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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히야

작성자무념|작성시간20.06.02|조회수352 목록 댓글 6
바히야

바히야가 뭄바이 근처의 숩빠라까 항구에서 1,300km를 달려가 붓다를 만나 법을 청하는 이야기는 <법구경 2권 237페이지>를 참조하시오.

붓다께서는 주로 수행 일반론을 설하셨다. 대략적인 원론 수준에서 법을 설하셨다. 모든 사람이 함께 실천할 수 있는 수준에서 법을 설하셨다. 하지만 가끔 특별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법문이 있다. 여기 바히야 경은 그런 사람을 위한 최상승법문이다.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아마도 ‘현상에 대한 평온의 지혜(상카루펙카냐나)’에 도달한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법문이다. 현상에 대한 평온의 지혜란 모든 욕망과 번뇌가 거의 떨어져 나간 상태다, 좌선하면 한없이 고요와 평온이 계속되는 상태, 성성적적(惺惺寂寂)한 상태가 한두 시간 이어지는 상태이다. 초기 경전에서 바히야 경과 같은 최상승법문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바히야는 이 법문 끝에 대오(大悟)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바히야 경(Ud1.10)>

여기, 바히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자신을 닦아야 한다.
‘보이는 것을 보기만 하고, 들리는 것을 듣기만 하고,
느끼는 것을 느끼기만 하고, 인식하는 것을 인식하기만 하리라.’라고
이와 같이 자신을 닦아야 한다.

바히야여,
보이는 것을 보기만 하고, 들리는 것을 듣기만 하고,
느끼는 것을 느끼기만 하고, 인식하는 것을 인식하기만 한다면,
그대는 그것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과 함께 하지 않을 때 거기에는 그대가 없다.
거기에 그대가 없을 때 그대에게는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그 둘 사이에 어떤 세상도 없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 말은 성철 스님의 말씀이 아니다. 이 유명한 말은 중국의 청원유신 선사께서 하신 말씀이다. 성철 스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하면 저작권 침해 또는 표절에 해당하므로 항상 원작자의 이름을 거론해주어야만 창작자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 그럼 이 말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산을 볼 때 나의 내면에 산을 보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산이라는 대상이 있고, 산을 보는 자가 있고, 산을 보는 행위가 각각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물을 볼 때 나의 내면에 물을 보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물이라는 대상이 있고, 물을 보는 자가 있고, 물을 보는 행위가 각각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산을 본다. 내가 물을 본다.’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당신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신은 아직 진리를 모른다. 아직 상대적인 세계, 세속에 머물고 있다.

"보이는 것을 보기만 하고 들리는 것을 듣기만 하라."
당신은 소리를 들을 때 나의 내면에 소리를 듣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소리라는 대상이 있고 소리를 듣는 자가 있고 소리를 듣는 행위가 각각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는 자, 보는 행위, 보는 대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가? 듣는 자, 듣는 행위, 듣는 대상이 각각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내가 본다. 내가 듣는다.’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당신은 진리를 모른다. 분리된 내가 있다는 이원성의 세계에 머물고 있다.

"느끼는 것을 느끼기만 하고 인식하는 것을 인식하기만 하라."
당신은 느낄 때 나의 내면에 느끼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인식할 때 인식하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느끼는 대상이 있고, 느끼는 자가 있고, 느끼는 행위가 각각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가? 인식하는 대상이 있고, 인식하는 자가 있고, 인식하는 행위가 각각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내가 느낀다. 내가 인식한다.’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당신은 진리를 모른다. 아직 생사가 계속되는 윤회계에 머물고 있다.

여기서 한번 내면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보는 자가 있고, 듣는 자가 있고, 느끼는 자가 있고, 인식하는 자가 있는지 찾아보라.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는 자를 볼 수 없고, 듣는 자를 들을 수 없고, 느끼는 자를 느낄 수 없고, 인식하는 자를 인식할 수 없다. 보는 자를 볼 수 없고, 듣는 자를 들을 수 없고, 느끼는 자를 느낄 수 없고, 인식하는 자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왜일까? 거기에 보는 자, 듣는 자, 느끼는 자, 인식하는 자가 원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신은 헤아릴 수 없는 옛적부터 계속 윤회하면서 보는 자가 있고, 듣는 자가 있고, 느끼는 자가 있고, 인식하는 자가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그 착각이 괴로움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본다’라고 관념이 의미부여를 하게 만들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을 일으키고, 그것이 욕망의 충동으로 이어진다.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닌 게 되어버린다. 그 착각이 끝없는 욕망과 번뇌를 양산하고 생사윤회의 세계에 떠돌게 만든다. 진리와 계합하지 못하고 영원한 방랑자 신세를 면치 못하게 만든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볼 때 보기만 하고, 들을 때 듣기만 하고, 느낄 때 느끼기만 하고, 인식할 때 인식하기만 하면, 거기에 네가 없다.”
여기가 열반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이 문을 통하지 않고 진리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을 깨달으면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이 함께 소멸하고 봄만이 현존한다. 듣는 자와 듣는 대상이 함께 소멸하고 들음만이 현존한다. 느끼는 자와 느끼는 대상이 함께 소멸하고 느낌만이 현존한다. 인식하는 자와 인식하는 대상이 함께 소멸하고 인식만이 현존한다. 이것을 주객합일(主客合一)이라고 한다. 문학적으로 우주와 합일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주객합일이 일어나면 봄만이 있고, 들음만이 있고, 느낌만이 있고, 인식만이 있다. 어떤 의미부여도, 어떤 분별도, 어떤 욕망도, 어떤 갈애와 집착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일어날 수 없다. 이미 보는 자, 듣는 자, 느끼는 자, 인식하는 자가 소멸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오직 보고 듣고 느끼고 인식하는 것만이 있고 그 외 어떤 것도 없다.

이것이 달마대사가 혜가 대사에게 전했던 가르침이다. 이것이 붓다로부터 달마대사 그리고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유일한 가르침, ‘무아의 이치’이다. 물론 이것은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도 아직 욕망과 갈애와 집착이 있는 자에게는 깨달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가슴으로 깨닫고 몸으로 체험해야 한다. 봄만이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다. 그런데 예쁜 여인을 보는 순간 봄만이 있지 않다. 거기에 남자 또는 여자라는 의미부여가 함께 있고, 좋아함과 싫어함이 함께 있고, 갈애와 집착이 함께 있다. 갖고 싶고 되고 싶고 추구하고 싶은 욕망이 함께 있다. 그러면 거기에 봄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분리된 개체가 있다는 환상을 깨어지고 진리와 합일한 성인에게만 봄만이 있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가르침이 혜능의 바람이냐 깃발이냐에서도 나타남.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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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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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그대로 | 작성시간 20.06.03 봄 .들음..감촉.....뒤에 자동 반사적으로 함께하는.....ㅠㅠ 어찌하오리까?
  • 답댓글 작성자무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6.03 열심히 수행하셔야.....
  • 작성자소나무 | 작성시간 20.06.03 스님의 바히야 다루찌야의 법문 덕분에 법구경 2권 237페지를 펄쳐보게 됩니다
    다음은 수밧다를 설해주십시요.,
    사두 사두 사두~
  • 답댓글 작성자무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6.03 수밧다는 아는 게 없습니다.
  • 작성자Nayana | 작성시간 20.06.03 _()()()_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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