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제 [萬曆帝, 1563.9.14 ~ 1620.8.18]
양력 : 1563년 9월 14일
음력 : 1563년 8월 17일
시 일 월 년
辛 癸 辛 癸
酉 亥 酉 亥
72 62 52 42 32 22 12 2
癸 甲 乙 丙 丁 戊 己 庚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경금당령, 자축공망, 1620년(58세, 경신년) 사망.
만력제 萬曆帝 1563 ~ 1620
중국 명(明)나라 제14대 황제. 재위 1572∼1620. 성명은 주익균(朱翊鈞).
13대 황제 융경제(隆慶帝)의 셋째아들. 어머니는 귀비이씨(貴妃李氏: 후에 孝定皇太后).
1568년 황태자가 되고, 융경제가 급사하자 겨우 10세에 즉위하였다.
그 때문에 선제(先帝)의 부탁을 받고 대학사(大學士) 장거정(張居正)이 수보(首輔)가 되어 정무 전반을 집행했다.
그가 묘당에서 신하의 상주(上奏)를 들은 것은 10일 중의 3. 6. 9의 평일 오전이어서, 한 달에 9일에 지나지 않았고, 그 밖의 날은 장거정의 가르침을 받아 면학에 힘썼다.
장거정은 내치에서는 강기(綱紀)의 숙정, 태관(怠官)의 정리, 황허 하류의 치수 등에 민완을 발휘했고, 밖으로는 척계광(戚繼光). 이성량(李成梁)을 둥베이(東北) 지방과 요동, 몽고 고원에 파견하여 변방 수비의 강화에 주력하게 함으로써 북로(北虜)의 침입은 거의 종지부를 찍었다.
또 저장. 푸젠. 광둥의 해방(海防)에도 주력하여 남왜(南倭)의 움직임도 봉쇄했다.
장거정은 80년부터 은전(隱田)의 적발과 탈세 방지를 목적으로 전국적인 토지측량을 시작했으나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성격이 강직한 장거정은 정책 수완 면에서도 명을 대표하는 명재상(名宰相)이었으나, 만력제에게는 두려운 스승이었다.
만력제가 20세가 된 해인 82년에 장거정이 죽자 만력제는 자유의 몸이 되어, 정무를 돌보지 않고 사치에 빠졌다.
내시를 전국에 파견해서 은산(銀山) 등을 캐거나 혹은 상세(商稅)를 더 많이 징수하게 했다. 이것이 이른바 광세(鑛稅)의 화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 결과 쑤저우(蘇州)와 산둥(山東)의 린칭(臨淸) 등에 민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또 이보다 앞서 92년에는 악이다사(鄂爾多斯)의 보바이가 반기를 들었고, 97년에는 구이저우(貴州)·보저우(播州)의 사관 양응룡(楊應龍)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2번의 반란을 전후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임진왜란, 1592-1598)이 있어 이에 구원군을 파견했다. 이를 만력 삼대정(萬曆三大征)이라고 하는데, 그 군비 조달을 위해 임시로 증세(增稅)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광세(鑛稅) 문제와 총비(寵妃) 정귀비(鄭貴妃) 소생의 셋째아들 상순(常洵)을 편애하였기 때문에 황태자 책립 문제 등으로 동림파(東林派)대 비동림파(非東林派)의 당쟁이 격화되었고 명나라에는 쇠운(衰運)이 깃들었다
시호는 현황제(顯皇帝). 묘호(廟號)는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 Wanli]
(병)Wanli (웨)Wanli.
1563. 9. 14 ~ 1620. 8. 18.
중국 명대(明代:1368~1644) 말기의 황제(1573~1620 재위).
이름은 주익균(朱翊鈞), 묘호는 신종(神宗), 시호는 현제(顯帝).
만력제는 일종의 은둔자였으며 국정에는 태만했다. 그결과 중앙과 지방 관료들의 전횡과 부정부패가 날로 심해지고, 재정은 위기에 봉착했다.
특히 '만력 3대정(三大征)'으로 발생한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만력제는 환관을 전국에 파견하여 광산을 열고 상세(商稅)를 징수하도록 했다. 그
러나 이를 위해 파견된 환관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해 이른바 '광세(鑛稅)의 화(禍)','직용(織庸)의 변(變)'과 같은 민란이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또한 태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동림당(東林黨)과 비동림당(非東林黨)의 당쟁이 격화되어 정치적 혼란도 더욱 심해졌다.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배경으로 산시 성[陝西省]을 비롯한 북부 여러 성에서 농민반란이 발생했으며, 지방에는 유적(流賊)과 난민(亂民)이 대량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현상은 만주족의 침입에 호조건으로 작용하여 마침내 만주족은 청(淸:1644~1911)을 건국하고 중국으로 쳐들어와 중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만력제 시기에는 서양 선교사들의 중국 진출이 눈에 띈다. 서양 선교사들은 그 이전부터 여러 차례 중국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601년에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만력제로부터 거주와 포교의 허가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중국 진출에 성공했다.
신종 만력제
중국 명(明)나라 제14대 황제(1572∼1620). 만력제라고도 한다. 성명은 주익균. 신종은 묘호이다.
13대 황제 융경제의 셋째아들로 1568년 황태자가 되었으며, 융경제가 급사한 뒤 10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때문에 선제(先帝)의 부탁을 받아들여서 대학사 장거정이 수보가 되어 정무 전반을 집행하였다.
장거정은 성격이 강직하고 정책수완도 명나라를 대표하는 명재상이었으며, 신종에게는 엄격한 스승 같은 존재였는데 82년에 그가 죽자 황제는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정무를 내던지고 사치에 빠졌다.
환관을 전국에 파견해서 은광 등을 개척하고, 또 상세를 더 늘려서 징수토록 했다. 그 결과 쑤저우와 산둥의 린칭 등에 민변이 계속되었고, 이에 앞서 92년에는 오르도스의 보바이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97년에는 구이저우·보저우의 토관 양응룡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2가지 반란을 전후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1592-1598)을 일으키자 거기에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이들을 가리켜셔 만력삼대정이라고 하는데, 그 군비조달을 위해 임시 증세를 단행했고, 광세 문제·황태자 책립문제 등으로 동림파와 비동림파의 당쟁이 격화되어 정치공백이 생겨서 명나라는 단숨에 쇠운으로 돌아섰다.
능묘는 <명십삼릉(明十三陵)> 중 정릉으로, 1956∼57년에 걸쳐서 발굴되었으며 지하궁전으로 알려져 있다. 시호는 현황제.
장거정 생전에는 한달의 9번(그것도 오전에만) 정무를 돌보았고 장거정 사후에는 모두 신하들에게 맡겨둔 채 탱자탱자 놀며 20 년 넘도록 '한번도'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후일 정격사건이 발생하여 사랑하는 정귀비와 셋째 아들이 궁지에 몰리자 20여년만에 조정에 모습을 드러냈다는...(대부분의 신하들이 그때 황제를 처음 보았답니다...)
明神宗(1563~1620) 1563/9/14 (八月十七日) 酉时生. [癸亥.辛酉.癸亥.辛酉.]
辛 癸 辛 癸
酉 亥 酉 亥
竟有如此精美的八宇,只有天造地設之意,格局極純而無雜質,一片金水相生,專旺格成,貴為天子,此為古代皇帝之造。
양력 : 1563년 9월 14일
음력 : 1563년 8월 17일
시 일 월 년
辛 癸 辛 癸
酉 亥 酉 亥
72 62 52 42 32 22 12 2
癸 甲 乙 丙 丁 戊 己 庚
丑 寅 卯 辰 巳 午 未 申
경금당령, 자축공망, 1620년(58세, 경신년) 사망.
만력제 萬曆帝 1563 ~ 1620
중국 명(明)나라 제14대 황제. 재위 1572∼1620. 성명은 주익균(朱翊鈞).
13대 황제 융경제(隆慶帝)의 셋째아들. 어머니는 귀비이씨(貴妃李氏: 후에 孝定皇太后).
1568년 황태자가 되고, 융경제가 급사하자 겨우 10세에 즉위하였다.
그 때문에 선제(先帝)의 부탁을 받고 대학사(大學士) 장거정(張居正)이 수보(首輔)가 되어 정무 전반을 집행했다.
그가 묘당에서 신하의 상주(上奏)를 들은 것은 10일 중의 3. 6. 9의 평일 오전이어서, 한 달에 9일에 지나지 않았고, 그 밖의 날은 장거정의 가르침을 받아 면학에 힘썼다.
장거정은 내치에서는 강기(綱紀)의 숙정, 태관(怠官)의 정리, 황허 하류의 치수 등에 민완을 발휘했고, 밖으로는 척계광(戚繼光). 이성량(李成梁)을 둥베이(東北) 지방과 요동, 몽고 고원에 파견하여 변방 수비의 강화에 주력하게 함으로써 북로(北虜)의 침입은 거의 종지부를 찍었다.
또 저장. 푸젠. 광둥의 해방(海防)에도 주력하여 남왜(南倭)의 움직임도 봉쇄했다.
장거정은 80년부터 은전(隱田)의 적발과 탈세 방지를 목적으로 전국적인 토지측량을 시작했으나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성격이 강직한 장거정은 정책 수완 면에서도 명을 대표하는 명재상(名宰相)이었으나, 만력제에게는 두려운 스승이었다.
만력제가 20세가 된 해인 82년에 장거정이 죽자 만력제는 자유의 몸이 되어, 정무를 돌보지 않고 사치에 빠졌다.
내시를 전국에 파견해서 은산(銀山) 등을 캐거나 혹은 상세(商稅)를 더 많이 징수하게 했다. 이것이 이른바 광세(鑛稅)의 화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 결과 쑤저우(蘇州)와 산둥(山東)의 린칭(臨淸) 등에 민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또 이보다 앞서 92년에는 악이다사(鄂爾多斯)의 보바이가 반기를 들었고, 97년에는 구이저우(貴州)·보저우(播州)의 사관 양응룡(楊應龍)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2번의 반란을 전후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임진왜란, 1592-1598)이 있어 이에 구원군을 파견했다. 이를 만력 삼대정(萬曆三大征)이라고 하는데, 그 군비 조달을 위해 임시로 증세(增稅)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광세(鑛稅) 문제와 총비(寵妃) 정귀비(鄭貴妃) 소생의 셋째아들 상순(常洵)을 편애하였기 때문에 황태자 책립 문제 등으로 동림파(東林派)대 비동림파(非東林派)의 당쟁이 격화되었고 명나라에는 쇠운(衰運)이 깃들었다
시호는 현황제(顯皇帝). 묘호(廟號)는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 Wanli]
(병)Wanli (웨)Wanli.
1563. 9. 14 ~ 1620. 8. 18.
중국 명대(明代:1368~1644) 말기의 황제(1573~1620 재위).
이름은 주익균(朱翊鈞), 묘호는 신종(神宗), 시호는 현제(顯帝).
만력제는 일종의 은둔자였으며 국정에는 태만했다. 그결과 중앙과 지방 관료들의 전횡과 부정부패가 날로 심해지고, 재정은 위기에 봉착했다.
특히 '만력 3대정(三大征)'으로 발생한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만력제는 환관을 전국에 파견하여 광산을 열고 상세(商稅)를 징수하도록 했다. 그
러나 이를 위해 파견된 환관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해 이른바 '광세(鑛稅)의 화(禍)','직용(織庸)의 변(變)'과 같은 민란이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또한 태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동림당(東林黨)과 비동림당(非東林黨)의 당쟁이 격화되어 정치적 혼란도 더욱 심해졌다.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배경으로 산시 성[陝西省]을 비롯한 북부 여러 성에서 농민반란이 발생했으며, 지방에는 유적(流賊)과 난민(亂民)이 대량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현상은 만주족의 침입에 호조건으로 작용하여 마침내 만주족은 청(淸:1644~1911)을 건국하고 중국으로 쳐들어와 중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만력제 시기에는 서양 선교사들의 중국 진출이 눈에 띈다. 서양 선교사들은 그 이전부터 여러 차례 중국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601년에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만력제로부터 거주와 포교의 허가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중국 진출에 성공했다.
신종 만력제
중국 명(明)나라 제14대 황제(1572∼1620). 만력제라고도 한다. 성명은 주익균. 신종은 묘호이다.
13대 황제 융경제의 셋째아들로 1568년 황태자가 되었으며, 융경제가 급사한 뒤 10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때문에 선제(先帝)의 부탁을 받아들여서 대학사 장거정이 수보가 되어 정무 전반을 집행하였다.
장거정은 성격이 강직하고 정책수완도 명나라를 대표하는 명재상이었으며, 신종에게는 엄격한 스승 같은 존재였는데 82년에 그가 죽자 황제는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정무를 내던지고 사치에 빠졌다.
환관을 전국에 파견해서 은광 등을 개척하고, 또 상세를 더 늘려서 징수토록 했다. 그 결과 쑤저우와 산둥의 린칭 등에 민변이 계속되었고, 이에 앞서 92년에는 오르도스의 보바이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97년에는 구이저우·보저우의 토관 양응룡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2가지 반란을 전후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1592-1598)을 일으키자 거기에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이들을 가리켜셔 만력삼대정이라고 하는데, 그 군비조달을 위해 임시 증세를 단행했고, 광세 문제·황태자 책립문제 등으로 동림파와 비동림파의 당쟁이 격화되어 정치공백이 생겨서 명나라는 단숨에 쇠운으로 돌아섰다.
능묘는 <명십삼릉(明十三陵)> 중 정릉으로, 1956∼57년에 걸쳐서 발굴되었으며 지하궁전으로 알려져 있다. 시호는 현황제.
장거정 생전에는 한달의 9번(그것도 오전에만) 정무를 돌보았고 장거정 사후에는 모두 신하들에게 맡겨둔 채 탱자탱자 놀며 20 년 넘도록 '한번도'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후일 정격사건이 발생하여 사랑하는 정귀비와 셋째 아들이 궁지에 몰리자 20여년만에 조정에 모습을 드러냈다는...(대부분의 신하들이 그때 황제를 처음 보았답니다...)
明神宗(1563~1620) 1563/9/14 (八月十七日) 酉时生. [癸亥.辛酉.癸亥.辛酉.]
辛 癸 辛 癸
酉 亥 酉 亥
竟有如此精美的八宇,只有天造地設之意,格局極純而無雜質,一片金水相生,專旺格成,貴為天子,此為古代皇帝之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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