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매우 다양한 수레가 그려져 있다.
현재 알려진 95기의 고구려 고분벽화 중 수레 그림은
18개 고분에서 40대의 수레, 4개의 수레바퀴를 찾아볼 수 있다. 고분벽화의 보존 상태가 나쁜 점을 감안한다면 대단히 많은 숫자다.
- 고동환, <한국 전근대 교통사> (들녘, 2015), p.284
삼국시대는 이륜(二輪) 즉 두 바퀴 달린 수레가 있었고
화활성화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두 바퀴 수레가 보이지 않은다.
왜 그럴가?
治道兵家之大忌 치도병가지대기
병가에서는
길을 내거나 보수하는 것을 크게 기피한다.
병가란 전시 상황을 말한다.
전시에는 길을 보수하거나 새로운 도로를 개설 않은다.
요약하면 도로를 개설하거나 보수하지 말라다.
숙종은 이 말을 전략으로 삼았다.
숙종만이 아니다. 사대부들도 그랬다.
왕과 신하가 그러니
조선의 도로는 쑥대밭이었다.
사람이 다니면 길이고 다니지 않으면
산등성이나 들판은 그냥 그대로 山野(산야)였다.
도로란 전쟁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침략하는 나라는 도로가 발달했고
침략 당하는 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침략하기 위해서는 군수물자나 식량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도로가 필수불가결한 제일 조건이다.
전쟁 물자를 수레로 운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침략을 당하는 나라는 입장이 달라진다.
길이 좋으면 피신할 시간이 줄어들게 된다.
약소국이 도로를 방치하는 이유다.
△중국 독륜거(獨輪車) :초헌보다 실용적이다.
治道兵家之大忌
전쟁시는 길을 방치해야 한다.
이 말은 병자호란관 관련이 있는 말이다.
고형산(高荊山 1453년∼1528년)이 1507년( 중종 ) 강원도 관찰사를 지낼 때였다. 사비를 들여서 강릉 주민들과 함께 좁고 험준한 대관령을 우마차가 다니도록 개척했다. 주민들이 생활이 편리하도록 선정을 폈던 것이다. 고형산이 죽고 100여년이 지난 1636년 병자호란 때였다.
청나라 군대가 주문진에 상륙해서 대관령을 통해서
한양으로 진군했다.
병자호란이 수습된 뒤 조정에서는 고형산이 회자되었다.
대관령 길이 넓혀지는 바람에
한양이 조기에 함락되었다는 논란이었다.
삼전도에서 삼궤구고두례의 치욕을 격은 인조가 격노했다.
고형산의 묘를 파헤쳐지는 부관참시를 시행했다.
병자호란이 발생한지 88(1636)년 뒤
1724년에 숙종이 즉위하게 된다.
숙종은 고형산을 되짚었다.
治道兵家之大忌
전란을 대비해서 길을 손대지 말라 한 것이다.
차자는 살아야 되고 피치자는 죽어도 괜찮다는 것인가.
이래도 사군이충을 해야 되는 것이 조선이었다.
길은 조선 때만 아닌 것 같다.
고려때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도경이란 책이 있다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고려 인종(1123년) 때였다.
송(宋)나라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이 송도에서 머물다 갔다.
귀국하여 고려 상황을 기록한 책이
「선화봉사고려도경」이다.
줄여서 고려도경이라 한다.
-전 40권 28문 300여항 -
「고려는 산이 많고 도로가 험하다.
수레를 부리기는 불편한데다
무거운
짐을 끌 수 있는 낙타도 없다.」
작성자덕암
|작성시간18.11.28
제목 사진 시원~ 합니다. 바퀴하나 달린 가마는 가마꾼에게는 어느정도 도움이 되었겠습니다. 길을 닦지 않은 것은 외침이 있을 때 빨리 처들어 오지 못하게 하는 작전이었군요. 빨리가서 막아낼 생각은 못했나 봅니다. 하기야 도성에 군대가 없으니 나가서 막아낼 재주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선조때 10만 양병설이 나오기도 했나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