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불교 수행을 이어오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영’, ‘불성’, ‘자아’에 대한 이해를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불성을 불변의 실체로 오해할 가능성, 의식과 윤회의 관계, 대승과 선불교 설법을 어떻게 이해하면 혼란을 줄일 수 있는지까지 함께 다루고 있으며, 불성을 찾고 깨닫고자 노력하는 수행자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오온으로 살펴보는 영 · 혼 · 백 」
Q. 불교를 접한 이후 오랜 시간 궁금증을 안고 공부해 왔습니다.
저는 인간 존재 안에 ‘영·혼·백’이 있으며, 이를 통해 불성을 깨닫고 해탈에 이르려는 방향으로 삶을 이해해 왔습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갈등이나 의식의 움직임을 이 영을 성숙시키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좋거나 불쾌한 경험 모두가 수행의 일부이며, 관계 속에서 자신을 다듬어 가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팔정도의 가르침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생에서 곧바로 해탈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윤회를 거치며 영이 점차 성숙해 간다면 언젠가는 해탈이나 불성을 깨닫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인간은 본래 존엄한 존재이며, 나 자신뿐 아니라 타인 역시 불성을 지닌 존재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관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와 관점이 불교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한지, 혹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A. 수행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옛날식 불교 이해에 가깝습니다.
지금 우리가 배우는 불교 가르침에 비추어 보면, 수행자님이 말씀하시는 영혼이나 혼백이라는 것이 우리를 구성하는 오온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영혼이나 혼백이 물질은 아닐 테니 신체는 아닐 것이고, 결국 우리의 마음, 즉 수 · 상 · 행 · 식 가운데 식을 중심으로 한 오온과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Q. 저는 같다고 봅니다.
A. 그렇습니까?
Q. 혼백보다는 육신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몸에 장착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A. 그게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면 생각을 잘못하고 계시는 건데, 지금 수행자님이 말씀하신 거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오온 외에 별도의 나의 자아라고 여겨지는 영혼이나 혼백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Q. 그건 아닙니다.
A. 그렇다면 오온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수행을 통해 변화시켜야 하는 대상인데, 왜 혼백은 존엄한 존재로서 별도의 실체처럼 여기시나요?
Q. 혼백의 개념보다는 영의 개념에서, ‘이뭐꼬’를 했을 때도 그것을 찾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요.
A. 그렇다면 마음 가운데 의식이 영혼입니까?
Q. 의식도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A. 그렇다면 수 · 상 · 행 가운데 어느 것이 영혼입니까?
오온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면, 오온 가운데 어느 것이 영혼입니까?
Q. 어쩌면 어제 말씀하신 공의 개념, 무와 공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형태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만, 어렴풋하게는 그렇습니다.
A.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옳지 않다고 보신 사고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우주의 본체를 브라만이라 하고, 인간은 그 일부인 아트만을 지닌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이 아트만이 자아이며, 이를 깨달아 해탈하면 브라만으로 귀속되어 영원한 해탈에 이른다고 여겼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불변의 실체를 부정하셨습니다.
아트만도 브라만도 존재하지 않으며, 수행으로 아무리 찾아도 그런 것은 없다고 보셨습니다.
무아란 관습적 자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불변의 자아로서 아트만이 없다는 뜻입니다.
대승불교와 선불교에 이르러 불성, 주인공, 본래 면목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시 불변의 자아 개념으로 돌아가는 사고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고 해탈시키려 하면 고통만 계속될 뿐 결코 해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연기의 가르침을 설하신 것입니다.
수행자님께서는 오온과 같다고 하셨지만, 다시 묻자면 수 · 상 · 행 · 식의 배후에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그것이 바로 초기 불교에서 잘못된 이해라고 지적하는 지점입니다.
대부분 초기 불교를 공부하면서 과거에 배운 관점을 수정하게 되는데, 수행자님은 아직 옛 관점을 그대로 유지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생각됩니다. 그 관점에서 다시 검토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Q. 그 뜻은 아닙니다. 경전에는 부처님께서 세세생생 이름을 달리해 출현하셨다고 나오고, 이번 생이 마지막일 수도 있는 존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제가 말한 불성, 영의 개념입니다.
A.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수행자님이 말하는 영혼은 결국 마음입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죽음 이후에는 재생연결식을 통해 다음 생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불변의 아트만이 아니라 의식의 상속입니다.
의식 가운데 저장 기능을 담당하는 아뢰야식이 있지만 이것 역시 의식의 일부입니다.
의식은 불변의 자아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수행을 통해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내려놓아야 할 대상입니다.
해탈에 이르면 의식은 사라지고 지혜만 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의식은 죽음을 넘어 계속 상속됩니다.
세속적 관점에서 의식을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불변의 존재는 아닙니다.
이것이 초기 불교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영혼이라 부르는 것 역시 결국은 의식, 즉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 불변의 자아에 대한 올바른 이해 」
Q. 큰스님들이 법상에서 설법하시는 내용을 보면, ‘진아가 있다’, ‘불변의 자아가 있다’, ‘이것을 찾아야 한다’, ‘그 영이 존재하며 계속 유지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게 됩니다.
아마 그런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받아온 결과로 이런 이해가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A. 그 점이 바로 굉장히 위험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런 가르침을 펴신 것입니다.
만약 불변의 자아가 존재하고, 그것을 찾아 합일함으로써 해탈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힌두교의 가르침이 됩니다.
나중에 불성사상이나 여래장사상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불교는 그런 관점에서 힌두교에 흡수되고 맙니다.
힌두교에서는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불교를 포섭하려는 시도를 해왔고, 불성사상이나 여래장사상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고 주입한 측면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힌두교의 불교 포용 전략으로 볼 수 있는 해석도 존재합니다.
만약 그런 불변의 실체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수행은 오히려 쉬워질 것입니다.
간화선 방식으로 그것을 깨닫고 합일하면 해탈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깨닫거나 합일하려는 시도는 결국 사람을 병들게 하는 길일 뿐이며,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보셨습니다.
예를 들어
불성이나 여래장에 대해 세친과 같은 학자들은 불성이 무엇인가를 묻고 이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즉 이공(二空)으로 드러나는 진여를 불성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연기하는 존재이며, 공으로 드러나는 진여,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능력을 불성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진여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며 아공·법공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해라면 불성사상을 전면적으로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친 역시 불성론에서 불성을 독립된 실체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불성을 불변의 존재, 내재된 실체 혹은 나의 본질로 이해하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아트만이나 브라만 개념으로 해석되기 쉽고, 불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 경우 불교는 힌두교와 같아지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부처나 여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공으로 드러나는 진여를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고 이해한다면 전혀 위험한 사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미 내 안에 있는 불변의 나’, ‘아무렇게나 살아도 나는 이미 부처’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분명한 문제라고 봅니다.