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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화제인물

양전닝(陽振寧) - 물리학자 - 54세 연하와 재혼

작성자도무사|작성시간17.02.24|조회수240 목록 댓글 1

양전닝(陽振寧) 1922년 10월 1일 출생


양 력: 1922년 10월 1일

음/평: 1922년 8월 11일 남자


시 일 월 년

@ 壬 己 壬

@ 寅 酉 戌


己 戊 丁 丙 乙 甲 癸 壬 辛 庚 대운: 순행

未 午 巳 辰 卯 寅 丑 子 亥 戌

92 82 72 62 52 42 32 22 12 2.10


대운 시작: 2세 10월 2일

현재 나이: 96 세 (2017년 丁酉년)



1947년 미국 시카고 대학으로 유학 감.

1950년 교사인 여성과 결혼하여 두 아들과 딸을 두었음.

1957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1964년 미국 시민권자가 됨

1971년 미·중 관계가 개선된 이후 중국에 방문교수로 들어온 첫 중국계 과학자가 됐다.

2003년 부인이 사망함.

2004년 83세의 나이로 당시 28세였던 광동외국어무역대학 대학원생 웡판(翁帆)과 결혼함.

2017년 2월 미국 국적을 버리고 중국 국적을 취득함.



중국계 첫 노벨상 양전닝, 95세에 미 국적 버리고 중국인 됐다

[중앙일보] 입력 2017.02.23


중국계 혈통으로는 최초로 노벨상을 받은 양전닝(陽振寧) 박사가 95세의 나이에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돌아가신 부친이 임종 직전까지 내가 국적을 바꾼 것을 용서하지 않으셨다”며 “지난해 말 국적을 바꿨다”고 밝혔다.


양 박사의 귀화 소식은 중국 인터넷에서 최고 화제가 됐고 네티즌들은 “양 박사가 비로소 ‘온전한’ 중국인이 됐다”며 감격어린 반응을 보였다.


과학계 최고 영예인 원사에 등재

54세 연하와 잉꼬부부로도 유명


양 박사의 중국 국적 취득 사실은 최근 중국과학원이 그를 원사(院士)로 등재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확인됐다. 이전까지 양 박사는 정식 원사가 아닌 ‘외국인 원사’로 등재돼 있었다.


원사는 중국 과학계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학자에게 부여되는 최고의 영예 호칭으로 2년 전 노벨생리학상을 수상한 투유유(屠??)도 번번이 원사 심사에 떨어졌을 정도로 문턱이 높다.


1922년 중국 본토 안후이(安徽)성에서 태어난 양 박사는 중국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기 전인 45년 미국 시카고 대학으로 유학을 가 엔리코 페르미의 제자가 됐다.


그는 57년 입자물리학 이론 연구로 역시 중국계인 리정다오(李政道) 박사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64년 미국 시민권자가 됐다가 71년 미·중 관계가 개선된 이후 중국에 방문교수로 들어온 첫 중국계 과학자가 됐다.


양 박사는 학문적 업적 이외에도 많은 화제를 뿌리는 뉴스메이커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게 54세 연하 여성과의 결혼 스토리다.


2003년 부인과 사별한 양 박사는 2004년 82세의 나이로 당시 28세였던 광동외국어무역대학 대학원생 웡판(翁帆)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지금도 잉꼬부부로서의 모습으로 공개석상에 나타나는 일이 잦다.


또 최근에는 중국이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입자가속기를 건설하려는 계획에 대해 “중국 과학계에 전혀 필요없는 일”이라며 “예산낭비에 불과하다”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이는 중국 정부 당국은 물론 대부분 중국 국내 과학자들의 의견과 상충되는 의견이었다.



양전닝(중국어 간체: 杨振宁, 정체: 楊振寧, 병음: Yáng Zhènníng, 한자음: 양진녕, 영어: Chen-Ning Franklin Yang 첸닝 프랭클린 양[*], 1922년 10월 1일 ~ )은 중국계 미국인 이론물리학자이다. 195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생애[편집]


1922년 중국 안후이 성 허페이에서 수학자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베이징에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허페이로 옮겼으며 1938년에는 윈난 성 쿤밍에서 칭화 대학, 베이징 대학, 난카이 대학의 연합대학인 국립 시난 연합대학에 입학하였다. 1942년 동 대학을 졸업하고 2년간 통계물리에 관한 연구로 대학원 생활을 한 후 1944년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1945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대학교에서 에드워드 텔러의 지도 하에 1948년 박사 학위를 받고 엔리코 페르미의 연구원으로 일했다. 1949년에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옮겨 리정다오와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1964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1966년에는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으로 옮겨 물리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현재는 양전닝 이론물리학 연구소로 알려진 그 곳의 새로운 이론 물리연구소장으로 취임했다. 1999년에 스토니브룩에서 은퇴하여 명예 교수가 되었다. 이후 베이징의 칭화대학교로 옮겨 칭화 대학 고등 연구 센터(CASTU)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1970년대에 록펠러 대학교와 미국 과학 진흥 협회 이사, 1978년부터는 샌디에이고에 있는 소크 생물학 연구소의 이사를 역임했다. 또한 이스라엘의 비어시버에 있는 벤구리온 대학교의 이사로도 활동했다. 1957년에 아인슈타인상을 받았으며 1980년에는 럼퍼드상을 받았다.


1950년 교사인 여성과 결혼하여 두 아들과 딸을 두었으며 2003년 부인의 사망 이후 2004년에 82세의 나이로 당시 28세였던 광둥 외국어 무역 대학 대학원생 웡판과 결혼해 화제가 되었다.[1]


학력[편집]

중화민국 윈난 성 쿤밍 시난 연합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중화민국 윈난 성 쿤밍 시난 연합대학교 대학원 졸업 (이학석사)

미국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 졸업 (이학박사)


명예 박사 학위[편집]

미국 록펠러 대학교 명예 이학박사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칭화 대학교 명예 이학박사

홍콩 중원 대학교 명예 이학박사


연구[편집]

양전닝은 주로 입자물리학자로 활동하면서 통계물리학, 응집물질물리학 등에도 공헌하였다. 1956년에는 리정다오와 함께, 약한상호작용에 의한 홀짝성의 비보존 이론[2] 을 제창하였고, 즉시 우젠슝에 의해 실험으로 실증되었다. 이 업적으로 그는 바로 다음 해인 1957년 리정다오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로버트 밀스와 함께 현대 입자물리학에서 게이지 이론을 기본으로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기본 바탕이 되는 양-밀스 이론[3] 을 정립하였다.

수상

노벨 물리학상 (1957)

럼포드 상 (1980)

미국과학훈장 (1986)

프랭클린 메달 (1993)

아인슈타인 메달(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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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도무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2.24 손녀 정도의 여자와 재혼을 하였는데... 재복이 좋은 사주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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