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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화제인물

사카모토 료마 - 메이지 유신의 공신

작성자도무사|작성시간10.05.22|조회수776 목록 댓글 1

사카모토 료마

 

양력: 1836년 12월 22일

음력: 1836년 11월 15일

구분

@

@

 

 

 

당령

 

12운성

 

災殺

將星

地殺

12신살

75

65

55

45

35

25

15

5

 

 

 

사망(피살) 일시: 1867년(정묘년, 32세) 음력 11월 15일(임자월 갑자일) 사망.

 

 

사카모토 료마(일본어: 坂本龍馬 (さかもと りょうま) 판본용마[*]), 1836년 11월 15일 ~ 1867년 11월 15일)는 일본의 무사 겸 정치가다. 에도 막부 말기 도막운동(막부 타도운동) 지도자로 활동했고, 메이지 유신이 코앞에 왔을 때 비명에 갔다.

 

성장

사카모토는 음력 1835년 11월 15일, 시코쿠도사 번(오늘날의 고치 현) 고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카모토 하치헤이 나오타리"(坂本八平直足)는 하급무사인 고시(鄕士)계급이었다. 1853년 에도로 유학하여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 지바 도장에서 검술을 배우면서, 한편 에도의 존왕양이론자들과 사귀었다. 그 해 페리 제독이 내항했고, 무사계급에서는 서양 세력에 대해 개항하려는 막부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같은 해 말 사쿠마 쇼잔의 사숙에서 공부했고, 1854년 고향으로 돌아가 유학자이자 화가인 가와다 쇼료로부터 서양에 대해 배웠다.

 

탈번

사카모토는 1861년 다케치 즈이잔이 주도한 도사근왕당(도사출신의 하급무사들이 천황을 지키고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자 모인 모임)에 참여했다. 1862년 도사근왕당은 번의 중신 요시다를 암살하며, 사카모토는 탈번하여 낭인(소속이 없는 사무라이)으로서 에도로 향했다. 당시 탈번은 사형에 처해지는 중죄였다.

 

그 해 개화파 막부 관리 가쓰 가이슈를 죽이려다 오히려 설복돼 그의 제자가 된다(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가쓰 가이슈는 료마에게 사이고 다카모리를 소개해줬다. 가쓰로부터 서양 문물을 배운 사카모토는 양이에서 개화로 생각이 크게 바뀌며, 이라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 일본국으로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듬해 가쓰를 도와 고베 해군훈련소 설립에 힘썼다. 이후 가쓰가 물러나고 훈련소가 문을 닫자, 사카모토는 무역회사 가이엔타이(海援隊)를 세웠다. 가이엔타이는 이후 도막파에 군수 보급을 하기도 했다. 도막의 중심은 사쓰마 번(가고시마 현)과 조슈 번(야마구치 현)이었다. 사카모토는 동향인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사이가 나쁜 두 번을 중재하여, 1866년 삿초 동맹(사쓰마와 조슈 동맹)을 결성하는 데 공헌했다.

 

죽음

1867년 교토로 가는 배에서 사카모토는 대정봉환 등의 구상을 담은 선중팔책을 입안했다. 대정봉환의 구상은 사카모토가 속했던 토사번(도사 번)의 번주인 야마노우치 토요시게가 토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건의하여 채택되었다. 이후 천황이 이를 받아들여 실제로 대정봉환이 이뤄졌고, 정권은 막부에서 천황 중심의 조정으로 평화적으로 넘어갔다.

 

대정봉환 한달 후 사카모토는 나카오카와 함께 교토에 머물다가 음력 11월 15일인 여관 오미야에서 습격을 받고 피살됐다. (오미야 사건)누구의 소행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막부측 미마와리구미의 소행이라는 설이 유력한 가운데, 신센구미, 아군인 사쓰마의 소행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사카모토는 머리에 상처를 입었고 천천히 죽어갔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당시 같이 습격당했던 나카오카가 중태인 가운데서도 3일간 생존했기 때문에 그에 의해 소상히 전해 질 수 있었다. 유족으로 부인 오료와 누나 오토메 등이 있었다.

 

미마와리구미 소행설은 근거 자료가 있다. 보신 전쟁이 끝나고 체포된 전 미마와리구미의 대원 이마이 노부오가 사카모토 료마 암살은 자신들에 의한 것이라고 증언하며 당시의 세세한 정보를 모두 말한 것이 교부쇼(강무소) 공술서에 기록이 돼있다. 아직까지도 이를 뒤집을 만한 사료는 나오지 않고 있다.

 

신센구미의 소행이라는 설은 다음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건 발생 7일전(3일전이라고도 한다), 전 신센구미의 참모이자 능위사인 이토 가시타로가 사카모토에게 찾아갔다. 그가 말하길, "나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 지금 신센구미가 당신을 노리고 있으니 모쪼록 조심하라"라고 했는데, 당시 사카모토는 신센구미를 배신해 사쓰마 번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이토를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고, 그의 충고도 흘려들었다.

 

게다가 실제로 사건이 발생한 날, 현장에서 칼집과 나막신이 발견됐는데, 이때 기다렸다는듯이 달려온 이토가 "이 칼집은 10번대 하라다 대장의 것인 듯하다"라고 증언했고, 그 나막신 역시 신센구미가 자주 드나드는 후쿠베 정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 증언을 한 3일 뒤, 11월 18일에 이토 일행은 아부라코지에서 신센구미에 의해 암살됐다. 이 일련의 사건이 신센구미의 사카모토 료마 암살설을 더욱 굳혔던 것이다. 하지만 암살을 하러가는 자객이 쿵쿵 소리나고 움직이기도 어려운 나막신을 신는다는 것은 이상하다.

 

또 사카모토 료마를 암살했다는 것은 당시로선 엄청나게 자랑하고 떠들고 다닐 일이었지 숨길 일은 아니었으므로 신센구미 측이 당시 극구 부정한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평가

• 사카모토는 훌륭한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그를 암살하기 위해 미마와리구미(막부순찰대) 30명 정도가 습격한 데라다야 사건 때,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막리(幕吏) 두 명을 살해한 적은 있다. 이것이 유일하게 밝혀진 료마의 살인 기록이다. 후에 미마와리구미 측 주장으로는 이때의 살인이 료마 암살의 명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칼로 사람을 베어 죽인 적은 없다.

• 당시 돈만 쫒아 다닌다는 주변의 평도 있었다.

• 오늘날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역사상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가족 관계

• (고조부)"오하마 나오마스"(大濱直益)(1702년 - 1779년)

• (고조모)"다나카 씨"(田中氏)

• (증조부)"사카모토 나오미"(坂本直海)(1739년 - 1812년)

• (증조모)"구마 씨"(久萬氏)

• (조부)"사카모토 나오스미"(坂本直澄)(1765년 - 1816년

• (조모)"이노우에 씨"(井上氏)

• (부)"사카모토 나오타리"(坂本直足)(1797년 - 1855년)

• (모)"사카모토 씨"(坂本氏)

• (본인)"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년 - 1867년)

• (아내)"나라자키 씨"(楢崎氏)

관련 서적

료마가 간다 - 시바 료타로 지음, 이길진 옮김, 창해 간. 전 10권. 사카모토는 종래 크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1962년부터 신문에 연재된 시바 료타로의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유명해졌다. 여기서 그는 난세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미래를 내다보고 실행하는 풍운아로 그려진다.

오이 료마(お〜い龍馬) - 장편 만화

• 사카모토 료마 -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이길진 옮김, 솔출판사 간. 전 3권.

• 근대일본의 사상가들 - 가노 마사나오 지음, 이애숙 외 옮김, 삼천리 간.

 

 

데라다야(寺田屋) 사건 : 분큐(文久) 2년 91862년) 4월 존왕양이파 선봉이었던 사쓰마한시(살마번사-薩摩藩士) 중 9명이 살상되었다는, 메이지 유신(명치유신) 사상 유명한 사건이다.

 

 

아래 글은 학민사에서 출판된 <황당한 일본>에서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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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는 1835년 11월, 시코쿠 토사번(지금의 고오치현)에서 양조장을 하는 부친의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상당한 재산을 모은 부친은 향사(토착 농민으로 무사 대우를 받는 자)의 권리를 사서 겨우 말단 사무라이 축에 끼게 되었다.

 

료마는 어렸을 때 울보니 오줌싸개라는 별명으로 놀림을 당하자 칼을 빼어드는 소동을 일어켜 쥬쿠(초등 교육기관)에 갈 수 없게 되어 누나가 가정교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식보다는 검도에 집중하였다.

 

료마는 19세 되던 해인 1853년, 처음으로 에도에 나와 치바 사다키치의 문하생이 되어 북진일도류를 수련했다. 그래서 흔히 검술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기록을 살펴보면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도 칼 싸움을 한 횟수가 별로 없고 또 이겼다는 기록도 거의 없다. 1857년 에도에 있는 토사번 저택에서의 검술시합에서 무명의 시마다 고마노스케를 이긴 것이 유일한 승전 기록이다.

 

교토 후시미 데라다야에서 부교쇼(에도 시대의 행정관청) 포졸들에게 쫓길 때에도 칼을 차고 있으면서도 권총으로 쏘기만 하다 손가락을 다쳐 도망치기도 하고, 1867년 교토의 오미애에서 암살될 때에도, 비록 기습을 당하기는 했지만 상대방에게는 상처 하나 입히지도 못하고 자신은 중상을 입어 죽고만 것을 보면 그의 검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토사번의 하급무사 다케치 즈이산은 이런 료마를 가리켜 "대 허풍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제대로 본 것이다. 다만 이러한 료마의 성격도 잘 이용하기만 하면 쓸모가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료마 역시 다른 유신지사들처럼 여자 문제에서는 뒤떨어지지 않았다. 나가사키에서는 주로 마루야마의 화월루 등의 게이샤를 일종의 현지처로 삼아 상대하였다. 그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여자가 있는데, 오료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야쿠자의 멱살을 잡고 싸우기도 할 정도로 성질이 거친 여성인데, 료마는 그녀를 교토 후시미 데라다야에 맡겨놓고 왔다 갔다하면서 성욕의 배출구로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정식 부인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녀는 료마가 암살당하자, 이 남자 저남자와 섭렵하다 마지막에는 어느 행상인과 붙어다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그 밖에도 료마에게는 검도 스승 치바 사다키치의 장녀인 사나와 토사근왕당 시절의 동료의 여동생인 히라이 가오 등 사랑스러운 여인이 많이 있었다.

 

1867년 4월, 료마와 가이엔타이(료마가 나가사키에 설립한 무역회사)가 오오즈번(지금의 시코쿠 에히메현)으로부터 보름 동안의 사용료 500냥을 지불하고 빌린 160톤 짜리 작은 기선 이로하마루가 오사카 방면으로 항해중 세토나이카이에서 짙은 안개로 기슈(도쿠가와 3대 가문의 하나)의 887톤 선박 메이코마루와 충돌하여 침몰하였다. 료마가 기슈번이 잘못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토사와 초슈번이 연합하여 공격을 한다고 협박을 하자, 보수적인 기슈번은 체면 때문에 조용히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배상에 응했다. 배상금은 당초 8만 3천냥으로 합의했으나, 이로하마루도 현등을 달지 않은 잘못을 참작해서 7만냥으로 결정되었다.

 

료마는 7만냥 중 절반 정도를 오오즈번에 갚고, 나머지 금액 중 1만 5천 340냥을 가이엔타이에 주었다.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오늘날의 자해공갈단이나 보험사기단의 수법과 비슷하지 않은가? 또한 1만 5천냥은 료마와 대원들이 나눠 나가사키의 마루야마에서 창녀들과 질펀하게 노는데 사용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료마가 같은 해 11월 교토의 오미야에서 암살되자, 아마 일전의 이로하마루 사건의 원한으로 기슈번의 자객에게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16명의 대원이 기슈번 숙소인 텐마야로 쳐들어가 4명 사망, 4명 중경상의 참사로 이어졌다. 결국 자기들이 기슈번에 대해 공갈과 협박을 했음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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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도무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5.22 월주와 일주가 천극지충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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