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1962년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켈시에게 대통령상을 수여하는 장면. 위키백과 공용
프랜시스 켈시 박사 - 탈리도마이드 승인지연 - 귀천
양 력: 1914년 7월 24일
음/평: 1914년 6월 1일 여자
시 일 월 년
@ 辛 辛 甲
@ 亥 未 寅
壬 癸 甲 乙 丙 丁 戊 己 庚 대운: 역행
戌 亥 子 丑 寅 卯 辰 巳 午
85 75 65 55 45 35 25 15 5.6
대운 시작: 5세 6월 19일
사망 나이: 102 세 (2015년 을미년) 8월 7일
캐나다인, 캐나다 British Columbia주, Cobble Hill에서 출생,
1938년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음.
1943년 Fremont Ellis Kelsey 박사와 결혼, 2명의 자녀 출산.
1960년 미국 FDA(식품의약국)에 근무 시작함. 첫 임무가 '탈리도마이드'의 승인 여부였음.
1962년 탈리도마이드'의 승인을 미룬 공으로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상을 받음.
1966년 남편 사망
2005년 은퇴함.
2015년 8월 7일 사망함.
'기형아 유발약 막아낸 영웅' 美 켈시 박사 별세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송고시간 | 2015/08/08 21:44
FDA 재직 때 탈리도마이드 승인 거부…'소신공무원' 표창
1만 명이 넘는 기형아 출산을 유발한 진정제 '탈리도마이드'의 승인을 거부해 수많은 미국 태아들을 지켜낸 미국식품의약국(FDA)의 프랜시스 올덤 켈시 박사가 7일(현지시간) 별세했다.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20세기 미국 여성 영웅'인 켈시 박사가 캐나다 온타리오의 딸 집에서 10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1914년 캐나다에서 태어난 켈시 박사는 미국 시카고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60년부터 FDA에서 신약 허가 신청서를 평가하는 업무를 맡게 됐다.
그해 9월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첫 신청서가 바로 미국 제품명 '케바돈'이었던 진정제 탈리도마이드였다.
1953년 옛 서독의 제약사 그루넨탈이 개발한 이 약은 이미 탁월한 수면진정 효과가 있는 약으로 알려지며 1957년부터 유럽에서 널리 팔리고 있었다. 임신부의 입덧 방지제로도 처방됐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 시판되고 있는 약품인 만큼 허가는 단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켈시 박사는 허가 신청서에 쉽게 도장을 찍어주는 대신 미국 내 제조사인 윌리엄 S. 머렐 사(社)에 신청서를 돌려보냈다. 회사 측이 제출한 자료가 부족하다며, 약품의 독성과 효과 등에 대한 추가 정보를 요구한 것이다.
추가 자료 요구는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허가는 떼어놓은 당상으로 여기고 이미 창고에 탈리도마이드를 가득 비축해뒀던 머렐 사는 전방위 로비를 펼치며 켈시 박사를 압박했다. FDA 고위층에게 켈시 박사가 "까다롭고, 고집 많고, 비합리적인 관료"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켈시 박사가 이러한 압박에도 꿈쩍하지 않는 사이 이듬해 2월 영국의학저널에는 탈리도마이드가 팔, 다리 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는 글이 실렸고, 6개월 후 유럽에서 탈리도마이드가 기형아 출산을 유발한다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가 나왔다.
약품은 곧바로 전면 회수됐지만, 그때까지 임신부의 탈리도마이드 복용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팔, 다리가 없거나 눈과 귀가 변형된 채로 태어난 기형아는 1만2천 명에 달했다.
그러나 켈시 박사가 쉽게 시판 허가를 내주지 않은 탓에 미국에서 태어난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는 17명에 그쳤다. 머렐 사가 허가 이전에 1천 명의 미국 의사들한테 연구 목적으로 나눠준 샘플로 인한 피해였다.
탈리도마이드 사건이 전 세계를 뒤흔든 후 곧바로 워싱턴포스트는 켈시 박사를 영웅으로 치켜세운 기사를 실었다.
켈시 박사는 자신만의 공은 아니라고 겸손해 했지만, 그녀는 곧장 소신을 지킨 강직한 공무원의 표상으로 부상하며 미국 전역의 스타가 됐다.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은 "신약의 안전성에 대한 켈시 박사의 탁월한 판단력으로 미국내 기형아 탄생이라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며 공무원에게 주는 최고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다소 허술했던 미국의 의약품 허가 제도도 켈시 박사 덕분에 한층 강화됐다. NYT는 "켈시 박사는 기형아 출산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의약품 규제 법률의 길을 열어줬다"고 평가했다.
공무원과 국민의 생명
켈시를 영웅 만든 사회, 이장덕을 죄인 만든 사회
by 슬로우뉴스
프랜시스 켈시라는 미국의 여성공무원이 있었다. 소속은 FDA 즉 미국식품의약국이었고, 하는 일은 신약에 대한 심사 후 판매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고용되자마자 첫 과제로 주어진 일은 임산부의 입덧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나타낸다는 어떤 신약이었다. 켈시는 독일에서 개발한 이 신약을 미국에서 판매해도 되는지를 심사했다.
만능 '임신증후군' 신약, 유럽서 선풍적 인기
약의 이름은 탈리도마이드. 입덧뿐만 아니라 두통, 불면증, 식욕저하 등 거의 모든 임신증후군에 잘 듣는다는 소문에 유럽 각국에서는 선풍적인 반응을 보였고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 진입을 코앞에 둔 상태였다.
제약회사는 이미 유럽 각국에서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으므로 미국에서도 의례적인 심사과정을 거쳐 즉시 판매 허가가 나올 것을 기대했지만, 담당자인 켈시 박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 약이 사람에게는 수면제 효과가 있는 반면에 동물에게는 효과가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켈시는 제약회사 측의 집요한 요구에도 차일피일 시간을 끌며 승인 허가를 미루었다. 영화 [식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미국 제약회사들의 로비와 압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가며 승인 허가를 질질 끌었다.
켈시의 신중함, 미국의 수많은 임산부와 아이 구하다
그러던 차에 유럽 각국에서 팔다리가 없거나 짧은 해표지증(혹은 해표상지증; Phocomelia Syndrome)을 가진 기형아들의 출산이 급증했다. 역학조사 결과 거의 모든 경우가 산모가 임신 중 탈리도마이드(C13H10N2O4)를 복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당연하게 미 당국은 탈리도마이드 판매를 허가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8천 명이 넘는 기형아들이 태어났지만, 미국에서는 켈시 박사의 소신 덕택에 단 17명밖에 태어나지 않았다. 켈시 박사는 “서류를 깔아뭉갠 것 말고는 한 일이 없다”고 겸손해했지만, 미국 정부는 대통령상으로 그의 강직한 업무처리에 보답했다.
한국판 켈시 '공무원 이장덕'
‘이장덕’이라는 한국의 여성 공무원이 있었다. 소속은 화성군청 사회복지과였고, 하는 일은 유아ㆍ청소년용 시설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담당 계장으로 근무하던 1997년 9월, 관내에 있는 씨랜드라는 업체는 청소년 수련시설 설치 및 운영 허가를 이장덕에게 신청했다.
다중이용 시설 중에서도 청소년 대상이므로 철저히 안전대책이 마련되어야 함에도 실사 결과 콘크리트 1층 건물 위에 52개의 컨테이너를 얹어 2, 3층 객실을 만든 가건물 형태로 화재에 매우 취약한 형태였다.
이장덕의 소신, 묻히고 짓밟히다
당연히 신청서는 반려되었지만, 그때부터 온갖 종류의 압력과 협박이 가해졌다. 직계 상사로부터는 빨리 허가를 내주라는 지시가 계속 내려왔다. 민원인으로부터도 여러 차례 회유 시도가 있었고 나중에는 폭력배들까지 찾아와 그와 가족들을 몰살시키겠다는 협박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끝내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1998년 화성군은 그를 민원계로 전보 발령하였고, 씨랜드의 민원은 후임자에 의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씨랜드 측과 관련 공무원들이 앓던 이 빠졌다고 좋아한 지 1년도 채 못되어 씨랜드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였고 결국 19명의 유치원생을 비롯한 23명이 숨지는 참극으로 끝났다.
상식과 소신을 지켜주지 못한 사회의 비극
똑같이 소신에 찬 공무원이었지만 한 사람은 비극을 막고 다른 한 사람은 비극을 막지 못했다.
한 사람은 영웅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지만, 한 사람은 경찰에 제출한 비망록으로 동료들을 무더기로 구속시켰다는 조직 내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한 사람은 90세까지 근무한 후 은퇴하자 조직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하였지만 한 사람은 현재 무얼 하며 지내는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 사회가 그의 소신을 지켜주지 못한 죄를, 그가 일깨워준 교훈을 잊은 죄를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아이들이 대신 감당하고 있다. 우리가 뭐라도 해야 한다면 출발은 여기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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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무원 켈시 사례와 한국 공무원 이장덕 사례는 양 국가의 공무원 조직 전체를 대변하는 사례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공무원의 신중함과 상식 그리고 소신을 켈시 사례에선 국가와 사회가 지켜줬습니다. 하지만 이장덕 사례에선 그렇지 못했죠. 그 결과는 이 글에서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편집자)
NYT는 "켈시 박사는 기형아 출산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의약품 규제 법률의 길을 열어줬다"고 평가했다.
덧) 이 글에서 언급된 미국의 영웅, 프랜시스 켈시 박사가 지난 2015년 8월 7일 10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