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배달 (최영의)
출생 1923년 6월 4일, 사망 1994년 4월 26일, 직업 스포츠인, 학력 다쿠쇼쿠대학교
경력 1964년 국제공수도회관 극진회관 설립 및 국제공수도연맹 초대관장 1953년 미 FBI 본부, 미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가라데 사범
수상 1984년 브라질 문화공로상, 1947년 동경무도대회 가라데 부문 우승
양 력: 1923년 7월 17일
음/평: 1923년 6월 4일 남자
시 일 월 년
@ 辛 己 癸
@ 卯 未 亥
庚 辛 壬 癸 甲 乙 丙 丁 戊 대운: 역행
戌 亥 子 丑 寅 卯 辰 巳 午
82 72 62 52 42 32 22 12 2.2
대운 시작: 2세 2월 3일
사망 나이: 72 세, 임자년
최영의 [崔永宜, 1923.6.4 ~ 1994.4.26]
실전 가라테로 불리는 극진 가라테의 창시자로서 국제가라테연맹총재를 역임하였다. 일본의 가라테 10대 문파와 세계 무술인과의 격투기에서 모두 승리하였고 전일본 가라테선수권대회를 제패하였다. 1923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출생하였다. 일본명은 오야마 마스다츠[大山倍達]이다. 국제가라테연맹총재를 역임하였으며, 일본의 가라테 10대 문파를 비롯, 세계 무술인과의 100여 차례의 격투기에서 모두 승리, 최고의 파이터라고 부른다. 일본 청소년이 뽑은 ‘위대한 인물 10걸’의 한 사람으로 16세 때 도일, 야마나시[山梨]소년 항공학교에 재학하던 1939년 가라데 초단으로 입문, 24세에 전일본 가라테 선수권대회를 제패하였다. 1964년 그가 발족한 국제가라데연맹 산하에는 140개국 1,200만 명의 수련인구가 있다. 《생명의 가라테》 《가라테는 무엇인가》 등 62권의 저서를 남겼다.
1923.7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 와룡리에서 음력 6월 4일, 양력 7월 17일에 출생함. 부친 최승현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남.
1930.3 만주 유학을 떠남
1932.2 최승현(부)이 세운 용지초등학교(소학교)에 입학. 택견, 각저등 토유무술을 접함.
1937.4 경성(서울)상경후 중학교에 입학. 당수도(토유)을 접함.
1939.3 군산을 통하여 나가사키로 도일. 야마나시 소년 공항학교 입학.
1944.2 학도병으로 차출(일본태평양전쟁)
1945.11 히바야공원부근에서 미케게이조를 만남.경호원생활을 시작함.오오이부도에 위치함.
1946.9 미야모토 무사시’서적을 접함.
1946.10 제1차 입산수도로 身延산에 들어가 가라데의 수업에 정진함.
1946.6 차후 부인이 될 여인을 만남.
1947.9 종전초의 전일본가라데도 선수권에 출전해서 우승함.
1948.4 제2차 입산수도로 치바현 키요즈미산에 들어가 20개월의 수업을 실시함.
1950.11 치바의 館山에서 소와 대결. 맹우를 쓰러뜨린 것이 47마리, 그 중에 4마리는 즉사.
1951.2 유도, 검도 유단자들과의 대결 후 무사시노 벌판에서 각 무술당파의 수제자들과의 대결
1952.6 태극권의 달인 ‘진’노인(홍콩)을 만남. 이후 武에 대한 연구에 정진할 기회를 맞음.
1953.3 하네다공항에서 반아메리카 항공으로 처음으로 미국으로 건너감.
1953.4 미국 시카고에서 첫 프로레슬링을 실시함. 미 협회 측의 초청으로 엔도 코가찌
(4단)와 전미 32개소에서 가라데를 전파, 레슬링챔피온들과 7회 대결.
1954. 하와이에서 역도산과 만남. 이후 극진가라데 창설. 가라데 전파.
1994.4. 26일 성누가병원에서 폐암으로 별세
최배달 선생의 세 아들(광범·광수·광화)의 대표명이다. 최배달 선생의 서거 10주년을 맞이하여 평전을 출간함과 아울러 대산사업회를 꾸려 모국에서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나가는 일을 하고 있다.
1946년부터 시작된 최배달의 가라테 대전 기록은 연전연승.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 처음엔 일본 전국의 가라테 도장을 섭렵했고 그 다음에는 힘깨나 쓴다는 일본의 가라테 선수들과 맞붙었다.
1994년 6월 26일, 일본 황족과 고위층에게만 특별히 허용되는 아오아마 장례식장에는 한국계 일본인 최배달의 추모 행사가 열렸다. 최배달은 이미 두 달 전에 운명을 달리한 터였다.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운집한 장례식장에서 문상객들은 하나같이 최배달의 죽음을 ‘일본 최고 영웅의 영면’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이날 아오야마 장례식장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어로 된 조사가 낭독됐다.
“매일 아침 최배달 선생님의 위패와 집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합니다.” 일본의 미디어 회사 ‘미디어 8’의 대표 마에다 씨는 최배달 사후 매일 아침 조의를 표했다.
일본 전통의 가라테를 변형한 극진 가라테를 창시해 평생 목숨을 건 치열한 싸움을 계속해온 최배달에 대한 일본인들의 경외심은 대단했다. 한국명 최영의, 일본명 오오야마 마쓰다스는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에서 신화가 됐다.
전세계를 돌며 맞장을 뜨다
1954년 4월, 최배달은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가라테 경기장에서 들이대는 카메라 플래시에는 익숙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담아내는 카메라는 처음이었다. 맨손으로 황소의 뿔을 잘라낸다는 그의 괴력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소와 싸운 가라테’를 위해 최배달은 황소와 맞서고 있었다.
“신장 175cm, 체중 70kg, 상당히 강한 몸을 가진 일본 가라테의 일인자 오오야마 6단이 700kg이 넘는 황소와 싸워 뿔을 잘라냈습니다” 소의 뿔을 두 동강 내는 광경이 펼쳐지자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흥분에 들떴다.
같은 해 최배달은 황소 47마리와 싸워 4마리를 즉사시키고 나머지 43마리의 뿔을 잘라내 버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왜 황소와 싸워야만 했을까? 최배달에게는 더 이상 싸울 ‘사람’이 없었다.
1946년부터 시작된 최배달의 가라테 대전 기록은 연전연승.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 처음엔 일본 전국의 가라테 도장을 섭렵했고 그 다음에는 힘깨나 쓴다는 일본의 가라테 선수들과 맞붙었다.
실전 공수의 원조 사카하라, 가미소리 모리, 닌자 미와노부오, 유도의 달인 니노 이글, 검객 료마. 최배달과 한판 붙은 이들은 모두 일본에서 날고 기는 무술의 명인들이었다. 최배달은 이들과의 승부에서 모두 승리했다.
일본 안에서 적수를 찾지 못했던 최배달은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렸다. 이때부터 ‘전 세계를 돌며 맞장을 뜨는’ 삶이 시작됐다.
1950년대에 미국과 유럽 전역을 돌며 싸움을 시작한 최배달은 매일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유명 인사가 된다. 이 처절한 싸움 여행은 승부로서만 자기 존재를 증명했던 최배달의 삶, 그 자체였다.
“무엇인가를 때려본 남자가 남자 중의 남자다. 젊을 때는 모험을 하는 곳에 길이 있고, 그게 즐겁다. 모험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다.” 1993년 유명을 달리하기 1년 전 최배달은 어느 도장에서 강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최배달의 젊은 날은 그의 말대로 “때리는 삶”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가 모험을 즐기기만 했을까?
“대결을 앞두고는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졌다. 공포가 밀려와 너무나 두려웠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할 만큼 두려웠다. 처음엔 입이 떨리고 나중에는 내 자신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최고의 고수들 앞에서는 포커 페이스였지만 최배달은 승부하는 삶은 공포와 외로움과의 전투였다.
눈썹을 밀고 산중에 은거하다
1945년 최배달은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반대파에 의해 곤경에 처한 야쿠자 보스의 생명을 구해준다. 그 사건 이후 그는 6개월 간 야쿠자의 보디가드로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야쿠자로 살기에 최배달의 꿈은 너무 컸다.
1941년 그가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간 이유는 항공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일본으로 건너가자마자 야마나시 소년항공학교에 입학한 최배달이지만 야쿠자 보디가드 생활 이후 재일 거류민단 활동을 시작한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조국은 독립을 했지만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삶은 녹록한 편이 아니었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무술서 ‘오륜서’를 접한 최배달은 거류민단 활동을 접고 본격적인 무술 수련을 위해 입산한다.
그때가 1946년이었다. 산세가 험하기로 악명 높은 키요즈미 산중에서도 심심구곡으로 들어간 최배달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한쪽 눈썹을 밀어버린 것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다.
한쪽 눈썹이 다 자라면 나머지 한쪽을 밀고, 다시 자라면 다른 한쪽을 밀어버리는 식이었다. 흉물스러운 모습 때문에라도 산을 떠날 수 없도록 강제하기 위해서였다. 첩첩산중에 자신을 고립시킨 후 최배달은 정신일도 수련에 매진했다.
“나는 내가 산을 내려가게 될까봐 두려웠어. 덜 고통스럽고 덜 외로운 생활을 그리워하다가 스스로 세웠던 목표를 포기할까봐 두려웠지”
주위와 왕래 없이 오로지 자신과 싸우며 수련에 매진한 최배달은 하산 후에 본격적인 무술인의 삶을 시작했다. 험준한 산을 달리고 또 달렸다. 손가락 다섯 개로 버티다가 익숙해지면 세 개로, 다시 익숙해지면 한 개로 버티며 몸을 만들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태어난 것이 최배달의 극진 가라테였다. 극진 가라테는 신체 수련만을 요구하는 단순한 격투기가 아니었다. 육체적인 수련과 정신적인 수련을 병행하는 극진 가라테는 철저한 고독과 맞닥뜨리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입산수도한 지 10개월 후 최배달은 산을 내려온다.
그는 강할 대로 강해져 있었다. 내려오자마자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전일본공수도대회’ 참가. 그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험준한 산에서 고독과 싸우며 오로지 수련에만 열중한 결과는 곧 나타났다. 식민지 청년에 대한 질투와 시기가 난무하는 일본의 가라테계를 평정할 수 있었던 것. 그 결과 그의 가르침을 받겠다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를 찾아왔다.
최배달은 1956년 오늘날 극진회관의 전신이 되는 대산도장의 문을 연다. 일본인들은 최배달의 무예에 흠뻑 매료됐고 극진 가라테를 배우기 위해 극진회관을 찾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배고픔과 고독의 승부사
최배달은 부러지지 않는 강인함을 소유한 사내였다. “강한 사람보다는 모든 것을 따뜻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인간성이 중요해” 실전을 중시하는 극진 가라테를 하는 사람답지 않게 최배달은 늘 따뜻한 인간성을 강조했다.
제자들을 혹독하게 단련시키면서도 늘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는 빼놓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대련할 때는 냉정한 승부사의 태도를 유지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가슴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집에 돌아오면 늘 아프다고 하셨어요” 최배달의 큰 아들은 세계 최고의 고수들을 차례차례 무너뜨렸던 대단히 강한 최배달의 모습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현 극진회관 관장이자 최배달의 제자인 문장규 씨가 기억하는 최배달도 마찬가지다. “집에 놀러 가면 ‘너희는 피곤할 테니 앉아 있어라’ 하시면서 차를 직접 끓여 주셨어요. 그리고 많이 먹는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늘 목구멍까지 차도록 먹어야 했습니다.”
배고픔과 고독. 이 둘은 일생 동안 최배달을 따라다닌 꼬리표이다. 수많은 선배들을 제치고 젊은 나이에 극진회관의 관장이 된 문장규 씨는 최배달에 대한 추억이 많은 편이다. 그가 추억하는 최배달은 강자로서의 면모보다 따뜻한 인간의 모습이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것은 배고픔과 고독을 씹는 것이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최배달. 많이 먹는 사람을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았던 최배달은 홀로 견뎌왔던 배고픔과 고독에 의해 단련된 인간이다.
“나는 싸우는 것이 두렵다. 맞는 것이 두렵고, 지는 것이 두렵다. 싸우다 죽는 것보다 불구나 폐인으로 살아남을까 더욱 두렵다” 면서도 평생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최배달의 삶에는 영웅적인 면모가 숨겨져 있다.
지난 1994년 6월 26일 장례식장을 가득 매운 5천여 명의 문상객들이 벌였던 추모 행사는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온 한 인간에 대한 경의에 다름 아니다.
출처 :극진가라데(극진회관)-성남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