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가와 바히야 그리고 육조 혜능
혜가 존자
혜가가 물었다.
“마음이 불안합니다. 스승께서 마음을 편안케 해주십시오.”
달마대사께서 대답하셨다.
“그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리라.”
혜가는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습니다.”
달마가 대답했다.
“찾아지면 그것이 어찌 너의 마음이겠는가?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었다.”
혜가는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했다.
“제가 오랫동안 법을 구했으나 오늘에야 모든 법이 본래부터 공적하고, 깨달음이 가까이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수행자는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반야의 바다에 이르고,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열반의 언덕에 오릅니다.”
이것을 안심법문(安心法文)이라고 한다, 안심법문이라니? 마음이 편안하면 깨달음인가? 이건 법을 모르는 말씀이다. 마음이 편안한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평온(우펙카)에 도달해도 편안하고, 사마디(근접삼매나 본삼매) 상태에서도 편안하다. 그런데 어쩌랴? 우펙카나 사마디를 깨달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내면에 생각하는 자가 있고, 느끼는 자가 있고, 경험하는 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하는 자를 ‘나 자신’이라고 상상한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느낀다. 내가 경험한다.’고 상상한다. 그런 관념이 시작을 알 수 없는 옛적부터 우리의 내면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여기서 한번 달마대사의 말씀처럼 눈을 감고 내면으로 들어가 ‘생각하는 자, 느끼는 자, 경험하는 자’가 있는지 찾아보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단지 생각만이 있고, 느낌만이 있고, 경험만이 있다. 거기에 생각하는 자, 느끼는 자, 경험하는 자가 없다. 생각, 느낌, 경험이 곧 마음이다. 그럼 생각으로 생각을 찾을 수 있는가? 마음으로 마음을 찾을 수 있는가? 마음으로 마음을 찾으려고 하면 마음은 홀연히 사라진다. 이것은 마치 눈으로 눈을 보려는 것과 같다. 생각하는 자(주체)가 있고 생각하는 대상(객체)이 따로 구분해서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생각의 흐름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다. 이것을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라고 번역함으로써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내면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음을 내라는 말이 내면에 ‘마음을 내는 자’가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생각과 분리된 생각하는 자가 있고, 느낌과 분리된 느끼는 자가 있고, 경험과 분리된 경험하는 자가 있다고 상상하는 것을 환상(마야)이라고 한다. 위빠사나 명상을 한다고 가부좌를 틀고 내면으로 들어가 마음을 주시한다. 그러면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마음이라는 대상(객체)이 있고 그것을 주시하는 주시자(주체)가 있다. 이것을 주객이 분리된 상태이다. 주체와 객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달마대사의 말씀이 이해가 되면, 마음이라는 대상과 그것을 주시하는 주시자는 모두 소멸한다. 오직 마음의 흐름만이 있다. 이것을 주객합일(主客合一)이라고 한다.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진리의 세계에 든 것이다. 열반을 성취한 것이다. 열반은 소멸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물론 열반은 소멸이라는 의미가 있다. 즉 자아의 소멸이 일어나니까.
<이와 똑같은 붓다의 법문이 바히야 경이다. 이것은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