이 높아지자, 군대에 의해 의회를 탄압코자 책동하였다가, 이것이 도리어 바스티유 공격을 초래하였고, 시민의 봉기에 굴복하였다. 이후 소위 1789년 체제에 입각한 입헌 왕정에의 움직임에 대하여 자신의 무정견과 왕비 마리앙투와네트를 중심으로 하는 궁정의 압력으로 신체제에 저항하면서도 일보일보 양보하였으며, 한편 미라보, 라파예트, 바르나브 등과 손을 잡고 권력의 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791년 6월 20일 일가와 함께 국외로 도망하려고 하였으나 실패, 입헌 왕정을 기조로 한 1791년의 헌법의 승인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국민공회는 왕을 퇴위시키고 공화국을 선포했고, 루이 16세는 국민공회(國民公會)의 투표결과 반역자로서 1793년 1월 단두대(斷頭臺)의 이슬로 사라졌다. [1]



이후 생략함 ==> 위키피디아 참조 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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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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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松栢 조흔 | 작성시간 15.08.14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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