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이번거는 하던중에 가장 어렵네요. 빨간 부분이 유난히 많죠? 한번 체크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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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멈추어 이러한 정치 생명의 완전한 단절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물어볼 수도 있다. 민주주의의 정의와 부합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치들은 완전히 대중적이었다. 우정은이 주장하듯이, 일본이 1952년 이후 알고 있는 또는 남한이 50년대에 알았던 유일한 민주주의는 슘페터리아식 엘리트 순환구조로, 여기서는 국가와 기업이 공조하며, 관료가 제시하면 기업이 처리하면서, 둘 다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만족하게 해주고 자금 지원도 잘 해주었다. 의회에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하여, 표면상 폭넓은 일본의 정치 체계는, LDP가 50년간이나 정권을 잡은 극보수 연합 지배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물론, 1950년대의 일본은, 기본적 자유를 보장했지만, 그 성장은 누구에게나 논란이 되었다. 1950년대의 한국도 그러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민주주의라 칭한 일당 지배체제는 한국에서 강력했고, 결국 1992년 선거에서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출중한 관료도 기업가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성장과 정치적 안정도 없이, 모든 정치가가 자신의 생득권을 보장 받고, 자신의 의견에 귀기울여 달라고 한다면, 결국 역사적으로 쇠퇴한 귀족이 될수도 있었던 지주 계층이 수백년간 서민들에게 그것을 양도하고 이제는 원칙적 민주주의 반대를 주장한다면 - 즉, 1950년대의 남한의 체제는 - 그렇다면 우리는 군사정부의 독재가 의회를 폐쇄한 프랑스의 군사정부와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고, 왜 그것이 평민들에게 인기가 있으며, 거리의 대중 봉기를 무력화시키지도 않고, 왜 그 구테타가 완전히 무혈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보통의 국회의원은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그사이 그의 운전수는 그의 반짝이는 군용 지프의 시동을 켜고, 지붕의 먼지를 털며, 좌석에 하얀 시트를 펼쳐 놓는다. 곧, 그들은 다소 진지한 수다를 위해 찻집으로 향한다; 그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출발하면, 여러 하인들이 허리 숙여 인사한다. 한 두 시간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떤 후, 국회로 간다 - 그러나 그 사람의 사무실에는, 당신의 동지들이 여당의 조치에 항의하기 위해 농성중이다. 기자들에게 짧게 브리핑을 하고, 사무실로 걸어가, 모든 직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이 인사와아첨 잘하는 사람들에게 답례를 주고는, 적당히 위장된 일식집으로 야당 동지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간다. 거기서 기생들이 당신이 잠시 말을 멈춘 틈을 타서 젓가락으로 회를 먹여준다. 오후 세시가 되면, 수행원들이 국회로 돌아가고, 아침의 일상이 반복된다: 그러나 곧 해가 지고, 한국식 바비큐와 소주 더 많은 기생들이 있는, 번화한 명동으로 향할 시간이 된다. 아니면 미국 대사관에서 파티가 있어, 운전기사가 아름다운 이화여대생으로 영어를 잘하고(당신의 촌스러운 늙은 아내와 달리) 외교관을 적절히 보좌할 수 있는, “임시 아내”를 태우러 간다. 이것은 가혹한 풍자만화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한두 번 목격했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애쓰는 보통의 한국인들도 틀림없이 그들을 자주 보았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가부장적 가장에서 세련된 외교관으로 바뀌는 것은 물어볼 것도 없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매일 이렇게 하는 것은, 내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몹시 화가 날 일이다.
만약 그런 것이 있었다면 한국 정보원인 Gregory Henderson은 대일본제국과 종종 그를 모방하는 남한의 차이를 세세하게 묘사했다:
상류층과 서민의 관계는, 심지어 극빈층 사이에서도 일본에서보다 재미가 없다.... 정부, 정치가, 청년 단체, 퇴역 군인 협회, 깡패 두목들, 거지들, 확대 가족, 아이들의 학교, 결혼과 학업, 장례식에 대한 필요성으로 인해, 무력이나 협박없이도, 그 사람이 가진 것이 무엇이든 서로 엮어 있다.
물론, 친척, 학교, 결혼, 장례식은 모두 가치가 있다. 그러나 정치인에게는 어떤가? 그럴듯한 분석에 의하면, 어떤 복종하지 않는 심지어 반항적인 정신이, 끝이 보이지 않는 제로섬 투쟁을 포함한 빈곤한 경제에서 기대해야 하는 것이고, 역사가 고 E.P. Thompson이 부른 것처럼, 그리고 나서 “약자들의 무기”는 한국 사회에서는 또한 예술의 형태로 키워진다. So, for a nation of current and recent peasants to watch the political class cashiered for a few months or years, by someone instantly recognizable as a son of the peasantry, was doubtless met with much mirth and silent approbation.
훈련된 군대적 멋내기(spit and polish)외에, 박정희의 만주에서의 2차대전 경험은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 일본 우익과의 폭넓은 연대가 그러한 것처럼-- 정치가 Kishi Nobusuke와 같은 “A급 전범”, 부자인 Sasakawa Ryoichi, 그리고 그다지 건전하지 않은 많은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여. 그러나 쿠테타 뒤에 숨은 진짜 실력자는 1949년 육사 8기 졸업생이며, 박정희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이었다. 김종필은 3공화국의 두 개의 실세 신정치 기관의 핵심 설립자였다: 한국 중앙정보부(KCIA)와 그것이 세운 정당인 민주 공화당(DRP). 1961년 6월 13일에 중앙정보부를 세우면서, 그는 미국 CIA의 도움을 받았지만, 미국이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민주공화당을 만들 때, 그는 장개석의 국민당으로부터 교훈을 얻었는데, 이것은 레닌주의 내부기관 원칙에 따라 오랫동안 운영되었다(소련의 요원이 1920년대에 중국 국민당원에게 조언했었다). 무슨 짓을 해서도(by hook or crook) 국내에서 충분한 자금을 모으지 못하자, 그는 일본으로 가서, 우리가 지난 챕터에서 본것처럼, 6천6백만 달러를 얻었다.
김종필은 남한 정치사에서, 매력있고, 사교적이며, 계획적이고 효율적인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동기들에게 충성하여, 1949년 졸업생들은 이전의 누구도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진 것으로 보여졌다: 16명의 장관급 관료와 24명의 국회의원. 김은 때때로 부정부패로 비난을 받았고 여러번 쫒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되돌아왔고, 1994년에는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총재가 되었으며, 아직도 한국 정치의 중심인 “삼김”중의 한명이다.
수년간 민자당은 한국 역사에서 일관성있고 효율적으로 조직된 반공산주의 정당이 될 것 같다. 하버드 정치 과학자인 Rupurt Emerson이 1963년 새로운 규약을 마련하도록 도왔고, 그 기초는 중앙정보부 내 위원회에서 만들었으며, 그의 동료인 Samuel Huntington은 그의 1968년도 유명서인, Political Order in Changing Societies에서 민자당을 추켜세웠다. Huntington의 주장은 급격한 산업 발전을 진행중인 나라는 새로이 “사회적으로 동원되는”시민들을 유용하고 수용할 수 있는 정치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자당이 그러한 도구인듯했다.
케네디 정부는 박정희 장군에게 1961-63년 사이에 민정으로 돌아가라고 계속적으로 압력을 가했고, 여기에는 개발 자금대출 보류와 예정된 선거가 자꾸 지연되는 것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었다. 박정희와 김종필간의 첨예한 권력다툼후에, 김이 “장기여행차” 한국을 떠났고, 박은 2300명의 전직 정치인들에 대한 제한을 해제하여, 그들이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나중에, 그가 1963년 선거에서 패배할 것처럼 보이자, 박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정권을 4년 더 연장하겠다고 위협했고, 그러자 Sam Berger 대사가 박의 계획에 대한 미국의 반대를 공개하겠다고 협박했다. Berger는 선거를 계획대로 치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한 공식 연구서가 상세히 언급하듯이, (미국의 지원으로) 베트남 Ngo Dinh Diem이 암살당하자, 몇몇 한국인들은 “박에 대한 미국의 태도와 남베트남 정부 전복 사이에 평행선”을 그었으며, 이것이 박으로 하여금 선거운동에 “노골적인 반미주의”를 활용할 기회를 주었다.
처음부터 군부는 만약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노골적인 간섭이 있다면, 그들의 반공산주의를 미국의 손에 들려주겠다고 자신했었고, 결국 그들이 옳았다. 박은 민주당에 미국의 수많은 친구들을 포섭했고, 1960-61년에 대표기관들을 없앴으며, 합동 사령부를 거역했고, 언론에 총구를 들이대고, 무고한 사람들을 도매급으로 감옥으로 보내면서, 계속해서 미국인의 세금을 먹어치웠다.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미국 CIA와 FBI의 기능을 조합한 정교하고, 수만명의 요원이 고용된 자금이 탄탄한 기관으로 만들었으며, Boss Tweed(?)의 가치가 있는 정치 기구를 한국의 정치사를 장악하여 그 부장이 1979년 10월 어느날 밤 만찬장에서 박정희를 쏘아 죽게한 기관으로 만들었다. 중앙정보부는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군대를 대치했으며, 모든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의 라이벌이 되었다-- 종종 박정희에 대항하여 자신의 쿠테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던 김종필을 포함하여.
미국은 선거에 대한 원조를 뺏겠다는 잦은 협박을 통해, 박으로 하여금 군복을 벗고 출마하도록 했다. 일주일만에 만들어진 중앙정보부의 규약은, 단원국회의 입법 활동은 SCNR의 법령에 귀속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제도와 중앙정보부의 확장된 간섭에도 불구하고,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박은 야당 후보인 윤보선을 가까스로 이겼지만, 여당은 다음달의 선거이후 약화된 국회를 장악할 수 있었고, 이는 비례 게리멘더링이라는 새로운 시스템덕이었다. 여당은 선거에서 1/3이하 득표했지만, 새 국회에서 175석중 110석을 차지했다: 88석은 후보들이 얻은 것이었고, 22석은 “비례대표”를 통해서였다.
이후 2년간 주요 이슈는 일본과의 정상화 조약이었다. 국회를 폐지하고 계엄령을 다시 시행한다는 새로운 위협가운데에 대규모 학생 시위가 1964년 봄에 시작되었다. 1964년 상황은 중대한 국면을 맞게 되어, 박은 다시 한 번 계엄령을 선포했고 미국 사령관은 대규모 시위 진압을 위해 주한 미군 두 개 사단의 투입을 동의했다. Berger 대사는 불만세력의 주동자를 김종필로 보았고, 이번에는 Henry Kissinger의 하버드대학 국제 세미나를 핑계로 그가 이 나라를 떠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상황은 8월 새학기를 맞아 진정되었지만, 1965년 4월에 다시 시작되어, 8월까지 잇따른 시위가 지속되었으나-- 이번에는 계엄령은 발효되지 않았다. 한국 경제에 많은 역할을 한,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는 그리하여 이후 수년간 지속된 대규모 시위와 정치적 혼란후에야 완수되었다. 1965년 8월 여당은 조약을 승인하기 위해 110표를 던졌지만 무효가 되었고, 이는 야당위원들이 국회를 보이콧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자민당 위원들은 “전격전” 전술로 의회를 통해 사회당을 압박했고, 그 조약은 65년 12월에 발효되었다.
1965년부터 71년 사이에, 급격한 경제 발전과 상대적인 정치 안정이 이루어졌다. 박은 1967년 재선에 출마했고, 그 무렵 수출-주도 계획의 성과가 정치적 인기로 바뀌어 있었다. 박은 근거상 공정한 선거에서 (윤보선과 맞서) 백만표 이상으로 이겼다; 물론, 수천만 달러를 뿌린 민주공화당과 중앙정보부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1968년에 중앙정보부는 서독에 살고 있던 몇몇 한국인을 납치하여 서울로 데려와 그들이 친북이라는 이유로 기소했는데, 이는 서독 정부가 한국과의 친선 관계를 단절한 것에 대한 조치였다. 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유명 오페라 작곡가인 윤일상이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감옥에서 미국에서 납치되어 서울로 돌아온 한국인 학생들을 만났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이 때는 상대적인 자유와 번영의 시기였다. 나는 그 당시 잠시 한국에 살았는데, 그 분위기는 오히려 상대적인 언론의 자유, 정당간 경쟁, 끝없는 언쟁, 중상, 보이콧, 농성, 그리고 국회에서의 다른 협잡이 있었던 90년대 중반의 모습과 같았다. 한편으론, 영국식 표현대로, 만약 여당의 책임이 반대를 하기 위한 것이라면, 한국식 반대는 1960년대 후반에는 거의 한일이 없다. 1967년부터 71년까지 306개의 정부주도 법안중 한 개도 국회에서 거부되지 않았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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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초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5.10 제가 내일 토요일 2시에 행사가 있어 스터디 참석 불가합니다.
만약... 다들 시간이 되셔서 11 30으로 이번주만 시간을 바꿔주신다면... 참석 가능하구요.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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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초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5.10 아. 다시 생각해 보니... 360쪽 중간쯤 vote to nothing은 무효표가 아니라 110 대 0표란 뜻 같네요. 야당이 보이콧해서 여당표 110표로 조약이 비준되었다. 이게 맞는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