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法, Dhamma, Dharma)
법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법(法)의 원래 의미는 ‘자신의 고유한 성질(sabhāva)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아비담마에서는 궁극적 실재(paramattha, 빠라맛타)라고 한다. 이것은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존재의 구성성분이며 최소의 단위이다. 아비담마는 궁극적 실재(구경법)를 마음 1가지, 마음부수 52가지, 물질 18가지, 열반 1가지, 모두 72가지로 분류한다. 궁극적 실재의 반대어는 개념(빤ㅤㄴㅑㅅ띠, paññatti)이다. ‘사람, 남자, 여자, 나무, 돌’이라는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개념일 뿐이다. 마치 자동차에서 바퀴와 본네트, 창문을 떼어나고 엔진을 들어내고, 완전히 해체하여 놓으면 더 이상 자동차라고 부를 수 없다. 그래서 자동차는 개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이라는 것도 단지 개념으로서만 존하는 것이고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이라는 용어가 다른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경의 주석서에서는 이렇게 정의한다.
“이 법을 닦는 사람을 4악처에 떨어지지 않도록 이끌어가기 때문에 법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석할 때는 수다원도, 수다원과, 사다함도, 사다함과, 아나함도, 아나함과, 아라한도 아라한과, 열반, 이렇게 9가지만이 법에 해당한다.
각각의 입장에서 법을 정의할 수 있다. 부처님 입장에서는 「가르침」이 법이고, 중생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배워야하는 것,「삼장」이 법이다.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닦아나가야 할 것, 「선업, 사마타, 위빳사나 등」이 법이고, 성인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열반」이 법이다.
경에 나오는 법에 대한 정형구는 이렇다.
“법은 세존에 의해서(bhagavato dhamma), 잘 설해졌고(Svākkhāto),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sandiṭhiko), 시간이 걸리지 않고(Akaliko), 와서 보라는 것이고(ehipassiko), 향상으로 인도하고(opaneyiko), 지자들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paccattaṁ veditabbo viññūhi).”
여기서 말하는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즉시 실천하고 체험할 수 있으며,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수행해보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대소승의 수많은 경전들이 붓다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냐 아니냐로 논란이 분분하다. 이의 판단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위의 정형구이다. 어떤 경우이든 스스로 보아 알 수 없고 실천할 수 없고, 체험할 수 없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러니 다라니, 진언 등과 같은 뜻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 신비스런 색체를 띄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붓다는 현실주의자이고 실천주의자이다. 이는 심사빠 나뭇잎의 비유에서 잘 나와 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손으로 집어든 적은 양의 심사빠(Siṁsapa) 나뭇잎과 저 위의 심사빠 숲에 있는 나뭇잎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 많겠는가?”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손으로 집어든 적은 양의 심사빠 나뭇잎보다 저 위의 심사빠 숲에 있는 나뭇잎이 훨씬 많습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알고 나서 그대들에게 설한 것은 매우 적고 설하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이익을 주지 않고, 욕망의 소멸로, 사라짐으로, 멈춤으로, 없어짐으로, 지혜로, 깨달음으로, 닙바나로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설하지 않았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내가 설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을 나는 설했다. 왜 이것을 설했는가? 이것은 이익을 주고, 성스러운 삶이 향상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욕망의 소멸로, 사라짐으로, 멈춤으로, 없어짐으로, 지혜로, 깨달음으로, 닙바나로 이끌기 때문이다.”(S56.31)
법과 비법을 구분할 때는 이 두 가지 경우로 비추어보아 판단해야 한다. 첫 번째는 듣거나 읽어보면 스스로 알 수 있고, 실천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으며, 두 번째로는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것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이 두 경우가 아니면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단지 듣기 좋은 미사여구이며, 말의 유희이며, 말장난이며 관념철학일 뿐이다.하물며 다라니라나 진언 등과 같은 뜻도 알 수 없는 것은 말해서 무엇하랴.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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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후야 작성시간 09.05.20 _()_ _()_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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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jeongin 작성시간 09.05.20 아이고~~성철스님 같은 분들도 아비라기도하라고 했지요~~~한국불교는 무슨 수행(주문,,염불)을 했더니 이렇게 효험을 봤다는 영험위주로 흐른지 오랩니다..기독교의 간증사례가 전도가 잘되는지?..연예인들이 대거 앞장 서지요......암튼 인간은 신비적인것, 영험 조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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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jeongin 작성시간 09.05.20 근본 불교를 접하고나서야...부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알게 됐습니다..아이고.데이고 80%가 허위 날조된 대승불교에 아까운 세월만 날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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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무위 작성시간 23.07.08 저는 상식에서 벗어나는 건 제대로 된 종교가 아니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