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李珥]
양력 : 1537년 1월 17일
음력 : 1536년 12월 26일
시 일 월 년
壬 丁 辛 丙
寅 未 丑 申
56 46 36 26 16 6
丁 戊 己 庚 辛 壬
未 午 巳 辰 卯 寅
인묘공망, 기토당령, 1584년 정월(47세, 계미년) 사망.
이이[李珥]
1536 (중종 31) ~ 1584 정월 (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개요]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생애]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어려서는 주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548년(명종 3)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1551년 5월(16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3년간 시묘(侍墓)했다.
1554년 성혼(成渾)과 교분을 맺었다. 그해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스스로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유학에 몰두했다.
1557년 9월에 성주 목사 노경린의 딸 곡산 노씨와 혼인하다.
1558년 23세 되던 해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가서 당시 58세였던 이황(李滉)을 방문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경공부(敬工夫)나 격물(格物)·궁리(窮理)의 문제를 왕복문변(往復問辨)했다.
156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기까지 모두 9번에 걸쳐 장원을 하여 세간에서는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었다.
1564년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된 뒤 예조좌랑·정언·이조좌랑·지평 등을 지냈다.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사직했다가 1571년 다시 청주목사로 복직했고, 다음해 다시 해주로 낙향했다.
1573년 직제학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서 참찬관을 겸직했으며, 다음해 우부승지·병조참지·대사간을 지낸 뒤 병으로 사직했다.
그 후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직하고, 율곡과 석담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1581년 대사헌·예문관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월 49세를 일기로 죽었다.
[철학사상]
이이의 이기론(理氣論)이 가지는 특색은 다음과 같다(→ 성리학, 주기론). 이(理)는 무형무위(無形無爲)한 존재이며 기(氣)는 유형유위(有形有爲)한 존재로서, 이는 기의 주재자(主宰者)이고 기는 이의 기재(器材)이다.
즉 이는 이념적 존재이므로 시공을 초월한 형이상적(形而上的) 원리로서 만물에 공통적인 것이며, 기는 질료적(質料的)·작위적(作爲的) 존재로서 시공의 제한을 벗어나지 못하는 형이하적(形而下的) 기재로 국한적인 것이다.
이이는 이와 같이 무형과 유형의 차이로 이통(理通)과 기국(氣局)을 설명하고, 유위와 무위의 차이로 기발(氣發)과 이승(理乘)을 설명했다(→ 이통기국론). 이처럼 이이는 이존론(理尊論)을 주장하는 이황과 달리 이의 능동성을 부정하고, 이기의 부잡(不雜)보다는 불리(不離)를 강조했다.
즉 이기가 서로 떨어질 수는 없지만, 묘합(妙合)한 가운데 이는 이이고 기는 기여서 서로 협잡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일물(一物)이 아닌 것이며, 이는 이이고 기는 기라고 하더라도 이와 기는 혼륜무간(渾淪無間)해서 선후와 이합이 없기 때문에 이물(二物)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따라서 이와 기는 서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이와 기의 성질을 구분하여 형이상·형이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발이승일도설).
이러한 그의 이기관은 그대로 인간관에 반영된다. 먼저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면, 그는 칠정은 사단을 포괄한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따라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본래 하나의 성으로 여기고, 이만을 지칭할 때에는 본연지성이라 하고 이와 기를 서로 관련시켜 파악할 때에는 기질지성이라 한다고 했다.
기질지성은 본연지성을 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인간의 모든 감정을 총괄하여 말하면 칠정이고 그중에서 특히 선일변(善一邊)만을 지칭하면 사단으로서, 칠정은 사단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사단과 칠정은 근원적으로 둘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단은 도심이라 할 수 있고, 칠정은 인심과 도심을 총괄해서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심에는 천리(天理)도 있고 인욕(人欲)도 있어서 인심과 도심은 근원적으로 둘이 아니며, 인심과 도심은 다만 도의(道義)를 위해서 발했는가, 육체적 욕망을 위해서 발했는가에 따라 구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는 인욕을 천리에 배치된다고 보는 기존의 천리인욕설과는 대비되며, 인간의 의식주에 대한 초보적인 욕구를 당연시함으로써 생산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긍정하는 견해로 이어진다.
다음으로 이이는 모든 사물이 변화한다고 여겼다. 그는 변화의 기초에 음양에 구비되어 있는 동(動)과 정(靜)의 속성과 그 음양을 동정하게 하는 법칙성이 작용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운동변화의 원인을 기 자체의 속성 대신 소이연(所以然)으로 설명했다.
주목되는 것은 그가 변화에 대한 이해를 사회현상에 적용한 것이다. 그의 변법사상의 기초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회개혁사상]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가 중쇠기(中衰期)로서, 오랫동안 도학(道學)이 행해지지 않아 시폐(時弊)가 쌓여 있으므로 이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때 시폐는 공물납부와 진상의 폐해, 군역의 불균, 관리들의 부정 등이었다.
이에 그는 공물분정을 공평하게 하고 진상을 경감할 것을 주장했으며, 나아가 잡다한 일체의 공물을 폐기하고 전답의 면적에 따라 쌀을 징수하는 수결수미법(隨結收米法)을 전국에 시행할 것을 제안했다.
호조의 관리로 하여금 전국의 한정(閑丁)을 조사·색출하여 이들을 군적에 편입시키는 한편 변장(邊將)들이 군졸들을 수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생활을 그 지방의 창고곡식으로 보장해주는 방안과 군졸들이 휴식할 수 있도록 병역교대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진전개간(陳田開墾)을 장려하기 위해 휴한지나 황무지를 개간할 경우 실제 경작면적에 따라 세를 부과할 것을 주장했으며, 파산상태에 빠져 있는 국가재정을 바로잡기 위해서 수입을 헤아려 지출할 것과 관료기구를 간소화하고 낭비를 근절하여 국가재산의 손실을 방지할 것을 제안했다.
이이는 이러한 제반 시폐의 개혁은 시세(時勢)가 마련되어야 실현될 수 있으며, 그 실현여부는 군주의 개혁하려는 입지(立志)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현신(賢臣)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렸다고 여겼다. 특히 가장 이상적인 통치형태로서 도학이 행해지는 삼대지치(三代之治)의 회복은 군주 일인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이때 도학이란 격치(格致)로써 선(善)을 밝히고 성정(誠正)으로써 몸을 닦아 몸에 쌓이면 덕(德)이 되고 그것을 정사에 베풀면 왕도(王道)가 되는 학문이다. 이처럼 이이는 개인의 윤리도덕규범·가치규범이 그대로 확충되어 통치규범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이이는 성학(聖學)의 이름으로 군주를 교도하여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군주개조론인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저술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그리고 시폐의 개혁은 단지 시폐의 혁거(革去)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통해 양민(養民)에 이르는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백성을 주자학적 질서에 순응하도록 교화시키고자 했다.
결국 그의 개혁론은 시폐의 개혁, 양민, 그리고 백성의 교화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의 개혁안의 시행여부를 결정하는 개혁기구인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하자는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실정에서 향약은 그의 개혁사상을 실천하는 한 방도가 될 수 있었다.
그는 파주향약의 서문(序文)을 짓고 서원향약(西原鄕約)·해주향약(海州鄕約)·사창계향약(社倉契鄕約)·해주일향약속(海州一鄕約束) 등을 만들었다.
이 향약의 사회적 기능은 지방사족의 주도로 농업생산층이 토지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고 향촌사회의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유교적 윤리 및 가치관 등을 향촌민에게 주입시켜 사족 중심의 향촌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이의 개혁사상은 16세기 사회발전의 진전에 따라 동요하는 사회체제와 신분질서를 다시 주자학적 세계관으로 고정시키고자 한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이이는 점진적으로 각종 제도를 개혁하고 향촌질서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다.
[정치운영론]
이이는 붕당(朋黨)을 국가정치를 문란하게 하는 요소로서가 아니라 소인이 무리를 이루듯, 뜻을 같이 하는 군자들끼리 집단을 이루는 불가피한 정치의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주자의 붕당론에 근거한 군자소인변(君子小人辨) 위주의 붕당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붕당긍정론에서 출발하여 군자당·소인당의 엄격한 분별과 진퇴를 강조함에 의해 군자당으로 자부하는 사림의 정치활동을 정당화해주는 논리였다.
그러나 심의겸(沈義謙)·김효원(金孝元) 사이의 시비로 인하여 분붕(分朋)의 조짐을 보이던 1575년 이후 이이는 그 해소에 진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붕당론을 수정하게 된다.
이이는 동인·서인이 모두 사류(士類)이며 그 분열은 의견의 차이에서 연유한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입장인 군자소인변은 적용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신 동서를 타파하는 방법으로 양시양비설(兩是兩非說)과 보합조제론(保合調劑論)을 제시하게 된다.
먼저 동인·서인 명목 성립의 기초가 된 이른바 심의겸· 김효원 시비에 대해 양시양비론을 적용하여 비생산적인 논쟁을 마무리 짓고, 함께 조정에 나와 보다 막중한 국사와 민생문제에 중지를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583년 자신을 소인으로 공격하는 삼사의 언관에 대해서 엄정한 시비분별을 요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모든 논쟁에서 양시양비론을 적용시킨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동인과 서인에 군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인도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당론 위주의 인사정책에 반대하고 당색에 구애되지 않는 조용(調用)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라 청탁(淸濁)을 분별한 것이었고, 집권세력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보합조제론은 수십 년에 걸친 훈척과의 투쟁에서 체득한, 집권당을 견제할 수 있는 상대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과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사류의 중지를 모아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이이의 사상은 17세기 이후 그의 문인들로 형성된 서인 노론계에 의해 계승되어 이들의 정치사상·정국운영의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 격렬하게 진행되던 봉건사회 해체 양상에 신진관료·지주 중심의 정치사회 운영론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이들은 이이의 사상이 주자학을 정통으로 계승한 것임을 밝히는 데 주력하는 한편, 이황이나 조식(曺植) 등의 사상을 계승한 학파·정파를 배제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17~18세기의 격변기에 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지는 이이학파는 이같은 작업에 토대를 놓음으로써 이후 정치·사상계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했다.
저서로는 〈성학집요〉·〈격몽요결〉·〈소학집주개본 小學集注改本〉·〈중용토석 中庸吐釋〉·〈경연일기 經筵日記〉 등이 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율곡의 연보
1536년(중종 31년) 1세 음력 12월 26일에 강릉 북평촌(현 죽헌동) 외가인 오죽헌 몽룡실에서 태어나다.(선생의 원래 고향은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이다) 1536년 칼뱅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킴.
1538년(중종 33년) 3세, 말과 글을 배우다. 하루는 외할머니 이씨의 물음에 "석류는 껍질 속에 부스러진 붉은 구슬을 싸고 있네(石榴皮과碎紅珠)"라고 옛 시귀절을 읊다.
1540년(중종 35년) 5세,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이 들자 외조부 사당에 들어가 쾌유를 기도하다. 1540년 최초의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가 교황으로부터 공인을 받음.
1541년(중종 36년) 6세, 강릉 외가에서 어머니를 따라 서울 수진방(壽進坊: 현 청진동)에 있는 서울 집으로 올라오다.
1542년(중종 37년) 7세, 어머니에게 사서(四書)를 배우다. 〈진복창전(陳復昌傳)〉을 짓다.
1543년(중종 38년) 8세, 본가인 파주 율곡리의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짓다. 1543년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地動說)을 발표. 1543년 포르투갈인이 일본 다네가섬[種子島]에 표착, 신무기 총을 전함.
1544년(중종 39년) 9세, 이륜행실록》을 보다가 옛날 장공예(張公藝)의 이야기를 읽고 그를 사모하여 형제들이 부모를 받들고 함께 사는 그림을 그려놓고 바라보다.
1545년(중종 40년) 10세, 강릉 외가에서 〈경포대부〉를 짓다. 1545년 트리엔트 종교회의(~1563). 카톨릭의 정통성 재확인 및 신교의 확대 방지
1546년(명종 1년) 11세, 아버지 이원수공이 병환이 나자 팔을 찔러 피를 드리고 사당에 들가서 쾌유를 기도하다.
1548년(명종 3년) 13세,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다. 1547년 9월 29일 에스파냐의 극작가 세르반테스 탄생(1605년 유명한 '돈 키호테' 출판)
1551년(명종 6년) 16세, 5월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별세하다. 이 해에 〈어머니의 행장(先비行狀)〉을 짓다.
1553년(명종 8년) 18세, 가을에 시묘살이를 마치고 관례(冠禮:성인식)를 행하다.
1554년(명종 9년) 19세, 우계 성혼과 교분을 맺다. 이 해 3월에 금강산에 입산하다.
1555년(명종 10년) 20세, 봄에 금강산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다. 강릉 외가로 돌아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성학에 전심하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의 종교화의(宗敎和議) 성립으로 루터파가 공인되어 신교탄생.(그러나 칼뱅파는 인정하지 않음)
1556년(명종 11년) 21세, 봄에 서울 집으로 돌아오다. 이 해에 한성시(漢城試)에 장원 급제하다.
1557년(명종 12년) 22세, 9월에 성주 목사 노경린의 딸 곡산 노씨와 혼인하다.
1558년(명종 13년) 23세, 봄에 예안(안동) 도산에 가서 퇴계를 만나 도를 묻다. 이 해 겨울 별시해(別試解)에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급제하다. 1558년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1세 즉위(~1603)
1560년(명종 15년) 25세, 이 해에 한 장흥서(韓長興) 끝에 발문을 쓰고 지야서회(至夜書懷)라는 시(詩)를 짓다.
1561년(명종 16년) 26세, 5월에 아버지 이원수공이 별세하다.
1564년(명종 19년) 29세, 7월에 생원, 진사에 급제하다. 8월에 명경과(明經科)에 〈역수책(易數策)〉으로 장원 급제,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어 첫 벼슬길에 나아가다. 1562년 프랑스에서 위그노전쟁 일어남(~1598). 1564년 미켈란젤로 사망. 1564년 4월 23일, 영국에서 세계 제일의 극작가 윌리암 셰익스피어 탄생.
1565년(명종 20년) 30세, 봄에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옮기다. 8월에 요승 보우와 외척 윤원형의 잘못을 상소하여 논박하다. 11월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않다. 1565년 중국 쓰촨(四川)에서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난이 일어남.
1566년(명종 21년) 31세, 3월에 다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다. 5월에 동료와 함께〈시국의 급선무 세 가지(時務三事)〉를 상소하다. 겨울에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어 관청의 흐린 행습을 바로잡다.
1567년(명종 22년) 32세, 6월에 명종이 승하하자 퇴계 선생에게 글을 올려 국장을 의논하고 〈명종대왕의 만사(輓詞)〉를 짓다. 10월에 기대승의 편지를 받고 답하다. 1567년 네덜란드 독립전쟁 시작(~1648).
1568년(선조 원년) 33세, 2월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성균관 직강이 되다. 4월에 장인 노경린 공이 별세하다. 5월에 우계선생과 지선(至善)·중(中) 및 안자(顔子)의 격치성정(格致誠正)에 대한 설을 논하다. 가을에 명나라로 가는 천추사 서장관(千秋使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수도를 다녀오다. 겨울에 돌아와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敎理)에 제수받고 지제교(知製敎)겸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이 되어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다. 11월에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외할머니 이씨의 병환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내려가다.
1569년(선조 2년) 34세, 6월에 다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되어 7월에 조정에 돌아오다. 9월에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올리고 동료와 함께 〈시무구사(時務九事)〉를 상소하다. 10월에 임금에게 특별휴가를 얻어 강릉으로 가자 외할머니 이씨가 별세하다(90세). 1569년 메르카토르, 세계 지도 완성.
1570년(선조 3년) 35세, 4월에 교리(校理)에 임명되어 서울로 돌아오다. 8월에 맏형 죽곡(竹谷) 선(璿)이 별세하다. 10월에 병으로 사퇴하고 해주 들마을(야두촌) 처가로 돌아가다. 12월에 퇴계의 부음을 듣고 아우 옥산으로 하여금 조문케 하다.
1571년(선조 4년) 36세, 정월에 해주에서 파주 율곡리로 돌아가 이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다. 여름에 다시 교리에 임명되어 불려 올라와 홍문관 부응교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弘文館 副應敎 知製敎 兼 經筵侍讀官) 춘추관 편수관(春秋館 編修 官)으로 옮겼으나 모두 사퇴하고 해주로 돌아가다. 이때 학자들과 해주 고산(高山) 석담구곡(石潭九曲)을 구경하고 은거할 계획을 세우다. 6월에 청주목사(淸州牧使)에 임명되어 손수 〈서원향약(西原鄕約)〉을 지어 고을 백성을 인솔하다. 1571년 10월 7일 레판토 해전 (지중해를 제압하고 있던 터키가 키프로스섬을 빼앗자, 신성동맹(神聖同盟) 함대가 터키 함대를 격파한 해전으로서, 문호 세르반테스는 병사로서 참전하여 부상당하고, 뒤에 이 해전을 ‘전에 없는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하였다.)
1572년(선조 5년) 37세, 3월에 병으로 사퇴하고 서울로 올라오다. 여름에 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율곡리로 돌아가다. 이때 우계선생과 이기(理氣), 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人心道心)을 논하다. 8월에 원접사 종사관(遠接使 從事官), 9월에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 12월에 홍문관 응교(弘文館 應敎), 홍문관 전한(弘文館 典翰)에 각각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다. 1572년 8월 24일 파리에서 성(聖) 바솔로뮤 축일의 대학살로 인해 위그노전쟁 재개. 1572년 중국에서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 즉위(~1620).
1573년(선조 6년) 38세, 7월에 홍문관 직제학에 임명되어 병으로 사퇴코자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부득이 올라와 세 번 상소하여 허락을 받아 8월에 율곡리로 돌아가다. 거기서 〈감군은(感君恩)〉을 짓다. 9월에 다시 직제학에 임명되어 올라오다. 겨울에 동료들과 〈옥당 진계 차(玉堂陳戒箚)〉를 올려 재앙 없앨 방법을 논하다. 그 뒤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承政院 同副承旨 知製敎 兼 經筵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 修撰官)에 임명되다. 1573 일본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멸망.
1574년(선조 7년) 39세, 정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되어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올리다. 3월에 병조참지(兵曹參知),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에 임명되다. 4월에 병으로 우부승지를 사퇴하고 율곡리로 돌아가다. 6월에 장남 경림(景臨)이 출생하다. 10월에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황해도의 민폐를 개혁할 것을 상소하다.
1575년(선조 8년) 40세, 3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율곡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에 임명되다. 9월에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지어 올리다.
1576년(선조 9년) 41세, 2월에 율곡리로 돌아가다. 10월에 해주 석담(石潭)에 청계당(聽溪堂)을 짓다.
1577년(선조 10년) 42세, 정월에 해주 석담(石潭)에서 가족들을 모아 놓고 〈같이 살며 서로 경계하는 글(同居戒辭)〉를 지어 읽히다. 12월에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완성하고, 〈해주 향약(海州鄕約)〉과〈사창(社倉)〉을 의논하여 세우다. 1577년 영국인 탐험가 드레이크, 세계일주 항해길에 나섬(~1580). 캘리포니아 해안에 도착.
1578년(선조 11년) 43세, 해주 석담(石潭)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짓다. 문헌서원(文獻書院)의 학규(學規)를 짓다. 3월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올라왔다가 사퇴하고 4월에 율곡리로 돌아가다. 5월에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로 사퇴하고 만언소(萬言疏)인 〈응지논사 소(應旨論事疏)〉를 지어올리다. 7월에 토정(土亭) 이지함의 상에 조문하다.
1579년(선조 12년) 44세, 3월에 〈도봉서원기(道峯書院記)〉를 짓고 〈소학집주(小學集註)〉를 완성하다. 3월에 차남 경정(景鼎)이 출생하다. 5월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로 사퇴하고, 동서 붕당의 폐해를 깨끗이 하고 화합하여 오직 어진 사람을 등용할 것을 간청하다. 7월에 〈구용첩(九容帖)의 발문(跋文)〉을 짓다. 1579년 네덜란드 북부 7개주 유트레히트동맹 결성(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일환).
1580년(선조 13년) 45세, 5월에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짓다. 12월에 대사간에 임명되어 올라오다. 이 해에 정암(靜菴) 조광조의 묘지(墓誌)를 짓다. 1580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합병을 단행(~1640).
1581년(선조 14년) 46세, 정월에 상소를 올려 정사(政事)를 닦아 천재(天)를 방지하기를 간청하다. 4월에 임금에게 청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는 방책(救民之策)을 회의하게 하다. 6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겸 예문관제학으로 승진되고 동지중추부사를 맡다. 10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승진되고 조광조, 이황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건의하다. 또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다. 11월에 홍문관(弘文館)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에 임명되다. 이 해에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다. 1581년 네덜란드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선언. 북부 7개주 연방공화국 형성.(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립승인)
1582년(선조 15년) 47세, 정월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다. 7월에 어명으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김시습전(金時習傳)〉과 〈학교모범(學校模範)〉및 사목(事目)을 지어 올리다. 8월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다. 9월에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특진하고 의정부 우찬성(議政府 右贊成)에 임명되어 세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또다시 만언소(萬言疏)인〈진 시폐소(陳時弊疏)〉를 지어 올리다. 10월에 명(明)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극기복례설〉을 지으니 사신들이 거듭 경탄하였다. 12월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어 서도(西道)의 민폐(民弊)를 진달하다.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법(曆法)개정. 그레고리력의 성립. 예수회 소속의 이탈리아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중국 광둥, 마카오에 상륙. 만주에서 여진족의 누루하치가 병사를 일으킴(후에 후금이 됨)
1583년(선조 16년) 48세, 2월에 〈시급한 정책 여섯가지(時務六條)〉를 계진하다. 4월에 시국 구제에 관한 상소인〈진 시사 소(陳時事疏)〉를 올리다(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는 공납(貢納)제도를 개혁할 것. 특히 서자들을 등용하고 또 노비들도 곡식을 바치면 양민으로 허락해 줄 것을 주장). 또 4월에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십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나, 유성룡 등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가다. 6월에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사임하고 율곡리로 돌아갔다가 7월에 다시 해주 석담으로 가다. 9월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임명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다. 1583년 이탈리아의 갈릴레이 흔들이의 등시성(等時性) 발견.
1584년(선조 17년) 49세, 정월 14일에 북방을 순무(巡撫)하러 가는 서익에게 〈마땅히 해야 할 여섯가지 방략(六條方略)〉을 최후로 진술하다. 정월 16일에 서울 대사동(大寺洞: 현 인사동) 집에서 별세하다. 3월 20일에 파주 자운산(坡州 紫雲山) 선영에 안장되다. 1588년 영국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격파(에스파냐의 몰락). 1598년 낭트칙령 발표. 1600년 영국이 동인도 회사 설립으로 인도에 대한 침탈 강화. 1603년 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 세움.
1623년(인조 원년) 영의정에 추증되다.
1624년(인조 2년) 문성(文成)이라는 시호(諡號)를 받다. (문성(文成)은 도덕박문(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하고, 안민입정(安民立政)을 성(成)이라 함 :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라는 의미)
1681년(숙종 7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다. (위차는 문순공(文純公) 이 황(李滉) 다음에 놓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