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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초헌(軺軒)이란 수레

작성시간18.08.30|조회수2,698 목록 댓글 2

 

 

 


대신의 행차

 



조선시대 수레


표제그림 : 김중근의 [기산풍속도첩]의 풍속화
          김중근 - 조선후기 화가


제목 : 출근하는 大臣
소장 : 독일함부르크민족박물관


                                     ▽김중근의 풍속도




軺軒(초헌) 


조선시대는 초헌이란 수레가 있었다.

명거(命車)·목마(木馬)·초거(軺車) 등 여러 이름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3실)에 소장된 초헌


박제가의 글이다.


조선의 2품 이상의 문관들은

외바퀴를 사용하는 높은 수레를 타는데

그것을 초헌이라고 한다.


바퀴는 작으면서 수레 높이는 한 장(丈)이나 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 마치 사다리로 지붕에 오른 듯 하여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롭다.


움직일 때도 다섯 사람이 있어야 한다.

또 수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옛날에 수레를 만든 것은

한 대의 수레에 다섯 사람을 태우려고 한 것이다.
지금의 수레는

다섯 사람이 걷고 한 사람이 탄다.


- 박제가, <북학의> (박정주 옮김, 서해문집, 2003), p.39


이렇듯 박제가는 초헌의 모순성을 비판하고 있다.




조선시대 종 2품 아상의 관리들이 타고 다니던 개량형 가마.

사람이 앉은 승교와 바퀴로 구성되었다.

평지에서 바퀴로 굴리고 장애물이 있는 곳에선

가머처럼 메고 다녔다고 한다.


[정성길 편저, 사진으로 본 100년 전의 사진]에서



                        프랑스 기메박물관 소장


가마 형태에다 바퀴 하나 달아 놓은 것이

초헌으로 발전하지 않았을가 싶다.


 

꽃가마

「신행」하는 신부 가마  -기산풍속도-




위 사진은 1894년경 서울 풍경이라 한다.

길거리는 소나 말을 탄 사람은 있어도

수레가 보이질 않은다.


                                           △[한양거리풍경]


1894∼1901년 사이에 조선에 살았던

콘스탄스 테일러(Constance Tayler) 그림이다.


개화기에 조선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의 기록은 

공통적면이 있다.


「길거리가 지저분하다.

사람들이 우유를 먹지 않는다.

여자들이 개울에서 매일 빨래를 한다

바퀴가 보이지 않은다. 」


위 그림 역시 수레는 보이지 않은다.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Morning Calm)1888]를 전파한

미국 과학자 로웰(Percival Lowell)도 그랬다.

조선의 특이한 첫인상으로 수레를 꼽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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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바퀴의 효율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힘이 몇 배나 더 들며 중간중간에  쉬어야 하는

가마를 메고 다니는 코리언들을  개탄했다.


- 김학준, [서양인들이 관찰한 후기 조선]

                  (서강대학교, 2010), p.220


그렇다면 두 바퀴 수레가 없었다는 이야기인가?






덕흥리 고분벽화  ▽무용총 쌍용총 벽화


수레모양 토기(신라, 5~6세기)

국립경주박물관 (계림로 25호분 출토)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매우 다양한 수레가 그려져 있다.
현재 알려진 95기의 고구려 고분벽화 중 수레 그림은
18개 고분에서 40대의 수레, 4개의 수레바퀴를 찾아볼 수 있다. 고분벽화의 보존 상태가 나쁜 점을 감안한다면 대단히 많은 숫자다.
- 고동환, <한국 전근대 교통사> (들녘, 2015), p.284


삼국시대는 이륜(二輪) 즉 두 바퀴 달린 수레가 있었고

화활성화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두 바퀴 수레가  보이지 않은다.

왜 그럴가?




治道兵家之大忌  치도병가지대기


병가에서는

길을 내거나 보수하는 것을 크게 기피한다.

병가란 전시 상황을 말한다.

전시에는 길을 보수하거나 새로운 도로를 개설 않은다.

요약하면 도로를 개설하거나 보수하지 말라다.


숙종은 이 말을 전략으로 삼았다.

숙종만이 아니다. 사대부들도 그랬다.

왕과 신하가 그러니

조선의 도로는 쑥대밭이었다.

사람이 다니면 길이고 다니지 않으면

산등성이나 들판은 그냥 그대로 山野(산야)였다.


도로란 전쟁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침략하는 나라는 도로가 발달했고

침략 당하는 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침략하기 위해서는 군수물자나 식량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도로가 필수불가결한 제일 조건이다.

전쟁 물자를 수레로 운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침략을 당하는 나라는 입장이 달라진다.

길이 좋으면 피신할 시간이 줄어들게  된다.

약소국이 도로를 방치하는 이유다.



△중국 독륜거(獨輪車) :초헌보다 실용적이다.


治道兵家之大忌 

전쟁시는 길을 방치해야 한다.

이 말은 병자호란관 관련이 있는 말이다.


고형산(高荊山 1453년∼1528년)이 1507년( 중종 ) 강원도 관찰사를 지낼  때였다.  사비를 들여서 강릉 주민들과 함께 좁고 험준한 대관령을 우마차가 다니도록 개척했다. 주민들이 생활이 편리하도록 선정을  폈던 것이다.
고형산이 죽고 100여년이 지난 1636년 병자호란 때였다. 

청나라 군대가 주문진에 상륙해서 대관령을 통해서

한양으로  진군했다.


병자호란이 수습된 뒤 조정에서는 고형산이  회자되었다. 

대관령 길이 넓혀지는 바람에

한양이 조기에 함락되었다는 논란이었다.

삼전도에서  삼궤구고두례의 치욕을 격은 인조가 격노했다. 

고형산의 묘를 파헤쳐지는  부관참시를 시행했다.

병자호란이 발생한지 88(1636)년 뒤

1724년에 숙종이 즉위하게 된다.


숙종은 고형산을 되짚었다.

治道兵家之大忌 

전란을 대비해서 길을 손대지 말라 한 것이다.


차자는 살아야  되고 피치자는 죽어도 괜찮다는 것인가.

이래도 사군이충을 해야 되는 것이 조선이었다.


길은 조선 때만 아닌 것 같다.

고려때도 마찬가지였다.


고려도경이란 책이 있다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고려 인종(1123년) 때였다.

송(宋)나라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이 송도에서 머물다 갔다.

귀국하여 고려 상황을 기록한 책이

「선화봉사고려도경」이다.

줄여서 고려도경이라 한다.

-전 40권 28문 300여항 -

 



「고려는 산이 많고 도로가 험하다.
수레를 부리기는 불편한데다
무거운 짐을 끌 수 있는 낙타도 없다.」

麗國多山 道路坎壈 車運不利 又無槖 駞可以引重
[고려도경 권15, 「雜載」]

「우거(소달구지) 시설은 제작이 간략하고 특별한 법도가 없다. 

아래에 두 개의 끌채와 바퀴가 있다.

앞의 끌채에 소를 맨다.
수레에 물건을 싣고 반드시 새끼줄로 묶어야

나뒹구는 걸 면할 수 있다.
더구나 그 나라는 거의 산길이어서

움직일 때마다  울퉁불퉁 흔들리니,

다만 예를 갖춘 도구일 뿐이다.」

牛車之設 制作率略 殊馮法度 下有二轅輪 前轅以牛駕之 每載物於其上 必以草繩貫繫 方免傾覆 況其國率皆山路 行則嵲屼動搖 特爲禮具而已 

                                  [고려도경 권15, 「牛車(우거)」] 



윗 글에서 두 가지를 눈여겨 볼 점이 있다.


道路坎壈 車運不利

도로가 험난하여 수레 이용이 불편하다.

감람[坎壈] : 곤궁(困窮)하여 뜻을 얻지 못함을 이른다.


조선시대처럼 도로를 가꾸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고려 역시 북망민족의 침입을 수 없이 받있다.

강화도에서  피신생활을 30년 가까이 했었다.


殊馮法度 (수빙법도)

馮자는 ;업신여긴다'의 글자다. '무시하다'는 말이다. 

수레를 만드는데 특별한 제작 방업이 없단 이야기다.


법도(法度) : 법과 제도

법도가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고려는 수레를 제작하는 법도가 없다」-고려도경-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중국에는 수레 제작 법도가 있다는 말이 된다.


이 법도의 중요성을응 중용(中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이

44세 때 청나라에 연행사로 갔다.

1780년(정조 5) 5둴이었다.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칠순 잔치 하례 행사였다.

다녀와 쓴 글이 열하일기(熱河日記)다.



수레 제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동궤(軌)'다. 동궤가 뭐냐고? 

양쪽 바퀴 사이 굴대의 길이를 똑같이 하는 것이다.

그렇게 양 바퀴 사이의 거리만 일정하게 만들면, 수레 만 대가 지나가도 자국은 하나로 날 것이다.

이른바 '거동궤(車同軌)'란 이것이다

車制莫先於同軌 所謂同軌者何 軸之距兩輪之間也
兩輪之間 不違恒式 則萬車一轍 所謂車同軌者是也
동궤(同軌)는 중용(中庸)에 나오는 단어다.

今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
금천하 거동궤 서동문 행동륜

지금 천하가
수레는 바퀴 폭의 규격이 같으며,
문자(文字)가 같으며,
행동은 차례가 같다.

                            중용장구(中庸章句) 28章



今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
이 말은 [천하통일]을 의미한다.


이 말 앞에 다음과 같은 말이 하나 더 있다.


非天子 不議禮 不制度 不考文
비천자 불의례 부제도 불고문

천자(天子)가 아니면
예(禮)를 의논하지 못하고,
제도를 만들지 못하고,
문자를 고정(考定)하지 못한다.


천자란 주(周)나라  왕을 이른다

기타의 나라들은 제후라 한다.


주(周)나라가 은(殷)나라를 무너뜨고

천자의 나라로 첫출발 하면서 내건 천명(天命)이다.


예법과  법도와 글자는 천자의 권한이니

기타  나라에서는  제정하거나 수정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다보니 천자의 권위가 무너졌다.

각 나라가 제멋대로 예법과 제도가 시행되었다.

이 나라 법이 다르고 저 나라 제도가 달라젔다.


진(晉)니라 시황제(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하고  모든제도를 재정비했다.

문자인 한자를 하나로 단일화했고

수레바퀴 규격을 제도(制度)화 시켰다.

오른쪽 바퀴와 왼쪽 바퀴 사이 길이를 하나로 고정시키었다.

도로도 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십자로을 구축했다.

수레가 전국 어디를 막로하고 다니지 못할 데가 없었다.


진시황제가  도로를 극대화 시켰다. 

문류 유통이 원활해지고

문화 발달이 활발해젔다.


그래서

[고려도경]은  [법도(法度)]가 없다고 지적한 것이다.

연암도 도로 상황이 부진한 것은

사대부 잘못이라고 지탄했다.


열하일가(熱河日記)에서다.





「우리나라는 길이 험해 수레를 쓸 수 없다」고 한다.

 이게 무슨 소린가.


나라에서 수레를 쓰지 않으니 길이 닦이지 않은 뿐이다.

만일 수레가 다니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일 것이다.

어찌 길거리의 좁음과 산길의 험준함만 걱정하는가. (중략)


영남 아이들은 새우젓을 모르고,

관동 사람들은 아가위 열매를 절여 간장을 대신한다.

서북 사람들은 감과 귤을 분간하지 못한다.

바닷가에서는 생선 찌꺼기를 밭에 거름으로 주는데

이게 어쩌다 서울로 오면 한 움큼에 한 닢 값이니,

어찌 이렇게 귀하게 된 것인가? (중략)


여기에서는 천한 것이 저기에서는 귀하고,

이름만 들었을 뿐 물건을 볼 수 없는 건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멀리 옮길 힘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 수천 리밖에 안 되는 좁은 강토에서

인민의 살림살이가 이토록 가난한 건

일언이폐지(一言而蔽之)하면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수레가 다니지 못하냐고 물어보면

일언이폐지(一言而蔽之)허면

사대부의 잘못이다. 

 
我東巖邑不可用車 是何言也 國不用車 故道不治耳 車行則道自治 何患乎街巷之狹隘 嶺阨之險峻哉 (중략) 嶺南之兒 不識蝦鹽 關東之民 沉樝代醬 西北之人 不辨柹柑 沿海之地 以鮧鰌糞田 而一或至京 一掬一文 又何其貴也 (중략) 然而此賤而彼貴 聞名而不見者 何也 職由無力而致之耳 方數千里之國 民萌產業 若是其貧 一言而蔽之曰車不行域中 請問其故 車奚不行 一言而蔽之曰士大夫之過也 - [熱河日記>驲汛隨筆> 車制]  

             열하일기>일신수필> 거제
 




선과 고려는 두 바퀴수레가 발달하지 못했다. 

국가 전략적 차원원이었다. 입맛이 개운지 않다.


강한 군대를 양성할 방안을 모색하지 않고

피신 방안만 찾았으니 더 할 말이 없다.


덕분에 도로는 억만진창이 되어 갔고

문류 유통은 보부상 등짐에 허덕이야 했다.


냉수 먹고 이 쑤신단 말이 있다.

사대부들을 비꼰 말이다.


사흘 굶고도 집 밖에 나온 양반이

잘 먹은 양 트림하고 이를 쑤신다는 것이다.

체면만 차리는 양반을 두고 한 말이다.

사대부들은 동방예의지국만 부르짖었고

백성들은 굶주림이 생할 자체였다.

이것이 조선시대상이었다.


이 글은

중용장구, 열하일기, 블로그 부기부, 등

기타 자료를 참고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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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덕암 | 작성시간 18.11.28 제목 사진 시원~ 합니다.
    바퀴하나 달린 가마는 가마꾼에게는 어느정도 도움이 되었겠습니다.
    길을 닦지 않은 것은 외침이 있을 때 빨리 처들어 오지 못하게 하는 작전이었군요.
    빨리가서 막아낼 생각은 못했나 봅니다.
    하기야 도성에 군대가 없으니 나가서 막아낼 재주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선조때 10만 양병설이 나오기도 했나 봅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산여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11.28 고맙습니다.

    治道兵家之大忌
    치도병가지대기

    이 글 소재를 찾아보면서
    조선이란 나라가
    한심한 생각이 들습니다.

    백성이야 어찌 되었건
    임금은도망가야 하니까
    길은 쑥대 밭으로 놔두고..

    그래도 보는 눈은 있었던가
    바퀴 하나 달린 수레를 만들었다니
    가관이 따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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